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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우리교회 시리즈(06) 2016년 6월 12일 주일 메시지
소금, 빛, 이리 가운데 있는 양
마태복음 5:13~16, 10:16
건강한 교회를 갈망하며
지난 해 2015년 1월 25일 우리 교회는 두 교회의 통합에 의해 다시 출발했습니다. 34년된 새소망교회와 2년 반 된 신생 옹달샘교회가 하나된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의 통합이 있기 전에 교회의 대표이신 이인성 장로님이 당시 교회의 치리(治理)를 맡고 계셨던 박상혁 목사님과 함께 저를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면서 제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목사님, 우리 교회는 연수는 오래되었지만 이제 다시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당시에 옹달샘교회를 개척하여 얼마 되지 않은 상황으로 개척교회의 고난을 겪고 있던 터라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새소망교회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저는 주일 메시지를 통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씀,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란 죽어서 가는 나라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나라인가? 예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종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경영하시고 통치하시는가? 그런 문제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통해서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며,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행복한 삶으로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러 번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은 대리인을 세워서 그를 통하여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리인으로서 오늘날 우리들 곧 하나님의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가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년 동안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면 그 대리인의 임무를 잘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다섯 주간 동안 ‘건강한 우리 교회’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다시 찾아가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크 엘룰이라는 분은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에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을 요약 인용합니다. 제가 설교 중에 철학자의 말은 거의 인용하지 않지만 오늘 이 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기에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국가는 그 국민의 숫자에 비례한다. 한 국가가 쇠퇴할 때, 국민의 숫자는 감소하고 국가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국가의 개념은 없어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숫자에 반비례한다. 단 한 명의 참된 기독교인만 있어도 기독교의 실재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개념은 숫자에 반비례하고, 국가의 개념은 숫자에 비례한다.” (자크 엘룰의 뒤틀려진 기독교, 65쪽 참조)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흥을 기대하기 전에 숫자에 있어서 10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한국교회는 성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지도력, 그리고 한국 사회 속에서의 신뢰성은 매우 추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적은 수로 모여 부흥을 기도하는 우리들은 숫자가 더 커지기 전에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고 공부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사명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큰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눈에는 어떤 교회가 건강한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렇게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모든 일을 그런 관점에서 결정하고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고 있는 “건강한 우리 교회”라는 주제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문제에 관하여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매 주일 설교를 준비합니다.
건강한 우리 교회에 대한 메시지의 복습
그러면 지난 다섯 주간 동안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를 전했는데, 그 핵심 내용을 오늘 다시 생각해 보고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먼저, 교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DNA가 심겨져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은 서로 하나되고 서로 높여주고 서로 복종하는 사랑의 공동쳅니다. 그 안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서로 하나되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 공동체적 DNA가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늘 우리가 점검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건강한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명이 있음을 잘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 확신이 분명한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화봉송주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의 횃불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에게 사랑의 불을 붙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정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요 그 일을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체험하게 됩니다.
네 번째, 지난 5월 29일에 설교한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교횝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법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의 친구가 되는 일에 힘쓰자고 했습니다.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먼저가 아니요 그의 진실된 친구가 되자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지난 주일에 건강한 교회는 세상이라는 밀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누룩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가치관과 같은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좋은 누룩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관심을 기울이자고 했습니다. 아주 작은 실천입니다. 그래서 주 중에 문자로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소금, 빛, 이리 가운데 양
오늘은 교회에 관하여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산상수훈(山上垂訓-산 위에서 베푸신 가르침, 마태복음 5장~7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6)고 교회의 정체성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필요한 곳은 어딥니까? 누가 소금을 필요로 합니까? 맛난 음식을 만들고자 국을 끓이는 사람에게 소금은 필수적입니다. 생선을 잡아 보관해야 하는 사람에게 소금은 필수적입니다. 소금은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맛을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라는 국물에 맛을 내는 사람이요, 세상이라는 김장이나 생선이 부패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역할을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을 보존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빛은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빛은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무언가 귀중한 것을 어둠 가운데서 찾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바르게 단장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빛이 없으면 길을 잃고,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을 바르게 단장(丹粧)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길을 찾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마태복음 10:16). 이 말씀에 따르면, 교회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리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이리는 지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지배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리의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희생하는 양의 역할을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양은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성경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아 누군가에게 주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양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 또는 건강한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며,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이리 가운데 사는 양의 모습이라도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홍익인간과 기독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은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고조선의 단군이 나라를 세운 건국이념인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자주 듣는 이야깁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기독교정신과 상통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교육이념을 가지고 배우는 학생들이 얼마나 이타적인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기심과 경쟁의식으로 훈련되는 것이 교육의 현실입니다. 도리어 인간을 해롭게 하는 ‘왕따문화’가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와 약자에 대한 횡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이념을 가졌다고 해서 그렇게 산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같은 주옥 같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소금이든 빛이든 십자가 정신이든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서로 그 말씀 앞에 진실되게 서고 마음을 나누며 소통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걸어나갑니다.
