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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이년 오, 일오 결정
삼월 십이일을 기하여 국방군 수도사단과 팔사단의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그 임무는 본래대로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와 일부 국방군 예비대로 넘겨졌다.
국방군의 대공세는 꼬박 겨울 석 달동안이었다. 그 공세가 끝나자 모든 빨치산지역은 적막에 싸였다. 그들은 지역마다 그 동안의 피해와 투쟁 결과를 정리해나갔다. 피해는 더 말할 것 없이 엄청난 병력의 손실이었다. 그 결과는 조직의 재편성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리고 병력확보를 위한 초모사업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모사업의 필요성만큼 현실적인 난점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휴전협정이 시작외 이후로 보투의 협조가 날로 나빠져온 것이 현실이었다. 곡식의 지원이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인심에서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초모사업이 잘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모사업에 대해서는 이미 회의적인 결과가 나와 있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초모사업을 해본 바로는, 제대로 빨치산생활을 하는 사람은 열 명에 두세 명정도라는 결론이었다. 나머지는 사상적, 체력적으로 약해 이탈하거나 탈락되고 말았다. 체력이 약해 탈락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무장되지 않아 고의적으로 이탈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백해무익이었던 것이다. 학습을 아무리 시켜도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돌덩이에 불공드리는 격이었고, 고의적으로 이탈을 하자고 마음먹으면 막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싸우다보면 부대가 흩어지는 일이 숱하게 일어나는데 그때 비상선을 찾아오지 않고 얼마든지 도망을 칠 수 있었고, 보투를 나가 부대원들이 마을에 분산될 때 어둠 속에 몸을 감추기란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러게 해서 도망친 자들이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무슨 짓을 할 것인지는 너무나 뻔했던 것이다.
그런 문제점과는 구분해서 삼 개월 동안의 투쟁 결과가 점검되었다. 그 동안의 투쟁은 계절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한 투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결론에 입각해서 헌신적 투쟁력을 발휘해 혁혁한 투쟁성과를 올린 전사들을 찾아내게 되었다.
전남도당에서는 전사의 최고영예인 도단위 "영웅"이 두 사람 탄생하게 되었다. 그들은 백아산지구의 이태식과 조계산지구의 하대치였다. "다 대원덜이 헌 일이제 나가 헌 일이 머시가 있간디..." 하대치가 감격스러움을 감추며 소리 낮춰 한 말이었다. "죽은 동무덜헌테 면목웂는 일이구만, 싸게 해방이 돼야제." 대원들의 축하 속에서 이태식이 시무룩하게 한 말이었다.
투쟁영웅 - 그것은 실로 대단한 영예이면서, 거기에 걸맞는 우대도 뒤따르고 있었다. 그 개인 앞으로 조직의 여러 가지 신문들이 다 배달되었고, 모든 공식문건들이 따로 전달되었다. 그건 영웅을 하나의 단위 부대와 똑같은 비중으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민해방이 된 다음의 대우에 대해서도 미리 밝혀져 있었다. 당적 지위가 우선적으로 주어짐은 물론이고, 평생 동안 의, 식, 주를 당이 해결하고, 비행기를 제외한 모든 교통편도 일생에 걸쳐 무료였다.
