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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성경 번역 사역의 기준
성경번역은 선교전략에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성경은 야훼의 기록된 말씀으로 구전으로 전해져온 말씀을 기록하게된 것은 “모세오경”이 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구전을 전해져온 말씀을 기록한 언어는 “히브리어”이다.
이후로 바벨론 포로 시기를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언어는 “아람어”로 바뀌기 시작했고, 구약의 히브리성경은 아람어로 번역되어지거나 직접 아람어로 기록되어졌다.
이 아람어는 그 자체가 “셈족어”에 속하여 히브리어와 매우 유사한 언어이었기에 바벨론 시대의 사람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습득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언어는 아니었으리라 본다. 또 이 아람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고, 예수님 자신도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예수님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시기였고, “헬라어”가 세상의 중심 언어가 되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진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신약성서의 대부분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세계의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되어지면서 복음은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듯 성서 변역은 야훼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추적 역활을 한 것이다.
성서번역 선교는 성경의 쓰여지는 시대로부터 시작되어진 아주 중요한 선교 전략이다.
1. 간략한 성경 번역사와 과제
기록된 성경이 없이 야훼의 말씀이 오직 구전으로 전승되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신화와 설화를 믿는 헛되고 거짓된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성경 번역
사역은 기록된 야훼의 말씀이 각 방언으로 번역되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이 읽혀져 동일한 복음의 신앙이 전달되어지고 확립되어지는 중요한 선교 사역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1]
제1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15세기 중엽으로 구약성경이 LXX(70인역)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여 시리아어, 구르지아어, 콥트어, 고딕어, 슬라브어, 라틴어 등 33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2기는 18세기 말까지로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체코어, 헝가리어등 34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3기는 18세기 말부터 근대 선교 시작과 함께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시기이다. 문자가 없는 언어는 문자를 고안하여 번역되었다. 특히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와 세람포르 삼인조(the Serampore trio)는 인디아의 3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은 기념비적인 번역 선교 사역이다.
선교사들의 노력에 1992년 현재 신구약 성경 전서가 출판된 언어수는 276개이고, 신약성경이 완역된 언어수는 676개이며, 성경의 한 책 이상이 번역된 언어수는 1,012개이다.[2]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어지는 언어는 6,422개이며 성경의 한책이라도 번역되어 있는 언어는 2,089개이다. 결국 4,333개의 언어는 성경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중 75개의 언어는 거의 소멸되었고, 567개의 언어는 2중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대처할 수 있다. [3] 이렇게 볼때 앞으로 2,569개의 언어는 성경번역이 필요하다.
또한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구언어는 소멸한다. 때문에 기존해 번역되어진 성경이라도 최소 20년 후에는 재 번역을 해야한다. 결국 성경번역은 야훼 나라의 도래 때까지 계속 되어져야 할 선교의 소명이다.
2. 성경 번역에서의 언어학적 고려사항
성경 번역은 당연히 원주민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어야 한다. 원주민의 언어는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하는 언어이다. 언어에는 그들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문화와 정신까지도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언어학 훈련은 번역선교사뿐 아닐 다른 분야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언어학 훈련 입문과정은 언어의 습득과 분석으로 한 언어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상급과정에서는 번역의 원리와 문화 인류학, 문명 퇴치론과 지역사회 개발론을 포함한 현대 언어학 이론과 연구를 폭넓게 소개한다. [4]
이렇듯 성경 번역을 시작하는데는 수많은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꼭 필요한 최소의 언어학의 조건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5]
첫째는 번역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은 성경 언어의 문법, 어휘, 주석, 역사, 문화적 배경을 알고 고대 사본과 현존하는 사본들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번역할 대상 언어의 어휘와 문법 체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세째로 번역된 글이 자연스럽고 문화적으로 타탕한 표현이 되려면 현지인이 조력자이든 공동 번역자로서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성경 번역에서는 언어학적 연구방법이 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 번역 사역에 있어 항상 있어진 논쟁은 언어학적 연구방법론에 있다.
A. 타 문화와 관습에 대한 이해
종교는 한 문화의 배경과 관습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토착 종교는 토착 문화와 관습을 대표한다. 외래 종교와의 접촉에는 4가지의 반응의 유형이 나타난다.[6]
첫째는 배타적 반응이다. 절대적 스스로의 종교 사상만을 내세우는 반응이다.
