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소설가 자필원고 <만취당기(晩翠當記)>
시인 하재영
패기 넘치는 30대 초였다. 잡식성 취향으로 온갖 분야의 문학을 곁에 두었다. 뚜렷하게 내가 어느 분야의 글을 쓰겠다고 맘 먹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스무살 언저리 글을 쓰는 일에 뜻을 두면서 늘 책을 들고 다녔다. 시력도 나쁘지 않아 버스나 기차 안에서도 책을 넘겨보았는데 그때 손에 든 책은 대부분 소설이었다. 속독으로 하루 이틀에 한 권 읽을 때도 있었다.
짧은 대학 시절(2년제)에 읽은 신인들의 작품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게 된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먼나먼 쏭바강” 등과 같은 소설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미 조금 까다롭게 읽어야 할 외국 장편 소설도 손에 잡곤 했지만 말이다.
1987년 직장을 포항으로 옮기며 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었을 때에는 동화를 썼으면,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을 때는 시를 써야겠다고, 그러면서도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초등학교에 근무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동문학은 뗄 수 없었다.
등단이란 과정을 거치며 지역 문학판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지역이라는 곳이 으레 그렇듯이 문예지를 발간하고, 백일장과 문학강연이 지역의 큰 행사로 자리잡을 때였다. 백일장을 개최하면 초중고생과 일반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2천 명이 넘는 지역의 큰 축제였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포항문인협회에서는 수필가 빈남수, 동화작가 손춘익 두 분이 대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그분들과 교류하는 서울 거주 문인들이 이따금 포항을 찾아오곤 하였다. 당시 포항을 찾았던 충청도 출신 문학인으로 평론가 유종호, 시인 신경림, 소설가 이문구, 김문수가 있었다.
어느 해엔 김문수 소설가가 다른 분들과 포항을 찾았다. <만취당기(晩翠堂記)>라는 소설로 동인문학상을 받은 그 해였는지 그 이듬해였는지 선명한 기억은 없다. 소나무 무성한 기계면 기계 서숲에서 만취하도록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 형.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요.”
소설가 김문수 선생님은 나에게 ‘형’자를 붙였다. 지독하도록 아날로그 시대였던 1990년 전후였다. 동향이었던 김문수 소설가와 나와의 만남은 전적으로 그렇게 포항에서 몇 번 있었다.
잦은 행사와 직장 일로 늘 바빴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모시던 어른들이 이 세상에 없음을 의식했다. 더욱이 그 자리, 그분들이 맡았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작품을 쓴다고 했지만 명작과는 거리가 먼 작은 문인으로 머물고 있음도 깨달았다. 차일피일 미루던 작품 쓰기는 허황된 욕심 같았다. 전적으로 작품에 매달려 목숨 걸고 써야 하는데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때 나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작고 시인들의 시집이었다. 은퇴하면 어디 조용한 곳에 작은 카페를 열고, 그 안에 시집을 전시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별 볼 일 있는 시도 쓰겠다는 꿈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집 수집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거물급 시인의 시집 몇 권을 큰 돈을 들여 구할 수 있었다. 서정주 시선(1956년), 농무(신경림 1973년, 월간문학사), 아사녀(신동엽, 1963년), 성벽(오장환, 1947녀), 백록담(정지용, 1946년)을 비롯하여 희귀시집 몇 권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만지는 시집들이 대단해 보였다. 사실 그런 책들은 이미 소장가들의 손에 들어가 있어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습관은 타도시에 가게 되면 으레 헌책방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혹시 희귀시집이라도 눈에 띌까 해서다.
어느 해였던가. 2012년? 2013? 연수차 서울의 한 대학에 올라갈 기회가 있었다. 연수가 끝나고 여유롭게 청계전 헌책방 몇 군데를 들러보다 동묘 부근 헌책방까지 가게 되었다. 근간 시집 몇 권 손에 들고 계산하는데 주인장이
“이런 것은 안 필요해요?”
책상 밑에서 새까만 비닐 봉투을 꺼내 주섬주섬 안에 것을 꺼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원고가 이곳에…. ?’
소설가 김문수 선생님의 자필원고였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얼만대요?”
“백오십만 주세요. 싸게 주는 거예요. 자필원고는 귀해요.”
젠장, 봉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내 수중에 몇 만 원도 없는데 십만 단위도 아니고 백만 단위를….
사실 당시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그 큰 돈을 어디서 물색하지, 하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들고 가야겠디고 맘 먹었다.
“지금 돈도 없고…. 조금 생각해 볼게요.”
“이런 것은 보는 사람이 임자에요.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있어요.”
헌책방 주인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날 나는 김문수 소설가의 자필원고를 구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터가 있는 포항까지 가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대신 근처 찜질방에 들어가 하루를 보내며 그 원고를 사갈 궁리를 했다.
다음날 오전 나는 다시 그 헌책방을 찾았다.
분명 몇 푼 에누리했던 것 같다. 김문수 소설가의 자필원고를 품에 안고 버스에 오르며 소설가의 약력을 검색했다.
“1939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중, 청주고 졸업. 1959년 자유신문 신춘문예 단편 <외로운 사람> 수석 입선,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 <이단부흥(異端復興)> 당선. 1967년 단편 <반향쇄풍기>로 충북문학상 수상, 1975년 단편 <성은(聖痕)>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1978년 중편 <육아(肉芽)>로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1986년 중현 <끈>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7년 소설집 <머리 둘 달린 새>, 장편 <물래나물꽃>으로 조연현 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 1989년 <만취당기(晩翠當記)>로 동인문학상 수상, 1997년 <파문을 일으킨 모래 한 알>로 오영수문학상 수상, 1999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 부문 대통령상) 수상, 2012년 사망”
자필원고가 어떻게 그 헌책방에 있게 되었을까?
나름 추측했을 때 대학 교수실에서 폐지로 나온 것이 그 헌책방까지 온 것 아니었을까?
뿌듯한 맘으로 버스에서 살며시 자필로 쓴 김문수 소설가의 원고를 넘겨보았다. 김문수 소설가의 호탕한 얼굴 모습이 자필 원고에 오버랩 되었다.
김문수 소설가의 소설 ‘만취당기’ 자필원고는 그렇게 하여 내 집 ‘시월서고(詩月書庫)’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