논두렁이며 밭두렁에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오르고, 야산의 밑자락에도 초록빛이 감기며 진달래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있던 보리들도 어느새 한 뼘 길이로 자라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 보리들이 양식이 되자면 까마득한 세월이 남아 있었다. 진작 보릿고개가 시작되어 죽도 끓일 수가 없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를 넘긴다는 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고통이었고, 그런 속에서 앞으로 남아 있는 석 달남짓한 날들은 까마득하게 먼 세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영향은 어김없이 빨치산들에게도 미쳤다. 전과는 달라진 경찰토벌대의 세력에다가 계절적인 악조건까지 겹쳐 보투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조원제의 중대는 땅거미를 밟으며 산자락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밀기울에다가 보리싹을 섞어 찐 개떡을 한 덩이씩 아침으로 먹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무런 기약이 없었다. 보투에 대해서는 연대와 합류를 한 다음에나 생각할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저녁밥은 고스란히 굶게 되어 있었다. "얼려, 쩌그 마실이 있네!" 앞에서 걷고 있는 어느 대원의 반가움은 넘치는 소리였다. 그 들뜬 소리에 배고픔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워디여, 워디?" "잉, 따허니 우리 기둘리고 있었구마." "한바탕 더터묵을 만히여, 워쩌?" 뒤에서 걷고 있는 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투어 입을 열었다. "동무덜, 목소리가 너무덜 크요." 조원제는 나직하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겨울의 공세 때는 추위 속에서도 열흘 남짓씩을 굶으면서 싸워낸 대원들이 이제 하루 이틀 굶고서도 배고픔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메 시장시러거. 쩌것 털어서 무신 묵자것 나오겄다고?" "금메 마실이 쪼깐헌디다가 궁짜할라 끼뵈요이." "그려도 한 끼니 입다실 것이야, 웂겄소?" 대원들의 소리 낮춘 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보투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놓고 자기들 생각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조원제는 열 채가 못 되는 초가집들을 내려다보며 대원들의 그런 반응에 마음이 짐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짜인 보투계획은 없었고, 그렇다고 배가 고픈 대원들의 기대를 문화부중대장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묵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지도원 동지, 워째야 쓸랑게라?" 대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중대장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산자락 끝을 살짝 깔고앉은 초가집들은 해거름의 적요 속에 서로를 벗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네댓 집의 처마 밑으로는 푸르스름한 저녁연기가 퍼져흐르고 있었다.
고샅에는 아이들이 팔딱거리며 뛰어노는 콩알만한 모습들과, 그런 아이들 옆을 지나쳐가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풍경 속에서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느 아낙네의 긴 목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지없이 아늑하고 그윽한 저녁풍경이었다. 조원제는 그 눈에 익은 정취에 곧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정겨운 목소리가 길게 들리고 있었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작은 마을은 어머이의 품이었고, 두고 온 고향마을이었다. 어찌 내 심정만 이러랴. 보투할 게 있든 없든 일단 들러서 가게 하자. 사전에 계획이 없는 즉흥적인 보투는 원칙의 위반이지만 사기진작을 위해서는 원칙을 잠시 비켜설 수밖에 없다. "워쨌그나 부하덜언 한 술이라도 더 잘 믹이고, 잘 입혀야 써. 그래야 용기도 잘내고, 잘 따르는 법잉께. 명령이라고 억지로 믹혀들어지간디." 이태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대장이면서도 언제나 대원들과 한솥밥을 먹었고, 제일 늦게 숟가락을 들고 제일 먼저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부하들이 누구나 옷이 심하게 헐었으면 어디서나 옷을 벗기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는 아무렇게나 해서 영웅이 된 것이 아니었다.
"좋소, 정찰대럴 앞장세와 보투럴 허고 갑시다." 조원제는 중대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대는 마을에 적정이 없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 중대는 마을의 고샅으로 빨려들었다. 아이들이 쭈뼛거리다가 제각기 흩어져 자기네 집으로 달아났다. 그 대신에 이집, 저 집에서 어른들이 코 째진 고무신이나 짚신들을 끌며 황급히 사립 밖으로 나섰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았고, 네댓 명의 남자들은 모두들 나이가 들어 있었다.
"어여 오시씨요, 애덜 쓰시제라." "을매나덜 고상이시요. 어여 오시게라." 남녀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은 인사하기에 바빴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 뒤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에 찬 눈들을 굴리고 있었다. "안녕허시요. 춘궁에 살기덜 에롭제라?" 조원제는 그들에게 웃음을 보내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들이 내비치고 있는 친절스러움을 그대로 다 믿지 않았다. 그들은 토벌대에게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행동을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을 불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여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이 마음 저 깊은 밑바닥에 숨기고 있는 진심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 진심이 이쪽을 지지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것을조원제는 잊지 않고 있었다.