둘째는 수용적 반응이다. 수용적 반응이란 타종교에 대한 어떠한 비평이나 검토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반응을 말한다. 이런 수용적 반응은 모든 종교를 같은 종교로 인정하는 반응으로 힌두교와 같은 입장의 종교관이다.
세째는 포괄적 절충 반응이다. 이 반응은 타종교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사상과 전통을 토착종교와 타종교를 혼합하는 종교관이다.
네째는 포괄적 전통 반응이다. 이 반응은 타종교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만 종교의 사상과 신앙은 전통을 고수할 뿐 새로운 종교관이나 사상체계를 내세우지 않는 반응이다.
때문에 성경 번역사역뿐 아니라 설교나 강의를 통하여 성경의 메세지를 전달하는데는 아무리 원주민의 언어를 잘 구사한다하여 바르게 전달되어지지 않는다. 잘 전달되어지지 않은 이유는 성경과 전달자, 전달자와 현지인 사이에는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있다.[7]
전달자는 먼저 성경의 역사와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 하므로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메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한 현지인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여 성경시대 당시와 현지인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차이를 해결할 때 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현지인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진다.[8]
성경 당시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과 현지인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해결한다는 것은 두 문화를 통합하거나 절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음과 문화 사이에는 절충하거나 통합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의 문화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론이 아닐 신성한 계시이다. 그것은 어느 하나의 문화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문화에 적절히 표현될 수 있 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과 인간의 문화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화의 배경 과 복음을 동등하게 다루어왔다.”[9]
그러나
“복음이 인간 문화들과는 구별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반드시 문화적 형태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인간은 언어와 상징과 예식으로부터 분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복음은 사람들이 듣고 믿게 될 때, 문화적 형태 안에서 성육신되어야 한다.”[10]
폴 히버트(Paul G. Hiebert)의 이러한 견해는 복음이 인간의 문화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재적인 적용에서는 복음이 인간의 문화로 바뀌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문화를 잘못 이해한 견해로서 그가 지적한 “선교사들이 복음과 인간의 문화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화의 배경과 복음을 동등하게 다루어왔다.”라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의 견해처럼 복음이 문화적 형태로 바뀌게 되면 인간은 복음을 문화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 문화로 인식되어지면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이러한 새로운 문화인식에 의해 인간은 새로운 신을 창출하게 된다.
폴 히버트와 같은 견해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학자인 앤드류 윌스(Andrew F. Walls)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비교하면서 코란은 번역될 수 없어 회교 문화를 만들어 가지만, 성경은 얼마든지 번역이 가능하여 그리스도가 각 문화와 언어 속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번역되어 왔음으로 외부인의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11]
성경이 각 문화와 언어 속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번역되어 자신들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각 문화와 형식에 따라 그들이 만나는 그리스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번역에 앞서 성경이 무언가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져야 한다. 성경은 기록된 야훼의 계시된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야훼의 말씀은 변함없는 진리라고 고백한다. 진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백안에서 성경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야훼의 말씀은 유대인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쓰여진 글이 아니다. 문화적 배경에서 쓰여진 글이라 한다면 바뀐 문화적 배경에는 전혀 맞지 않은 글이 된다. 인간의 이해는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서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과 맞지 않은 문화적 배경에서 쓰여진 글이라면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의 당시의 시대적 문화 배경에 맞추어 복음이 해석되어지고 다시 오늘날의 현지인의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복음이 해석되어져 적용이 된다면 분명 그 복음은 처음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 될 것이다.
성경은 당시의 전통적, 문화적, 관습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오늘날의 현재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관습으로 바뀌어 번역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의 문화는 바뀐다. 한 세대 안에서도 문화는 급변한다. 복음이 급변화하는 문화 속으로 성육신화 한다면 절대로 나의 그리스도와 옆 사람의 그리스도가 다를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야훼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B. 고유명사인 신의 이름의 뜻과 발음에 의한 번역
고유명사는 대부분 인명과 지명이다. 성경 번역에 있어 가장 어려운 언어는 히브리성경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성경은 자음으로만 기록되었고 모음은 분리되어 구전으로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정확한 모음을 사용할 수 없고 단어의 발음이 다르면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승되어진 모음을 가장 정확한 발음이 되어지도록 모음을 만들어 표기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단어의 뜻이 전혀 달라질 염려는 없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단어는 신의 이름이다.
