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샤넬. 크리스찬 디올. 베르사체 -브라이트 크리스탈. 지미추-
우먼. 랑방- 에끌라 드 아르페쥬 조말론-피오니 앤 블러쉬
세계 유명 향수이다.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향기 좋은 향수의 냄새에 향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내가 살아온 추억이나. 장소에 대하여 진한
향수를 느끼고는 한다.
향수란 나 자신이 사는 곳이나 지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진한 향 내음 같은 것이기도 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우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 베개를 돋아 고이 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흙에서 자라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 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앤들 꿈엔들 잊힐리야. ~
석진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위스키를
한 병이나 비워가며 오늘도 훌쩍이고 있다.
그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 온지도 벌써 30년이 넘는다.
시골에서 자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시골에서 다니고 고등하교는
지방 도시에서 다니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을 당시에
차석으로 합격 입학한 그런 석진이다.
그런 석진의 부친은 당시 돼지를 잡고 술을 빚어 동내 잔치를
한판 벌였다.
자랑스러운 아들 석진이 때문에 말이다.
1980년대 자유화 민주화 운동은 시대적 배경에서 삶 속에서 석진을
그대로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석진도 암울한 시대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운동권학생이 되어 운동을 하였다.
단순가담이 아니 주동자로 낙인 찍혀 2년 가까운 시간을 실형을
살다가 군에 입대하는 조건으로 조기 석방 되었다.
강원도 화천 최전방으로 배치 받아 군 생활을 하였지만 군 생활도
그리 순탄 하지는 않았다.
헌병대와 보안사에서의 사찰과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대 고참병들에게 늘 구타와 괴롭힘에 시달려야 만 했다.
그것도 석진 보다 서너 살이나 어린 고참병들에게 말이다.
그 군대 지옥 같은 30개월도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돌아간다더니만 돌아가기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복학해서 졸업하고 대 기업에 취직 하였지만 그가 대학시절 운동권
학생 이라는 꼬리표처럼 석진을 따라 다녔다.
정보과 형사들의 사찰과 감시로 회사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게는 인 사상 불이익이 가해지었다.
석진은 울분을 토하고 분통해 했지만 개인이 국가공권력에 대항하는
그 어떤 아무런 조치를 취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조차도 없다.
결국 석진이 이제 막 결혼한 아내와 선택한 것은 자유와 기회의 땅으로
이민을 선택하는 것 이외는 달리 그가 선택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부푼 꿈과 희망으로 미국으로 오기는 했지만 미국도 역시 석진에게는
이방 국이지 꿈을 안겨주는 그런 녹록한 세상이 결코 아니였다.
대한민국에서나 엘리트 화이트칼라이지 여기 미국도 석진 처럼
엘리트들로 넘쳐 나고 있다.
석진은 몇 번에 거쳐 맞을 본 좌절감 이지만 타국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더 큰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마트에서 식품이나 운반하고 정리하는 일이나 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스스로를 갈아먹는 자기비판으로 빠지는 지름길로 접어들어
걷고 있는 것이다. 기회를 자기학대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민 노동자들은 하루 열두 시간 가까이 파트 타인으로 일을 한다.
청소며 건설현장 노동일에서부터 설걷이 등등 굳은 일을 하다보면
그냥 쓰러져 골아 떨어져 버리고 만다.
하루하루 돈을 모으는 재미며 내일 또 돈을 벌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모양이다.
엘리트 출신들은 노동일은 기피하고 사무직이나 관리직을
원하지만 미국도 엘리트가 넘쳐나는 상황이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화이트칼라는 이민사회에서 환대 받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석진은 이민 10년 만에 아내와 이혼하고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고 있다.
석진도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자신의 삶 인생을 후회하며 시대적 자신의 삶을 원망해 본다!
고향의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농사를 짖는 다거나 샐러리맨으로
이제는 퇴직하여 아내와 작은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사는 친구들이
부러울 뿐이다.
후회 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혈육이며 지난날 한국에서의 향수가 가장
석진을 힘들게 하는 모양이다.
고향에 작은 마을이며 거기서 뛰어놀고 먹던 음식이며 명절이 되면
더욱 향수병에 깊게 빠지고 마는 모양이다.
오늘이 한국명절로 추석날이다.
지금쯤 이라면 성묘를 마치고 고향 선후배 나 일가친지들과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에서부터 자랑거리며 삶의
이야기들을 털어 놓을 그런 시간이자만 석진은 위스키 한 병을
안주도 없이 눈물을 삼켜가며 마시고 있다.
후회라는 것을 수도 없이 해 보았다.
차라리 민주화를 열망하는 열렬한 운동권으로 남던가.
미국으로 이민 와서 남들처럼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서 라면
몸이 부셔진다고 해도 열심히 일 이라도 해 볼 것을.........................
가장 마음 아프고 후회되는 것은 가족을 지키고 못하고 그 가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