"동무, 담배 있소, 담배?" "봇씨요, 영감 동무, 담배부텀 내놓씨요." 한 남자에게 대원들 두셋씩이 달라붙어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대고 있었다. 담배 대신 나뭇잎들을 말아 피운 그들이 보투 때면 으레 벌이는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어허허허... 이 사람덜아, 아무리 담배럴 굶었어도 이 늙은이 나이 대접은 혀줘야 쓸 것 아니드라고? 담배 집안에 있응께 안으로 들더라고." 수염이 허연 노인이 주머니뒤짐을 당하며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며 조원제는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 노인의 헛웃음에 싸여나오고 있는 무척 유순한 것 같은 말에는 날카로운 꼬챙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날카로운 꼬챙이에 인민을 위해 투쟁한다는 빨치산의 심장이 꿰뚫리고 있었다. 조원제는 순간적으로 그걸 느끼며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빨치산의 명분이 아니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담배를 찾아내려고 노인의 조끼주머니를 뒤져대는 것은 차마 보기 민망한 일이었다. 조원제는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 마을에는 알곡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밀기울이나 수숫가루 같은 것에 봄나물들을 섞어 묽게 끓인 죽이 고작이었다. 그것이나마 하루 세 끼를 다 채우지 못하고 점심은 거르는 형편이라고 했다. 춘궁기에는 어느 마을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궁색한 살림살이였다.
그들은 죽 한 사발씩을 이 집, 저 집에 흩어져 얻어먹고 갈 길을 서둘렀다. 마을사람들은 습관인 것처럼 보자기에 싼 작은 덩어리들을 눈치 살펴가며 내놓았다. 그것들이 죽을 쒀먹을 수 있는 무슨 곡식가루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인민 여러분, 우러덜언 죽 한 사발씩얼 대접받은 것도 과만허니 생각허고, 고마운 맘으로 묵고 갑이다. 그것덜언 내놓지 말고 아그덜 믹여살리씨요. 우리덜이야 안직도 쌀까마니 쟁에놓고 배터지게 묵고 사는 부자눔덜 것 챙게 묵을 것이요. 그눔덜 쌀얼 뺏어다가, 요리 에롭게 사는 여러분덜헌테 골고로 노놔디리는 것이 우리가 헐 일인디, 밤낮으로 싸우니라고 그리 못허는 것을 이해허시씨요. 우리가 시방 목심 내걸고 싸우는 것은 누구나 차등 웂이 공평허니 사는 시상얼 맹글자는 것잉께, 여러분덜언 맘속으로 그날이 오기럴 기둘림스로 당장 살기가 에로와도 맘덜 강단지게 묵고 젼디도록 허씨요. 이만 우리덜언 뜨겄소." 조원제는 힘이 넘치는 소리로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파리하고 메마른 얼굴들이 사뭇 밝아져 있었다. 그의 짤막한 말은 아주 선전적이면서 선동적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동안에 정치지도원의 임무를 빈틈없이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을 벗어난 그들의 중대는 산으로 파고들며 발 빠른 행군을 시작하고 있었다. 조원제는 기계적으로 발을 옮겨놓으며 담배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그전부터 별로좋게 생각해온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일을 목격하고 보니 그냥 덮고 지나가 앞으로도 되풀이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인민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해방전사라는 체면과, 나이를 고하간에 덤벼들어 주머니를 뒤져대는 그 불한당 같은 짓이 너무나 상반되고 이율배반적이었던 것이다. 그까짓 담배가 뭔데! 그러나 조원제는 망설였다. 자신이 가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를 끊는 솔선을 보이면 얼마나 당당하랴.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입장에서 담배의 백해무익론을 펼치며 중대원 전체가 담배끊기를 제안했을 때 과연 설득력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가 염려였다. 설득이 되지 않고 문화부 중대장의 강압조치로 받아들여졌을 때 사기에 미칠 영향과, 그 후유증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불이익행위를 방관하고 묵인할 수는 없었다. 주머니뒤짐을 당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기분이 좋을 리 없었고, 그 불쾌한 기분은 곧장 "이래가지고도 인민을 위해 싸운다고" 하는불신감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사소한 담배하나 때문에 그런 결정적 비난을 당하게 되는걸 알면서도 언제까지 그런 행위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그건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직무유기이고, 근본적인 해당행위였다. 다른 부대들은 모르지만 자신의 중대에서만은 더 이상 그런 행위를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대장 동무, 긴급을 요허는 사항이 있소. 워디 담배 피울 만헌 디럴 골랐으먼 쓰것소." 조원제는 마침내 중대장에게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러제라." 중대장이 대답하며 어둠살이 퍼져내리고 있는 산줄기를 휘둘러보았다. 그들 중대는 앞이 산으로 막힌 골짜기로 파고들었다. 보초를 세우고 중대원들은 둘러앉았다. "담배덜 태우시요." 조원제가 말했다.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중대원들은 부지런히 담배들을 말기 시작했다. 조원제는 그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기를 기다렸다. 부싯돌 불빛들이 튕겨지기 시작하고, 담뱃불들이 빠알갛게 피어나며 담배냄새가 퍼져흘렀다.
