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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간의 해외연수기 (그리스 아테네) 6
1월 7일 화요일, 그리이스 아테네에서
새벽 시간을 이용해 그리이스 아테네 신공항에 도착하니 아침 7시가 가까웠다. 신공항은 2001년 3월에 완공도이었는데 본 이름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 세계 제1차 대전때의 그리이스 수장이름을 따라 붙인 이름인데, 독일인이 설계했다고 한다.
현지 안내인인 김경자씨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11년전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아서 그런지 우리가 만난 안내인들 가운데 가장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목소리까지 허스키해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민주주의의 산실‘ 아테네는 정치학도인 나에게는 늘 궁금한 곳이었다. 게다가 지난 6.13지방선거 유세 때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운운하며 ‘민주주의의 초석‘으로서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운운했던 나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곳은 근대 올림픽의 개최지이고 더 앞서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차를 타고 아테네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매우 혼잡했고 양편으로 보이는 거리는 우리나라의 변두리 같은 느낌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리이스는 유럽국가 가운데 가난한 나라의 하나라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유럽인들이 그리이스를 혹평하기를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빈 껍데기 뿐인 유럽의 고아다”라고 한다.
이를 받아치는 그리이스인들, 스스로가 유럽 문명의 알파(α)요 오메가(Ω)이자 인본주의적인 그리스로마신화를 탄생시키고 스스로를 태양신의 후예라는 데서 헬라인들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 왈, “그래 우리는 너희들의 어머니이다. 늙어서 어려운데 자식들인 너희가 좀 돌봐주면 안되냐?”
사람에게는 생로병사가 있듯이 문명의 흥망성쇠를 꼬집은 말이기도 하다. 그리이스를 보통 헬라스라고도 하는데 카이로에 이미 헬리오폴리스라는 지역이 있다. 이집트 문명의 유럽 유입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아테네는 평양과 위도가 같은데다 분위기가 왠지 우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카이로에서 보았던 큰 규모의 건물들보다 작아서인지 더욱 그랬다.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먼저 이집트를 들렀다가 아테네로 오는 사람들은 다소 시시하다고 한다.
그토록 유명하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파르테논 신전의 규모가 별거 아닌데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과는 비교도 안되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그렇다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곳을 깍아내릴 수는 없는 일.
”이집트문명은 단 한 사람, 파라오을 위한 것이지만 아테네 문명은 모든 시민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기에 고대 이집트문명은 단절이 되었지만, 아테네 문명은 지금까지 살아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외형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한방 먹이는 말이다.
2004년 아테네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는데 통신시설도 미비하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숙박시설도 부족해 조직위원회에서 걱정이 많다고 하는데 정작 그리이스 당국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박국가인데 폐선을 이용해 숙박시설을 만들면 분위기 좋고 숙박시설 지을 땅 걱정 안해도 된다는 것이다.
4백년 동안 터어키의 지배를 받고도 언어와 혈통이 거의 바뀌지 않은(우리나라 사람들이 몽고와 일본의 지배를 받고도 한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해왔듯이) 자부심 강한 그리이스인들의 당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향했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인상적이었다. 땅 속에 거꾸로 처박인 듯한 가지친 뽕나무와 황금색 열매가 탐스럽게 달린 오렌지 나무가 신화를 연상시켰다. 차에서 내려 상쾌한 아침 찬바람 속에 그 옛날 아테네 시민들이 오르내렸을 올리브 나무 사이길을 따라 언덕에 올랐다.
지금은 폐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지지만 상상 속에 부숴진 곳들을 바로 세우고 건물에 색을 칠하면서 번영했을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거기에는 파르테논 신전과 오늘날의 아테네를 있게 한 아테나 신전(여신은 그리이스인들에게 올리브 나무를 선사하고 평화와 번영으로 이 도시의 수호신이 되었다. 참고로 그리이스 로마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이스 로마신화를 알아야 한다는 점도 덧붙여둔다.)이 있었고, 얼마전 캬라얀 등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발레단, 성악가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며 대규모 예술 공연을 가졌던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극장)이 발 아래 쪽에, 부숴졌지만 여전히 거대한 규모로 서 있었다.