고대로부터 어떤 신이나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그에게 무언가를 간청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름을 안다는 것은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다신교적인 주변환경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신을 안다는 것은 그 신의 이름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누군가 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신을 부를 수 있겠는가! 단지 “오, 신이여!”라고 부를 것이다. 또한 어떤 신이 응답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어떤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신을 예배한다는 것을 이미한다. 그러기에 시편의 비탄시(Psalm of lamentation)와 기도시 (Psalm of prayer)가 “오, 야훼여!”라는 기원(ivocation)과 함께 시작한다.[12]
이 신의 이름 야훼는 히브리어 구약성경(YHWH)과 아람어 구약성경(Yuw) 그리고 헬라어 구약성경(LXX: Ieou)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헬라어 신약성경에 와서는 신의 이름 야훼가 없다.
구약과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공인된 이후에 번역되어진 각 언어의 성경들에도 히브리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야훼는 모음을 붙여 발음되어지는 “여호와”로 번역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된 빈도 수는 영어 성경 KJV에는 “Jehovahjireh (창22:14 “여호와 이레”), Jehovahnissi (출17:15 “여호와 닛시”), Jehovahshalom (삿6:24 “여호와 샬롬)으로 형용사를 덧붙여 기록하고 있고, ReWebst에는 이사야51:22에 한번 더 기록되어있다. 그외에 Darby에는 5790번, ASV (5818), NIV (0), NAS(0), NRS (0), RSV (0), NKJ (0)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영어 성경에는 Lord와 함께 사용하거나 Lord로 대체하여 기록하고 있다. 중국 성경에는 상제(上帝), 일본어 성경에는 신양(神樣:가미사마), 한국어 성경에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원어성경에 기록되어진 신의 이름 야훼가 번역되어지는 성경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신의 본 이름이 없어지고 각 언어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기록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고유명사를 일반명사로 바꾸어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특히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는 글자 하나를 바꾸면 전혀다른 이름이 된다.
Har (우리아: 삼하11;3,6,9,10…23:39; 왕상15:5; 대상11:41; 스8:33; 느3:4)와 h[r (우리야: 왕하16:10,11,15,16; 느3:21, 8:4; 사8:2; 렘26:20,21,23)처럼[13] a와 [에는 발음의 차이가 거의 없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에 번역에 있어 발음에 의한 표기도 신중하게 하여 분명한 구분을 하여 정확한 사람을 기록하여야한다.
성경번역에 있어 사람의 이름하나를 번역하는데도 단어하나의 잘못된 기록을 허용하지 않는데, 신의 이름은 아주 삭제해버리거나 다른 이름으로 대처하여 번역을 한다면 과연 옳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성경번역에 있어 신의 이름은 그 정확성이 그 어떤 단어보다도 정확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신의 이름 “hwhy (야훼)”를 음역하여 번역할 때는 “YHWH(야훼)”라고 기록하는 것이 정확한 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번역이 된다.
히브리 성경에는 신의 이름은 야훼로 기록하였고, 그들이 발음할 때는 아도나이(주님)로 발음하였는데 발음에 사용되어진 아도나이를 신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것도 잘못된 성경 기록 방법이다. 더욱이 성경 번역에 있어 전혀 다른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원어 성경에서 기록된 야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의 이름을 만들어내는 잘못된 번역이다.
C. 고유명사인 신의 이름의 성(Gender), 수(Numbers)에 대한 번역
히브리 구약 성경을 번역할 때 정확한 신의 이름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잘못된 새로운 신들로 번역되어진다.
먼저 생각되어져야 할 것은 야훼, 엘, 엘로힘에 대한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로서의 구분이 잘못되어졌을 때 생겨나는 또 다른 신의 이름이다.
첫째, 야훼는 신의 본명으로 성과 수를 갖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고유명사중 이름은 이름 자체에 성과 수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사용하는 대상에 따라 성과 수가 정해진다.
그러나 야훼라는 단어에는 그 근본적인 뜻이 “나는 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중성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또한 수에는 오직 단수만을 사용한다. 고유명사중 이름은 항상 단수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엘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다. 신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성에 있어서 남성, 여성, 중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질 수 있으며 수에 있어서도 단수로 또는 복수로 사용 되어질 수 있다.