"동무덜, 우리가 행군얼 중단허고 요리 모여앉은 것은 휴식얼 취허자는 것이 아니고 자기비판토론얼 통해서 우리헌테 중대헌 문제럴 결정허자는 것이요. 나가 지도원으로서 먼첨 비판얼 행헐 것잉께 동무덜언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혀서 허심탄회허게 반대토론에 나서주기를 바라겄소." 조원제는 말을 멈추고 대원들을 휘둘러보며 아랫배에 힘을 넣었다.
"나가 비판허고자 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대원덜이 보투에 나슬 때마동 마실에 들어갔다 허먼 담배럴 구허니라고 정신웂이 인민덜 괴비럴 뒤지는 행위에 대해서요. 오늘도 동무덜언 영축웂이 그 행위럴 혔소. 동무덜이야 오래 담배럴 굶었응께 그런다고 혀도, 괴비럴 사정웂이 털리는 사람덜 기분이 어쩔란지 동무덜언 한 분이라도 똑바라지게 생각혀본 일이 있소? 술언 어런 앞에서 묵어도 담배넌 어런 앞에서 못 피우게 되야 있소. 근디 동무덜언 되나케나 어런이고 노인네고 안개리고 괴비럴 뒤져댄다 그것이요. 나이 지긋헌 어런덜이 나이 시퍼런 젊은 것덜헌테 그 꼴얼 당험시로 기분덜이 워쩌겄소? 우리 빨치산덜이 멋허는 사람덜이요? 인민해방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전사라고 선전허고 있덜 않소. 그런디, 그 꼴얼 당험시로 어런덜이 속으로 머시라고 허겄소. 아나, 인민의 전사! 우아래도 몰르는 눔덜이 인민해방얼 혀! 가당찮다, 괴비나 뒤지는 불쌍것덜이! 요러크름 욕 안허는 사람덜이 워디 있겄소. 우리넌 양석도 아닌 그까진 담배 땀세 목심 내걸고 싸움시로도 욕얼 묵고 인심얼 잃어서야 되겄소. 고것은 우리만 욕얼 묵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얼 욕믹이는 것이고, 당얼 욕믹이는 행위는 곧 해당행위인 것이요. 그라고, 따지고보먼 빨치산투쟁에서 담배라는 것은 백해무익이요. 담뱃불로 위치가 발각되고, 담배냄새로 공격얼 당허고, 위험시런 일이 을매나 많으요. 담배넌 손해에 비허먼 이익은 하나또 웂는 심이요. 나가 이리 말허먼, 담배럴 피울지 몰릉께 그리 말허는 것이라고 헐란지도 몰르겄는디, 나가 딱 한 가지만 묻겄소. 밥언 굶으먼 틀림웂이 죽소. 담배럴 영 끊어뿔먼 죽소, 안 죽소? 답언 동무덜이 다 잘 알 것이요. 긍께로 당얼 위허고, 우리 투쟁얼 위허고, 인민얼 위혀서 우리 중대원덜언 오늘부텀 담배럴 끊기로 제안허는 바이요. 동무덜언 내 제안에 대해 지금부터 기탄웂이 반대토론얼 혀주기 바라겄소." 조원제는 자리에 앉았다.
좀더 진해진 어둠 속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목에 걸린 끄음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싸게 반대토론덜 허씨요. 반대의견이 웂으먼 나가 내놓은 제안이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것잉께." 조원제는 침묵이 곧 결정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래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조원제는 몸을 일으켰다.
