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四友 2월 답사
경기도 가평군 朝宗面에 특이한 유적이 하나 있는데, 朝宗嵓(巖)이 그것이다. 朝宗은 온갖 시내와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이 세상의 모든 제후와 신하들이 황제를 흠모하고 존경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朝宗縣이라고 했는데, 고려 때부터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고구려 때는 심천현(深川縣)이었다가 신라 때에는 준천(浚川)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에 조종으로 바꾸어서 지금까지 내려온다.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 산 176-1에 있는 조종암은 바위 절벽에 여러 글씨를 새긴 유적이다. 조선 시대의 유적인데,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것이다. 성격이 맞지 않는 두 종류의 글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맨 위 바위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를 새긴 것인데, 思無邪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이다. 바로 아래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宣祖가 쓴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이다. 황허의 강줄기는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니 주변의 작은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뜻이다.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그 옆에는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인데, 해는 지고 갈 길은 머니 지극한 고통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청나라를 치겠다는 북벌이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오른쪽 바위에는 선조의 손자가 직접 슨 朝宗嵓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그 아래에는 견심정(見心亭)이라고 쓴 너럭바위가 있다. 일모도원 지통재심은 宋時烈이 쓴 것이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백 미터 정도 가면 大統廟가 있다. 이것은 병자호란 때 귀국하는 효종을 따라 9명의 명나라 사람이 귀화했는데,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것을 기리는 사당이다. 매년 3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두 번째 답사지는 조선 中宗大王胎峯이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자손에 태어나면 아이의 胎를 좋은 곳에 묻어 후손이 번창하기를 바랐는데,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렇게 했다. 이것을 胎室이라고 한다. 전국에 상당수의 태실, 태봉이 있다. 가평군에 있는 중종 태봉은 왕이 된 후 품격을 갖추어 조성한 것이다. 흩어져 있던 여러 석재를 모아 근래에 다시 복원했는데, 현존하는 태실로 가장 잘 보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북쪽의 외적 침입이 많았는데, 공민왕 때는 紅巾賊이 침입해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 갔던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이방실 장군이었다. 절령(岊嶺) 전투에서 패해 왕이 남으로 피난 가기도 했지만, 이방실의 공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지자체에서 근래에 묘역을 정비해서 유적지로 조성했는데, 묘소를 지키는 문무인석이 가관이다. 일반적으로 무덤을 지키는 문무인석이 아니라 아주 이상한 모습이다.
바로 옆에는 이방실이 있는 줄기의 중심 봉에서 나온 다른 줄기에 조선 시대의 문인 柳夢寅의 묘소가 있다. 於于野談을 지은 그는 걸출한 실력을 갖춘 문인이었으나 모함을 당해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야담집이 유행했는데, 최초의 야담집을 지은 사람이다. 이곳의 墓石도 아주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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