세째,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으로 “최고의 신, 최고의 권력을 자진 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지는 일반명사이다. 그러기에 성에 있어서도 남성, 여성, 중성에 모두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수에 있어서도 단수, 복수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각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경은 야훼와 엘, 엘로힘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본 이름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나타내주고 있지를 못한다.
여호수아 22장 22절에 나나탄 “huhy myhla la”는 한글 개역성서에서는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라고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은 “가장 높은 신 하느님 야훼”라고 하였다. 표준 새번역은 “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라고 하였다. NRSV 영어성경에는 “The Lord, God of gods!”로, 주석가 버틀러 (T.C. Butler)와 소긴 (J.A. Soggin)은 “El, God, Yahweh”[14], 볼링 (R. G. Boling)은 “God of Gods is Yahweh”[15]라고 번역하였다. 이렇듯 영어성경 NIV, NAS, NRS, RSV, NKJ에서는 야훼, 엘. 엘로힘은 일반명사 “God 또는 Lord”로 구분없이 사용하고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명사를 사용한 신의 이름은 성에 있어 남성, 여성, 중성의 신이 될 수 있으며, 수에 있어서도 단수 또는 복수의 신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번역되어진 신은 유일신으로 인식되어질 수 없고 다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일반명사가 신의 이름으로 사용되어질 때 인식되어지는 사람에 따라 신은 남성 신이 될 수 있고, 여성 신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성경 번역에 있어 신의 이름을 일반명사로 번역한다면 기독교는 범신론으로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잘못된 번역에 의해 기독교내에서 아버지 신, 어머니 신, 아들 신, 영 신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 명사에서도 그 단어의 성과 수를 바꾸게 되면 성경의 본질적 의미가 바뀌게 된다.
NIV 성경은 1978년에 첫 발간이 되어 전 세계에 30억부 이상 팔렸으며 복음주의 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북미 지역의 전체 성경의 30%를 점유하고 있다. 1984년에 한번 개정한 적이 있고, 2000년 초에 TNIV(Today’s International Version)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이 성경은 “신의 아들들(sons of God)을 신의 자녀들(children of God)”로 바꾸었으며 “형제들(brothers)를 형제 자매들(brothers and sisters)”로, “신이 인간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man)”는 구절에서 남성적 성격의 “man”을 중성적 성격의 “human beings”으로 바꾸었다.[16]
이러한 성과 수를 바꾸는 성경 번역은 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번역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번역의 움직임이 신의 이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80년대 초 “돌이 아니라 지혜의 떡으로”라는 책을 발표한 피오렌자(E. S. Fiorenza)[17]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이 여성 신학자들은 성경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성차별화된 성경구절을 모두 여성 해방적 성경으로 재 번역해야한다[18]는 주장을 하였으며 2005년 한국의 일부 여성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주기도문에서 ‘아버지’를 중성적 표현으로 ‘어버이’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교계의 반발로 좌절된 바 있다.
그러나 2005년 이후로 한국인 교회들은 설교와 신학교 강의를 통하여 중성적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19] 한국의 일부 교회는 남성과 여성적 표현인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를 사용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20]
결과적으로 신의 이름에 성과 수를 바꾸어 신의 이름을 사용하면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게 되어있다.
D. 이름과 호칭에 의한 번역
번역 성경에 있어 이름과 호칭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하여 이름과 호칭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의 신들로 번역되었다. 성경번역에서 앞서 이름과 호칭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야 할 것이다.
1) 신명칭에 관한 이해
이름은 개인의 모든 정보를 나타낸다. 이름은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과 인격성 그리고 이미지와 개인의 위치(forgision) 등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름을 포함하여 불려지는 모든 호칭을 명칭이라 한다. 우리는 명칭을 다음과 같이 이해 할 수 있다.
최종찬 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최종찬이라 부르며 때로는 친구라고 부른다. 교회에서는 그를 부를 때 목사님이라 부르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 부른다. 이렇게 불려질 때는 이름과 함께 명칭이 사용된다.
또한 가정에서는 남편(여보)과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때는 아내와 자녀의 이름과 함께 사용된다.
우리가 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의 이름(Divine name)은 이러한 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엘머 타운즈는 사람의 이름과 직함을 보고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면서, 신의 이름을 연구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21]
첫째, 우리가 신의 이름을 연구하면 그분의 속성들에 관하여 자세히 배울 수 있다.
둘째, 신과 우리와의 관계성을 알수 있있다.