"반대의견이 웂으먼 결정내리겄소. 마지막으로 묻겄소. 반대의견 있으먼 싸게 발언허씨요." 그래고 말을 하는 대원은 없었다. "좋소, 결정내리겄소. 위대한 당의 이름으로 우리 중대는 오늘 부로 전 대원덜이 담배럴 끊을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허는 바이요. 본 결정은 당에 보고될 것이며, 차후로 본 결정을 위반허는 대원은 당규에 따라 처벌될 것이요. 본 결정을 공박수로 접수허기 바라겄소." 조원제의 말을 따라 중대원들은 손바닥이 서로 엇갈린는 소리나지 않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동무덜, 모다 담배럴 끊는 기념으로 담배럴 마지막으로 한 대씩 피우는 것이 으쩌겄소. 그라고, 남은 담배허고 쌈지넌 이 자리에다 다 내뿔고 뜨도록 합씨다." 조원제의 이 제의에 대원들은 전부 반색을 했다. 그들 모두는 마지막 담배를 평소보다 두 배는 크게 말았음은 물론이었다. 조원제의 중대원 모두가 일시에 담배를 끊었다는 소문은 다음날로 다른 부대에서 부대로 퍼져나갔다. 그건 나이 어린 문화부중대장 조원제의 이름을 또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참말로, 아무도 못 당헐 일이여. 나가 영웅자리 넴게줘야 헐 판인디?" 이태식이 조원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지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나뭇가지마다 새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들녁이며 산들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햇발은 날로 두터워져갔다. 그 햇발 속에서 아지랑이의 아롱거리는 춤도 날마다 현란해지고 있었다. 아지랑이의 춤은 천지에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고, 무엇이든 아른아른 어지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짙은 초록빛이 유난스러워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을 삭아내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건 보리밭들이었다. 보리는 이제 패고 있었다.
진달래꽃들은 산줄기를 타고오르며 피어나고, 아지랑이는 신들린 혼춤인 양 어지러이 아롱거리고, 진초록 물감을 들어부은 듯한 보리밭들은 싱싱하게 넘실거리고, 보리밭에 깃을 친 종달새들은 아지랑이 그득한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간드러지는 목청을 뽑아늘이고 있었다. 사월은 그렇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사월은 그리도 시적 정서로 충만해 있었지만, 농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마저 끓일 것이 없어서 누르팅팅하게 부황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뼈마디 앙상한 삐쩍 마른 손에는 삐비가 한 웅큼씩 들려 있었고, 어쩌다 보이는 개들도 굶주릴 대로 굶주려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고샅을 비실비실 걸었다. 아직 양식으로 거둬들일 수 없는 보리를 바라본 채 끼니를 끓일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월은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온갖 새들이 우짖는 춘삼월 호시절이 아니라 배꼽이 등가죽에 달라붙는 굶어죽기 직전의 달이었다.
그런 영향이 산에 있는 빨치산들에게도 그대로 미쳤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빨치산들도 어려운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그들이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군토벌대에 비해 경찰토벌대의 공세가 산발적이고 미온적인 때문이었다. 그들도 부황이 들어가며 사월의 투쟁을 넘기고 있었다.
오월로 접어들면서 산마다 신록의 갖가지 초록색깔이 풋풋하게 돋아올랐다. 그 싱그러운 초록빛들 속에서 야산이 아닌 백운산이며 조계산이며 백아산 같은 데도 진달래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끝물로 피어난 진달래꽃들과 함께 소쩍새의 목쉰 울음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키큰 나무들의 그늘 아래서 작은 산꽃들도 다투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조계산지구에서는 뜻하지 않은 경사가 벌어지게 되어 모든 대원들이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지구정치위원 안창민과 여맹위원장 이지숙의 결혼이 그것이었다. 동지들간의 이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시켜온 상태에서 그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의 사실이었고, 다구나 당에서 결혼식을 올려준다는 것에 대원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도당위원장 박영발은 그 동안의 방침을 바꾼 것이었다. 당성이 투철하고, 투쟁경력이 뛰어난 전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경우 당이 그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함과 동시에 혁명부부로서의 결속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부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첫날밤을 보낸 다음 부부는 해방의 그날까지 부대 소속을 달리해야 하는 제한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 제한조건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든 대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조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뜻밖의 조처는 모든 대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애인을 가진 대원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원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체 대원들이 그 조처를 환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조처를 당의 관대함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새로운 자유를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흥겨운 구경거리를 산중에서도 갖게 되었다는 즐거움이었다.