언덕 위 하늘에는 아래 위층의 구름이 서로 교차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동쪽으로는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햇살의 신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람 피우는 제우스를 추적하는 헤라의 변신인가?
동방에서 온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그리이스신들의 조화인가? 우리의 안내인도 정말 신비로운 광경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파르테논 신전 동쪽 옆으로는 이곳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인도문명이 유입되어 발전되어 나간 경로를 읽어볼 수 있는 꼬레조각상(보살상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 입술과 머리, 옷차림을 한 여신상)들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많은 유물 역시 대영박물관에 있는데 ‘관리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좀처럼 돌려받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아테네시와 인접한 지중해는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지정학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읽게 해 주었다.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산(이름을 까먹었다)은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는데 지중해변 산들의 유명한 대리석산의 모습이었다.
부연하자면 이번 연수는 대리석 문화와 우리의 화강암, 목조 문화를 비교하는 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각양 각색의 대리석으로 다듬어진 모자이크 바닥조각으로부터 시작해, 인물상, 건축 등 모든 것에 망라된 대리석 예술을 접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와 일정에 없던 북쪽의 아고라 광장으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1931년의 발굴로 기원전 6세기에 아테네의 중심이 되었던 시장과 파르테논 신전으로 향하는 도로와 상하수도 시설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다.
마차 자국이 난 도로와 옆으로 수도 시설한 유적의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그 옛날의 모습이 다시 살아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언덕 어딘가로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있어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유적지의 풀밭에는 네 개의 빨간 꽃 잎속에 그리이스 정교의 십자가 무늬를 담고 있는 양귀비 꽃들과 향기가 좋아 차로 마신다는 카모밀의 하얀 꽃(카모밀을 뜯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서 산 책 사이에 끼워 왔는데 책을 펼치면 아직도 향내가 코 끝에 맴돈다)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채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그 앞으로는 돔형 지붕위에 십자가가 있는 비잔틴교회가 있는데 터키 점령기때 지어진 고졸한 느낌의 ‘성 아포스텔레스‘란 교회였다. 고대 아테네 도시에 남아있는 중세풍의 건물이 옛스러움을 더욱 가미시켰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스토아 학파들이 토론을 즐겼던 열주들이 이어진 아고라 학당이 나타난다. ‘일없이 빈둥거리며 쓸데없는 얘기들이나 일삼던‘ 철학자들의 모임처이기도 했다. 비오는 날 모임 장소로 적격인 곳인데 군데군데 둘러서 토론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아마도 서쪽의 정치의 언덕(프닉스)이나 서북쪽에 있던 재판소인 아레오파구스로 가기 전에 이곳에서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아고라 학당의 건물 안쪽 방들은 바로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방으로 쓰고 있다. 이곳에는 바로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의 한 방식이었던 ‘도편(陶片)‘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당시의 민주정치가 우민정치(愚民政治) 내지는 금권정치로 흐를 수 있다는 충분한 심증을 갖게도 해주었다.
한때 아테네의 관문이었던 아고라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올려다보며 다시 돌아나왔다. 공원에는 집없는 개들이 참 많았다. 여름 휴가철에 버리고 간 개들이라는데 그렇게 순할 수가 없었다. 동물보호협회에서 늘 먹이를 갖다 놓아서 그런지 몰라도 개들이 덩치도 큰 데다가 영양 상태가 매우 좋았다.
동방의 이방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잘 쫓아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중 한 마리는 한 동료의원이 잘 쓰다듬어 주어서인지 버스있는 데까지 배웅해주었다.
현지식인 스파게티로 점심식사를 한 뒤 공식방문 일정에 따라 국립노인요양원을 방문했다. 말이 국립이지 모든 운영비는 기부금으로 운영된다는 곳이다. 요양원 사무실 건물 벽에는 이들 기부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고 건물명칭은 그 건물을 희사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우리의 기업가들이나 부자가 배워야 할 바가 바로 이 기부문화라고 본다. 그럼에도 이곳을 국립이라고 붙인 이유는 1864년 국가정책에 의해 당시 왕비의 주도로 세워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단히 넓은 부지에 요양시설만 8개에 70세 이상의 노인 4백여명을 수용하고 있다.