세째,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과 해결이 신에게 있음을 알수있다.
네째, 신의 명칭을 통하여 위기에 처했을때 우리가 신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경에 거룩한 신의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수많은 신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수 많은 신의 명칭에서 신의 이름과 호칭을 구분하여야 한다.
만일, 신의 이름과 호칭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신의 호칭만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렇게 신의 호칭만을 사용하게 되면 다신을 만들게 된다.
2)
문서설에 대한 신의 명칭 이해
맛소라 본문 BHB의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앞에 야훼나 단어 뒤에 인칭 접미사를 붇이지 않고 단독적으로 쓰이고 있기도하다. 그러나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또 다른 신의 명칭이 나타나는데 신의 그명칭은 야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명칭을 연구하는데 이렇게 신의 명칭으로부터 시작된 신학적 연구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문서설의 큰 줄기로 확대 되었다. 따라서 문서설에 대한 점검은 신의 명칭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될 수 있기에 여기에 그 연구사를 짤게 다루려 한다.[22]
문서설의 시작은 오경이 모세의 저작설에 대한 반증이다.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쓰여졌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약 해석학과 구약 신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젤린과 포러는 말하고 있다.
이 문제 해결의 첫 시도는 힐데스하임의 비터(B. Witter)목사였다. 그는 자료구분의 기본적인 기준을 창세기의 “야훼”와 “엘로힘”으로 보고, 두 개의 창조설화가 구약에 있다고 보았다. 아스뜨뤽도 두 가지 신명을 자료구분의 기준으로 삼고, 창세기에서 모세가 사용한 두 가지 주요 자료와 열 가지의 부차적인 자료를 구분하였다. 이것으로 시작된 문서설을 젤린과 포러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했다.[23] 문서설은 P(제사문서), E(엘로히스트), J(야훼스트), D(신명기)로 구분한다.
a) 초기 문서가설: 아이히호른 (Eichhorn)은 두개(엘로히스트: Elohist)와 야훼스트(Yahwist)의 주요 자료를 구별하였고, 일겐 (Ligen)은 두 엘로히스트와 한 야훼스트로 구별하였다.
b) 단편 가설: 게데스(Geddes), 파터(Vater), 드 베테(De Wette)는 오경의 법전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c) 보충 가설: 에발트(Ewald), 블릭(Bleek), 투크(Tuch), 텔리취(Delitzsch)는 근본적인 엘로힘 자료가 있고 후에 야훼 자료가 그것을 보충해 주었다. 에발트는 두 개의 엘로힘 자료에 야훼 자료가 보충되었다고 보았다.
d) 후기 문서 가설: 훕펠트(Hupfeld), 리임(Riehm), 딜만(Dilmann), 텔리취(Delitzsch)는 세 개의 독립적인 자료가 있었고, 두 개의 엘로힘 자료와 야훼 자료 하나가 편집자에 의해 결합되었다. 특히 리임은 신명기가 오경의 다른 책들과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보아서 문서 비평의 근거가 일단락되었다.
e) 로이스(Reuss)와 파트케(Vatke)는 P자료가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니라 가장 늦은 것이라고 보았고, 이 견해를 확립시긴 자는 그라프(Graf)와 꾸에넌(Kuenen)과 벨하우젠(Wellhausen)이다. J는 오경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이고, P는 야훼 종교 역사의 맨 처음에 속하는 자료가 아니라, 매우 후기에 속하는 자료이다. 그결과 J(9세기)-E(8세기)-D(7세기)-P(6세기)의 순서가 된다.
젤린과 포러는 E와 P는 처음부터 신을 똑같이 “엘로히”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다른 자료로 구분된다고 하면서, J는 모세 이전의 시대부터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두 자료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24]
그들이 신명기에서 J자료라고 부르는 것은 신31:14, 16, 23; 34:1~6인데 그 중에서 신31:23은 E자료일 수도 있으며, 34:1은 E와 P 자료일 수 있음을 표시해 놓았다. 또한 J의 경우처럼 E라는 약자가 좋은 선택은 아닌데, P도 처음에는 “엘로힘”이라는 신의 호칭을 사용하는 두 자료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면서, J자료가 거의 확실하다고 인정을 받는 것과는 달리, E자료의 존재는 훨씬 더 까다롭게 인정받고 있을을 지적한다.