홍익인간의 정신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정신은 평등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은 “평등사회를 구현하자”라는 거창한 구호라기보다는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애정, 연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을 찾아 직접 그에게 다가가셔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무엇도 그 한 영혼과는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라고 개별적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윤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홍익인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려면 ‘종교는 무수히 많은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강남순 교수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종교’ 중에서)을 가지고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면 경제가 성장해서 국민소득이 높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회적 약자들보다는 누가 우리 사회에 일을 많이 해서 국가를 부강하게 할까를 생각하고 그들을 지원해 주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을’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적 소수에 대한 연민을 갖기보다는 경제원리나 성장지향주의를 지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세속적인 사상에 물들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목소리 높여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 동안 그렇게 목매어 외쳐 기도해 온 교회성장, 성전건축, 대형교회지향, 그리고 개교회주의의 원리들입니다. 세월호에서 숨진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에 관해 함께 아파할 줄 모르는 싸늘한 가슴이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죽어도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무 슬픔에 잠겨 있으면 국가경제가 흔들린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개인의 부주의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슬퍼하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은 우리가 비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며 불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누가복음 10:25~37)는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신앙이 좋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과 더불어 함께 울고 함께 웃어줄 수 없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이 그 피해자를 도와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교회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십자가의 정신이란?
우리는 어떻게 소금과 빛으로, 이리 가운데 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십자가 아래로 돌아갑시다. 거기서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말합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나쁜 짓입니다. 사람에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은 사람에게 한 나쁜 짓입니다. 하나님께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까? 죄는 사람에게 한 나쁜 짓이요,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이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거짓말 때문에 애인과 헤어지고 감옥에 갔다고 합시다. 감옥에서 나올 길은 군대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해서 참전했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애인도 전쟁 통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애초에 거짓말을 한 사람의 죄는 얼마나 큽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거짓말을 용서해 준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그 사람은 용서를 받았을지 몰라도 그 사람의 거짓말 때문에 깨지고 생을 일찍 마감한 커플의 애통함은 어떻게 합니까? (영화 ‘어톤먼트’ Atonement, 2007 중에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예수님이 지고 가신 죄는 무엇일까요? 그 죄를 지고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편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일까요? 다 덮어준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이 짊어지신 죄는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말합니다. 그 죄는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에서 드러납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 노릇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요,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고 내 생각과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인생에는 거짓, 다툼, 불화, 허무감, 중독, 전쟁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다시 인도하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을 화목제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렇게 사는 삶의 행복을 일깨워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준 진정한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뭐길래 하나님이 그렇게 희생하신단 말인가?”(이치훈 집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존 뉴튼- 전 노예무역상인)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한 영혼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합니다. 저의 이모님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그분은 고등학생이던 저를 2년 동안 돌봐주셨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울면서 기뻐해 주셨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리가 온전치 않을 때에도 폐지를 수거하면서 돈을 모아 교회 개척을 하는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교회에 둘 의자 몇 개라도 사라고 말입니다. 철없는 고등학생을 위해, 그리고 끝까지 희생하시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한 분 한 분이 떠오릅니다. 그분들은 모두 한 영혼을 위해 그렇게 진실되게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사랑, 정성, 정신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로 더 이상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습니다(마태복음 5:17).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갈라디아서 5:14)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이웃사랑이며, 그것이야말로 십자가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핵심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사회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책임성을 느끼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사람이 소금과 빛으로 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너는 나다!
오늘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보여주는 교횝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 말씀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며, 이리 가운데 사는 양과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까닭은 우리가 그런 존재로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웃에 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교회들에게 기억하라고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
우리는 온 인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웃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웃이란 내 곁에 사는 사람입니다. 나와 가까이 사는 사람입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의 이웃을 찾아 친구가 되는 삶이요, 그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며,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받은 사람 속에는 그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 안에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말이 더 상식이 됩니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너는 나다!”그렇게 우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