외서댁은 산꽃들을 정성스럽게 따 모으고 있었다. 그러면서 천점바구와 김혜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기랄, 죽드라도 쪼깐 더 있다가 죽제. 오런 존 법이 생겼구마. 김혜자가 살었드라먼 요 법얼 을매나 좋아라 혔으까이. 머리꼭지가 하늘에 닿게 뛰고 또 뛰었을 것잉마.
그리도 속맘 보타감서 천점바구 각시 되기럴 바랬는디. 그 원 풀고 갔음사 을매나 좋았을랑고. 여학교꺼정 댕긴 김혜자가 무학인 천점바구럴 그리 좋아헌 것도 다 팔자여. 음마, 이리 말허먼 안되겄제? 학벌로 사람 가치 저울질허는 것이야 반동덜 시상에서나 써묵는 법이제.
나 대그빡도 안직 반동시상에서 찐 땟국물이 다 빠지덜 않은 것이여. 김혜자가 천점바구럴 서방삼기로 허고 좋아헌 거이야 사람이 사람얼 좋아헌 것이제. 니나 나나 차등 웂이 다 동무로 사는 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기맥힌 일이제. 백정 아덜허고 족보 내세우는 집안 딸허고... 참말로 기맥힌 일이여. 김혜자가 그 총알 퍼붓는 너덜겅 위를 천점바구 들쳐미고 뛴 것얼 생각허먼... 여자 맘이란 것이 그리 기맥힌 것이여.
항꾼에 죽자 헌 맘이었겄제. 죽음스로 기연시 서로 손잡고 죽었이니 김혜자가 원풀이럴 헌것이제. 그려도 맺힌 맘이야 따로 또 지니고 갔을 것인디. 넘덜 앞에서 당당허니 혼례식얼못 올렸응께로, 사람 정이란 것이 눈으로만 왔다갔다허는 것이 달브고, 손잡음서 가심 찌릿거리는 것이 달브고, 잠자리서 살 섞는 것이 달븐 법인디. 그리 치자먼 김혜자 맘에 풀린 원보담 안 풀린 원이 더 많겄제. 그려도 워쩔 것이여. 항꾼에 묻힌 것으로 다해 삼아야제. 근디! 외서댁은 증오심이 파르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개잡눔에 새끼덜, 무신 철천지 웬수가 졌다고 그 소나물럴 짤라뿌렀을 것이여. 징헌 눔덜, 송장꺼정 안 파내기 다행이제. 그 사삭시런 눔덜이 송장 파내먼 즈그눔덜이 해꼬지 당헐랑가 무서바 손 안 댄 것이겄제.
외서댁은 얼마 전에 중대원들을 이끌고 천점바구가 묻혀 있는 근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이 쓰여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점바구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비목을 겸한 표적물인 소나무가 간 곳이 없었다. 그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소나무는 밑동이 도끼로 찍히고 톱질을 당해 잘려 있었다. 그것이 토벌대의 소행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외서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대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대치에게는 그 말을 전하지 않았다. 괜히 속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대치도 알고 있으면서 그 말을 꺼내지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서댁은 산꽃들을 한 아름 따가지고 허리를 폈다. 그만하면 풍성한 꽃다발이 될 만했다. 신부 이지숙이가 들 꽃다발이었다. 외서댁은 여러가지 산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고운 야생화들과 겹쳐 자신의 혼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사모관대 차림의 입 꾹 다문 남편의 얼굴이 크게 다가들었다. 정이 다 크기도 전에 떠나버린 남편이었다. 아이를 셋은 낳아야 여자의 가슴에 남정네의 정이 제대로 차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겨우 아이 하나를 낳고, 그 다음의 세월은 남편의 산생활로 혼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별이었다. 정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고, 그리움보다는 죄스러움이 앞을 막아서는 짧고 아쉬운 결혼생활이었다.