그들이 신명기에서 E자료라고 보는 것은 신31:14~17, 23, 33장, 34:1이다. 그 중에서도 앞서 살펴본대로 신31:23은 J일 수 있고, 신34:1은 JP로 볼 수 있다.
D자료는 창세기와 민수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십계명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출20:1~17) 몇 개의 보충적이거나 편집적인 설명을 제외하고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장자에 관한 규정들 (출12:24~27a, 13:3~16)을 D의 것으로 돌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최소한 신명기 1~30장과 31~32장의 몇 구절은 D에 속한 것이고, 31~34장의 대부분은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에 나오는 기타 자료들의 기본적인 자료를 확대시킨 것으로 신명기의 D부분이 본래 독립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신명기는 신명칭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체와 내용으로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명기의 신학을 “제사 의식의 독특한 중심지, 야훼의 질투, 신의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신명기에서 야훼가 그 중심이다.[25]
신명칭으로 자료를 나눈 문서설에 반대하여 카수토는 “의심할 여지 없이, 신의 명칭을 택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우연히 그러헤 된 것이 아니라 거기엔 어떤 의도적인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신의 주장을 한다.
이 두 명칭은 같은 유형의 것이 아니다. 엘로힘이란 명친은 본래 보통명사이며, 총칭명사(appellative)로서 이스라엘의 유일신에게도 적용되고, 이방의 여러 신들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야훼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로서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특별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카수토의 연구 범위는 엘로힘이 야훼와 동의어로써 또 야훼를 대신한 말로서 고유명사의 기능으로 사용된 경우만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폭 넓은 자료를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야훼와 엘로힘에 대한 카수토의 설명을 들어봐야 한다.[26]
a) 야훼
(1) 본문이 야훼의 모습 속에서 구체화된 이스라엘적인 신개념이 반영되어 있고, 야훼의 윤리적 특성이 나타나있다.
(2) 대중들의 단순한 신앙이나 예언자적인 정신이 불타오르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신관념을 지칭한다.
(3) 비교적 명확하게 잘 알수 있는 용어로 신의 속성이 분명히 묘사되어있다.
(4) 율법이 독자들이나 청취자들의 마음 속에 존엄하고 영광 중에 계신 신의 임재에 대한 장엄성을 느끼게 한다.
(5) 신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이나 백성이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련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사용되었다.
(6) 주체가 이스라엘의 전통과 관련되어 있다.
b) 엘로힘
(1) 당시의 국제적 테두리 안에서 유행하던 신의 추상적 관념(창조자, 지배자, 생명의 근원)을 나타내고 있다.
(2) 세계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고상한 문제들을 묵상하는 사상가들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3) 일반적이고, 피상적이며 애매한 인상을 준다.
(4) 일상적인 방법으로 신을 언급할 때, 경외심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이름과 관련을맺어 사상을 표현하지 못할때 사용되었다.
(5) 물질적 세계관을 초월해서 완전히 물질적 세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을 묘사하다.
(6) 주제가 일반적인 전통에 관련되어 있다.
카수토는 율법에서 신의 명칭이 여러가지로 사용해야 할 위치에서 사용된 것이지, 문서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웰리엄 헨리 그린(William Henry Green)은 그의 논문에서 “엘로힘”과 “야훼”는 같은 분을 지칭하며 따라서 어느 정도 교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서로 다른 측면에서 표시하며, 히브리어 성경 전반에 걸쳐 그 용법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말한다. “야훼는 이방의 신들과 구별되어 이스라엘의 신에게 독점적으로 속한 고유 명사인 반면에 “엘로힘”은 보통명사이며, 참 신에게 국한되지 않고 이방신들에게도 같이 사용된다.” 이 두 신명칭 사용에 대한 그의 구분은 다음과 같다.[27]
a) 야훼
(1) 이스라엘인들이 신에게 또는 신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했다.
(2) 이방인이 이스라엘인에게 또는 이스라엘인이 이방인에게 말할 때에도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분명한 관련이 있으면 사용했다.
