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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오바댜 1:10-14 에돔의 멸망 이유 2003. 10. 29.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오바댜 선지자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서 증거한 내용은 에돔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망하는 것은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교만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나오는 보편적인 죄이지만, 에돔의 구체적인 교만이 무엇인가 하니 야곱에 대한 교만이었습니다. 야곱이 망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야곱이 망하기를 바라며 그 망하는 것에 일조를 하였다는 것이 에돔이 망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에 보시면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은 관계라면 상대방이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함께 즐거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는 일이 생기면 함께 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가 평소에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고 서로 원수 같은 사이라면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든지 흠집을 내려고 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는 일들이 일어나면 동정하는 척하면서 더 쓰라린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모습을 성경에서 다 보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지난주에 보았듯이 그들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국가의 이름이 됩니다. 야곱의 이러한 선택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에서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이삭에게 축복하여 주기를 강청하였으나 축복은커녕 척박한 땅에서 살고 칼을 믿고 살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민족이 에돔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이 형제이기에 선대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신명기에서는 3대가 지나면 에돔 족속도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교만하게 행하였습니다. 야곱이 잘되는 것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방적인 선택으로 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에돔은 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부자가 되고 튼튼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것으로 더욱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을 향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0절에서 에돔이 영원히 멸절되는 이유가 야곱에게 행한 포학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영원히 멸절시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하는 항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디 완벽하게 바르게 살았습니까? 그들도 역시 범죄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았는데 그들에게 포학을 행하였다고 영원한 멸절이란 너무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가 아닌 왜 하필 야곱인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도 하나님의 선택을 계시하지만 야곱은 쌍둥이이기에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미워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를 확정시켜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태어나서 미움 받을 행동을 하고, 사랑받을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택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언제 하나님의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로 선택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심을 보이시는 것이 야곱인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 대하여 미워하고 이런 선택방식을 미워하는 것이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다른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쌍둥이 형제인 에서가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미워한다고 에돔을 영원히 멸절시키고 온 세상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 넣어두는 하나님이 믿어지십니까? 믿어진다면 그것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상한 하나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모두가 심판과 저주 아래 있다고 보신다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항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가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항의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자신의 언약을 담아낼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바로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이삭과 아비멜렉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모세와 바로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갔을 때에도 바로 왕은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겠다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은 인간의 그 어떠한 선행이나 옳고 그름을 인정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잘못하였는데도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의 나라들을 가시와 몽둥이로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교만하여지면 어김없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남기시는 것은 자신의 언약의 말씀만 중요하게 남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전하고 싫어하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또한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미워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바댜 당시에 에돔에 비하여 유다는 너무나 약한 상태입니다. 에돔은 안전한 요새에 도시를 마련하고 힘과 지혜와 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주 외국의 여러 나라들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며 쇠약해 진 상태입니다. 이런 유다에 대하여 에돔은 동정은 커녕 눈에 가시 같은 자들로 여겼기에 망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한 것입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이 아니라 우는 자들에게 더욱 상처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방인과 외국인들이 예루살렘의 재물을 늑탈하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에돔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열강들이 아시아를 서로 삼키려는 의도를 그려놓은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피자를 그려서 조각을 내어놓고 포크와 나이프로 서로 먹으려는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마치 유다를 집어 삼키려고 달려드는 중에 에돔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참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덤벼드는 에돔이 차라리 이방인이었으면 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쌍둥이 형제입니다.
12절입니다.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하고 고난의 날에 입을 크게 벌린 것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눈에 가시 같은 자들이 망하니 속이 시원하다고 기뻐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을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다 백성, 열방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고 약하여질 대로 약하여진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비록 범죄하여 징계를 받고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함께 성문에 들어가지 말고, 환난과 고난을 방관하지 말고, 그 재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는데 오히려 성문에 들어가 재물을 탈취하였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으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하는 자들을 막아서서 다른 나라에 팔아먹은 것입니다. 형제의 환난에 위로와 동정은 되지 못할지라도 가만있었으면 나을 텐데 오히려 적보다 더 악랄하게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돔의 멸망 이유입니다. 에돔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이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15-16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 원리는 에돔이 야곱에 대하여 행한 것을 보응하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 만국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택하신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심판의 기준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시편 41편입니다. “봉독”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택하신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다윗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자들이 다윗이 범죄함으로 약하여 있을 때에 다윗을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반역을 꾀하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신뢰하여 함께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들이며, 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발꿈치를 들은 것입니다.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가장 완전하고 온전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는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온 열방과 관원들이 함께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형제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41편을 인용한 말씀이신데 가룟 유다를 지칭하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에돔의 멸망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신 야곱을 미워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멸망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에너지가 부족하며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무기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문제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를 싫어하고 배척한 것이 세상의 멸망 이유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까? 보잘 것 없는 이웃으로 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누가 핍박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목사가, 교인이 이런 사람을 핍박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고전16:22). 그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살후1:3-12). 우리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그 아들을 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히10:29). 이것이 에돔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멸망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