외서댁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편만 생각하면 눈물이 금세 솟고는 했다. 씻어질 길이 없는 죄스러움 탓이었다. 자신만 아니었더라도 지금까지 어엿하게 살아 있을 남편이라는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창민과 이지숙의 결혼식은 널찍한 평지가 있는 골짜기에서 올려졌다. 지구의 대원들 이백여 명이 모였고, 총사에서 사령관 김선우와 부사령 염상진이 참석했다. 안창민과 이지숙은 진달래꽃에 에워싸여 나란히 서 있었다. 대원들이 진달래꽃을 수없이 꺾어다가 꽃밭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안창민은 평소의 차림 그대로였고, 이지숙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쳤고, 얼굴에는 분가루가 살폿 발라져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는 딴판으로 여자다운 모습이면서, 무적이나 고와보였다.
"저리 채리고 섰응께 여맹위원장 동지가 영판 이뻐뿌요이." "금메 말이요. 빨치산 냄새가 한나또 안 나요." "시방 맴이 워쩔께라?" "아, 날라갈 것맨치로 좋제 워째라. 좋아허는 사람헌테 시집얼 가는 것인디." "양가 가죽이 하나또 웂는디, 좋기만 허겄소?" "음마, 쩌 두 동지가 그냥 예삿사람입디여? 부모고 성제간이고 다 두고 입산헐 빨치산이란 것 잊어뿔고 고런 소리 허요?" 여자대원의 말이었다.
"대원 여러분,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안창민 동지와 이지숙 동지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치위원의 말을 따라 대원들이 조용해졌다. "총사 사령관 동지께서 주례를 맡아주시겠습니다." 염상진과 나란히 돌을 깔고 앉아 있던 김선우가 천천히 두 사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삼십 중반의 나이였고,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다. 그러나 눈매가 매섭고, 냉정한 인상이었다.
"당이 결정한 규정에 따라 안창민 동지와 이지숙 동지는 서로의 의사를 합쳐 결혼할 것을 원하는바, 이 결혼식을 통하여 두 동지는 부부가 됨을 당과 전사 여러분들이 확인하고 보증하는 바이올씨다." 김선우의 짤막한 결혼성립 선언이었다. "다음은 총사 부사령 동지께서 축사를 해주시겠습니다." 염상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숙인 듯하고 걸음을 옮겨 두 사람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에, 안창민 동지와 이지숙 동지가 새로 결정된 당의 규정에 따라 첫 번째 부부로 탄생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제가 그 축사를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두 동지에 대해서는 제가 비교적 잘 아는 편입니다. 두 동지와 함께 군당에서 구빨치투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두 동지의 투쟁경력을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동지의 뜨거운 혁명적 열정이 바로 사랑의 열정이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두 동지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투쟁하는 전사로 서로 만났고, 함께 투쟁을 해나가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투쟁이 계속되는 속에서 부부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부부전사로서 더욱 힘차게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동지는 투쟁하는 부부로서 모든 전사들의 시범이고 모범인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두 동지를 존경하며, 오늘의 이 결혼을 끝없이 축하드립니다. 대원 여러분들도 두 동지의 결합을 아낌없이 축하해주시기 바라며, 우 동지께서는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 이 가식없고 조촐한 결혼식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 앞으로 더욱 투쟁에 배진해 줄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두서없는 축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여보인 염상진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 마지막 순서로, 신랑 안창민 동지와 신부 이지숙 동지가 돌아서서 대원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앞에 선 대원들께서는 여기 있는 진달래꽃을 뿌려 축하해 주시고, 뒤에 있는 대원들께서는 박수로써 열렬한 축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신부 뒤로 돌아서 주십시오." 안창민과 이지숙이 돌아섰다.
"와아아-" "우우-" 기쁨의 소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대원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 선 대원들이 서로 다투어 진달래 꽃가지들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안창민과 이지숙을 둘러싸고 가지들을 흔들어대거나 꽃을 따서 던졌다. 두 사람은 곧 나부끼고 흩날리는 진달래 꽃보라에 파묻혔고, 힘찬 박수소리들이 골짜기를 울려대고 있었다. 외서댁은 대원들 속에 섞여 부지런히 꽃을 따 던지면서, 이, 복 받고 사씨요. 오래오래 항꾼에 복 받고 사씨요.