(3) 자신을 선민의 보호자와 예배의 대상으로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선민과 특별한 관계에서 사용했다.
b)
엘로힘
(1) 비 이스라엘인들이 말할 때 사용했다. (삿1:7, 7:14, 삼상4:7~8, 29:9, 30:15, 사45:14, 욘1:6, 2;8~9, 슥8:23, 대하35장, 21:22)
(2)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에게 말할 때에는 자신을 저들의 수준에 맞추어 “엘로힘”을 공용어로 사용했다. (삿3:20, 삼상22:3, 단2:45, 삼하7:23, 욘3:5,10)
(3) 선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들과도 특별한 관계가 없이 모든 인류와 일반으로 관련된 신적 존재 또는 신적 작용을 말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엘로힘과 동의어인 엘은 고유명사와 구별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수식어가 붙을 때에는 엘과 엘로힘을 야훼보다 더 많이 사용되어졌다고 주장한다.[28]
이상의 세가지의 주장은 분석은 일반적으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주장들이다. 여기에 몇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야훼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이스라엘의 신의 이름으로 쓰여졌다는 것과 둘째는 엘과 엘로힘은 보통명사로 이스라엘의 신뿐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신들에 대하여 호칭으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이다.
[1] 조지 M. 코완/성경번역선교부(GBT),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언어로, 9~10.
[2] Ibid, 280.
[3] Ibid, 53.
[4] Paul Christophersen, Second-Language Learning, (Penguin Modern Lingusitics
Texts, 1973), 29~33.
[5]조지 M. 코완/성경번역선교부(GBT),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언어로, 71~4.
[6] 윤용복, “19세기 인도 종교운동 –힌두교 전통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 13.
[7] Paul G. Hiebert/김동화 외 3인, Anthropological Insights for Missionaries/선교와
문화인류학, (서울: 죠이선교출판국, 1998), 18~22.
[8] Ibid, 39~74.
[9] Ibid, 74~75.
[10] Ibid, 76.
[11] 이장문, 기독교의 미래, (서울:청림출판, 2006), 27~28.
[12]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Hebrew Union College Annual
32」 (1961), 122~3.
[13] 박동현, “개역한글판 구약전서의 고유명사 음역 일부 통일제안” 「성경원어연구
제11호」(서울:대한성서공회, 2002), 72.
[14] T. C. Bulter & J. A. Soggin, Joshua,
(Philadeophia: The
1972), 210.
[15] R. G. Boling, Joshua, (New York: Doubleday & Co., 1982), 503.
[16] NIV와 TNIV의 비교
Genesis 1:26-27, Genesis 5:2, Psalm 1:1-3, Psalm 8:3-8, Psalm 34:20, Proverbs 5:21, Matthew 7:3-5, Luke 17:3, John 14:23, Acts 20:28-30, 1 Corinthians 14:28, 1 Corinthians 15:21, 1 Timothy 2:12, Hebrews 2:17, James 1:12, Revelation 3:20, Revelation 22:18
[17] E. S. Fiorenza, Bread not Stone: The Challenge of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Boston: Beacon Press, 1984), 13.
[18] Fiorenza의 1996년 10월 이화여자대학교 여성신학연구소 초청 강연 원고
“Bread/Rice of Wisdom: Biblical Interpretation for Liberation”, 5.
[19] 허정갑, “다문화권의 하나님”, 「KAM Newsletter Vol.4, No.6.」(2008), 5.
[20]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한국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있다. 기독교 내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내용은 신학적 차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모든 교단이 신학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신학적 차이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큰 잘못된 판단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의 이름이 다르면 이단이라 규정하기 보다는 타종교로 규정하여야 한다.
[21] 앨머 타운즈/박이정,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17~20.
[22] E. 젤린, G. 포러/김이곤, 문희석, 민영진, 구약성서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121~210.
배제민, 반문서설, (서울: 기독교문사, 1998) 11~22.
알리스/김정우, 모세오경,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9~197.
[23] E. 젤린, G. 포러/김이곤, 문희석, 민영진, 구약성서개론, 121~33.
[24] E. 젤린, G. 포러/김이곤, 문희석, 민영진, 구약성서개론, 160.
[25] E. 젤린, G. 포러/김이곤, 문희석, 민영진, 구약성서개론, 168~96.
[26] Oswald T. Allis/Kim Jeng Woo, Five Books of Moses, 26~45.
[27] 웰리엄 헨리 그린, “오경에 나타난 “엘로힘”과 “여호와”의 용법”「구약신학 논문집(2)」(서울:성광문화사, 1989) 43~58.
[28]웰리엄 헨리 그린, “오경에 나타난 “엘로힘”과 “여호와”의 용법”,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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