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1890~1957 중추원 참의/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1890년 4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주다. 아명은 창흥 호는 육당이다. 육당학인/한샘/남악주인/곡교인/축한생/대몽/백운향도 등의 필명을 썼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부립다이이치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2월에 그만두었다. 1906년 3월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에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1906년 7월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학보』편찬원을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06년 겨울에 귀국해 1907년 5월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했다. 1908년 2월 대한학회평의원을 지냈다. 1908년 11월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1910년 3월 아창호가 설립한 청년학우회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를 설립해 조선 고서를 발간하는 한편 조선어사전편찬계획을 세웠다.
합병 후에도, 잡지 창간을 계속해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1914년 『청춘』 등을 발행했다. 1919년 3.1운동의 주역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이로 인해 2년 8개월간 복역한 뒤 1921년 10월에 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를 창립했다. 같은 해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1922년 『동명』에 「」를 연재했다. 1923년 7월 일간지 『시대일보』발간을 인가받고 1924년 3월 31일에 창간해 사장겸 주간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구락부활동에 참여했다.
1926년 옛 백제영토방문기 『심춘순례』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다. 1927년에는 『백두산 근참기』를 출간하고 「문화론」을 발표했으며, 1928년에는 『금강예찬』을 출간했다. 1927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및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하는 기구로 확대 개편한 뒤 『조선사』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한 기구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은 “조선 역사에 학식과 경험이 있는 의 인재”를 조선총독이 선정하고 일본내각에서 임명했으며 『조선사』의 내용에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다. 1929년 5월 잡지 『』를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위원, 1935년 2월 조선총독부 임시역사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35년 무렵부터 한국과 일본의 ‘문화동원론’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의 보급에 관여했다. 1935년 4월 조선신궁관계자들이 참여해 조선에서 “고신도의 큰 뜻을 드높이고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선미소기회의 고문에 위촉되었다, 1936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건설위원회위원을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매인신보사 주최의 ‘북지사변 비상시국좌담회’와 경성일보사 주최의 ‘시국과 조선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경성방송국의 시국강연에서 “시국의 인식을 철저히 할 것은 물론이며 총후봉공에 극진노력하여 출동군인의 가족 부조보호에 유감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론을 절대 지지하여 대세에 순응하는 동시에 국제스파이와 유언비어에 미혹하지 말고 비상시국에 철저하여 분진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1938년 3월 『만몽일보』 10월 『만선일보』 편집고문을 맡아 1941년 12월까지 재직했다.
1938년 4월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문화를 강의했다. 만주국 신경에 설립된 만주건국대학은 ‘’를 실현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건국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만주건국대학연구원의 민족연구반과 역사연구반에 소속되었다. 이 연구원은 ‘동방문화융성’과 ‘국가정신진흥’을 목적으로 했다. 1940년 8월 재만조선인 교육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그 해 10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관동군의 토벌작전과 선무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고문직을 맡았다. 1941년 8월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쳔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그것의 대책 결의, 근로보국의 실행’등을 목적으로 하는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3년 11월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학도병일본권설대로 활동했다. 같은 달 14일과 20일 일본 메이지대학 강당에 서 열린 ‘반도출신 출정학도 궐기대회’에서 “미영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성심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라며 학병지원 권유연설을 했다. 1944년 9월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전쟁수행에 필요한 노무동원을 위해 국민동원총진회가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조직되자 참여로 활동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만주침략과 마주국 건국을 지지하는 여러 편의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1937년 11월호 「재만조선인통신」에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라는 글을 기고해 조선인이 일제의 만주침략을 지지할 것을 주장했으며, 『삼천리』 1938년 10월호의 「건국대학과 조선청년」에서는 건국대학을 선전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일신을 바칠 큰 뜻이 있고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곤고결핍이나 어떠한 근로라도 사양하지 않을 결심이 있으며…¨오인은 오국을 구성하는 각 민족 중에 이러한 청년이 많기를 바라고 기도”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만주국 건국 12주년을 맞이해 『방송지우』 1944년 4월호에 기고한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에서는 “만주국의 건설은 결코 만주 한 지방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세계의 질서를 바꾸려 하는 일”이며 “동방의 맹주요 신세계의 지도자인 일본제국의 용기와 총명과 정의가 마침내 오늘날의 만주국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곧 만주침략은 ‘도의’를 위한 것이며, 만주국 건설을 일제에 의한 ‘낙토건설’이라고 선전했다.
또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중국침략과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고 조선인의 전쟁참여와 학병지원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1937년 8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내일의 신광명 약속」에서 “일본의 존재와 발흥은 아시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라 찬양하고 중일전쟁을 “일본을 맹주로 하여 일대 대동단결을 만들어서 백색인종에 대하여 우리 동방의 역사와 생활과 영광을 확보할 좋은 기회”라 규정하면서, “동아 안정의 책임자, 동양평화의 수호자인 일본제국의 대방점은 단정코 이것에 있을 뿐임을 단언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북지사변을 도의적으로 인식하여 중심으로부터 국민으로의 당연한 책무를” 다할 것을 주장했다.
1943년 11월 5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보람있게 죽자」를 기고해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중에 대운임이 다시 의심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 마는 최고 명령을 받고 있다”면서 “원광법사의 임전무퇴 까를 진두의 청년학도에게 선물하고싶다”면서 학병지원을 독려했다. 같은 해 11월 20일자 『매일신보』의 「나가자 청년학도야」에서는 ‘대동아전쟁’의 “세기적 성업에 이바지하게 됨은 실로 남자로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감격”이라면서 “청년학도들은 두 어깨에 짊어진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요맹한 출전”을 해서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바로 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에 분발 용약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전”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1945년 1월호 「방송지우」의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에서 “대동아 전쟁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치는 싸움”이라 정의하고 “조선동포도 대동아민중으로서 세기의 거룩한 사업에 참가하여 일본국민으로서 그 추진력의 일부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곧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나와 5월에 공판을 받았다. 수감 중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를 제출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기고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