이런 말을 수없이 뇌며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김선우와 염상진도 똑바로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김선우는 아까와는 달리 환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그는 소문대로라면 이미 석 달전에 광양 백운산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가지가지였다. 그는 미모의 여비서와 함께 죽었는데, 그 여자가 임신중이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포위를 당하자 혼자 도망치다가 온몸에 총을 맞고 죽었다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비트에서 죽었는데, 그곳에 그가 읽은 책이 많아 그것에 감동한 국군 장교가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고도 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헛소문 속에서 그는 건재하고 있었다. 경기도 인천 출신인 그는 일찍이 중앙당을 통해 전남도당에 보내진 인물로, 박영발 직전에 잠시 동안 도당위원장을 맡았었고, 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들이 전남지역을 장악하게 되자 도당 전역에 내붙인 공고문을 이미 죽고 없는 최현 위원장의 이름으로 낼 정도로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불행하게 최후를 마친 최현 위원장에 대한 예우를 겸해 신화적으로 널리 알려진 최현의 이름을 통해 인민들의 호응을 넓게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철저한 원칙론자이면서, 머리가 비상했고, 사람을 휘어잡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중앙당을 통해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남다른 특출함이 없었다면 그 어느 도보다도 좌익의 뿌리가 깊고, 한다 한 인물들이 수두룩한 전라남도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해 나가면서 도당위원장까지 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공의 시작과 함께 당간부들이 개편되면서 그는 모든 면에서 선배인 박영발에게 위원장 자리를 내주고 부위원장으로 물러나앉았다.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도당들이 입산하면서 도당의 모든 조직은 군사투쟁조직으로바뀌었다. 도당위원장들은 유격대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전남도당만 유일하게 도당위원장과 유격대사령관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꼭 박영발이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박영발은 김선우라는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조직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추측도 나돌았다. 원칙론자인 김선우는 빨치산 규율 중에서도 특히 이성관계를 엄하게 다스려 총살을 불사하는 인물로서, 자기의 여비서에게 임신을 시킬 사람이 아니였고, 도당위원장이나 사령관은 언제나 이삼십 명의 무장보위대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혼자 도망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전투상황 속에서 적들이 밀어닥칠 때까지 사령관이 비트에 앉아 있다는 것은 빨치산의 기초상식에도 어긋나는 허황한 애기였다.
안창민과 이지숙은 광목천막 안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다. 대원들이 멀찍멀찍 떨어져 두 사람의 첫날밤을 지켜주고 있었다. "결혼이 실감나시나요?" 이지숙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물었다. "잘 모르겠소. 이 동무는?" 안창민의 목소리는 어느 때 없이 어눌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 너무나 좋아요. 날마다 결혼하고 싶었으니까요." 부끄러움을 어둠에 감춘 이지숙은 이렇게 속삭였다.
"아무 보잘것도 없는 나를..." "그런 말 하면 싫어요. 그럼 저는 뭐 보잘게 있나요?" "글쎄... 막상 결혼식을 치르고나니 내가 가진 남자로서의 자격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런 마음이 들게 되었소." "한 가지 결정하고 싶은 게 있어요. 공적으로야 물론 "동무"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건 아무 염려할 게 없소. 우린 오늘밤으로 "동무"라는 호칭을 마지막으로 쓴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소? 앞으로는 어쨌거나 "여보, 당신"을 써야 하는 것 아니겠소?" "아... 그걸 깜빡 잊고 있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쩍새의 쉰 울음소리가 서러움으로 덩이져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언제 떠나야 하나요?" "내일 바로요." 또 두 사람의 말은 중단되었다. 산중의 밤 정적이 그들의 숨소리까지 가려내고 있었다. "성공할까요?" "그거야...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 아니겠소." "여길 뜨는 것도 비밀이겠지요?" "아마 탈주로 역선전되기가 쉬울 거요." "예, 그게 비밀에 부치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겠군요. 그리고 말예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일단 조사를 받고 풀려나면 결혼식을 다시 올리는 거예요. 그럼 위장이 정말 완전해지잖아요." "아, 그럴 수 있겠소. 그거 좋은 방법이오." 안창민과 이지숙은 다음날 부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산 속의 열 명 당원보다는 인민 속의 한 명의 당원이 낫다." 이것은 전남도당이 내린 "오이년 오, 일오 결정"이었다.
그것은 물론 전남도당의 단독결정이 아니었다. 유격대 중심의 투쟁을 장기적인 당사업 중심으로 바꾸는 그 중요한 전술전환을 일개 도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