혈혈단신의 아무 능력이 없는 노인들이 우선 입소 대상이고 이들은 전액 무료로 죽을 때까지 모든 도움을 다 받는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며 유료로 시설을 쓰는 노인 요양 시설과 무료로 시설을 쓰는 요양 시설 두 곳을 둘러보았는데 별 차이가 없었다.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2백여명이며 이중 의사와 간호사가 150명이나 된다니 ‘복지 유럽‘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외에도 15개 이상의 자원봉사단체가 관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해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숲이 잘 조성된 공원 속에 위치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산책하거나 휠체어로 다니는 모습이 한가로운 평화, 그대로였다.
이밖에도 교회 등에서 운영하는 양로원 시설도 많은데 이렇게 한적한 곳보다는 사람이 많은 시장 쪽에 시설을 두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북적대고 사람소리가 많이 나고 그러다보면 자연 사람들의 발길이 더 많아져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언제쯤 저런 복지시설들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을 안고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전에 미처 다 돌지 못한 아크로폴리스 광장 남서쪽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감옥과 정치의 언덕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야산에 자연그대로의 돌에 조금씩 인공이 가해진 계단의 모습만 남아있는 곳이었다. 옛날 이곳에 올라 군중들을 상대로 연설했을 정치가들을 생각하며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햇볕을 잘 받는 풀밭에는 아네모네가 노랑과 분홍색을 뽐내며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유럽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비슷한데 우리처럼 그렇게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가게가 없다는 점이다. 이곳 그리이스의 경우 월 수 토는 오전 8시 30분부터 약 2시까지, 화 수 금은 오후 1시까지 영업을 하고 쉬었다가 다시 저녁 5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모습이다.
근대올림픽광장으로 향하면서 국회의사당(의사당 앞에 죽어 누워있는 군인의 모습을 부조해 놓은 곳은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역시 민주주의의 산실다운 나라의 국회상이다.)과 트로이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 저택, 학술원과 예술원, 아테네국립대학본부와 도서관이 있어 아카데미라 불리는 곳도 지나갔다.
오모니아라는 방사선 형태의 거리에는 그리이스 최고의 사회문제인 난민들이 모여드는 곳인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90%는 모두가 난민이라는데, 그래서인지 가장 서민적이고 가장 사람이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우리가 도착한 올림픽광장은 겉보기와는 직접 내딛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광장 입구에는 한 병사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이겨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달렸던 40km의 표지가 바닥에 표시되어 있었다. 경기장 내의 앞쪽 벽에는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들의 이름과 올림픽조직위원장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서울이란 글자도 보였다.
군중들이 앉았던 자리는 놀랍게도 모두가 하얀 대리석이었다. 하기야 돌이라고는 대리석 밖에 없는 나라니까. 운동장 아래에서 보는 것과 경기장 관중석 맨 위로 올라가 보는 모습은 정말 달랐다. 아래에서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던 곳이 관중석 맨 위로 올라가보니 거대한 규모였다. 왕과 왕비를 위한 로얄석은 별도로 대리석 의자로 잘 조각했다.
경기장안에는 재미있는 조각상이 있었다. 야누스처럼 앞 뒤에 두 얼굴을 두고 한쪽은 젊은이의 얼굴을 반대쪽은 늙은이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문제는 그 아래쪽이었다. 젊은이 편에는 축 쪼그라져 늘어진 남성의 성기를, 노인 아래 부분은 한창 발기된 남성의 성기를 조각해 두고 있었다.
젊더라도 운동을 안하면 건강할 수 없고, 늙더라도 운동을 열심히 하면 이처럼 싱싱한 남성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라나? 허~참!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전 그리이스의 명물이라는 카메오 보석 등을 파는 상점을 들렀다. 문화적 의식 차이인지 카메오의 조각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다. 내 동생이 여행업을 하기 때문에 몇 년전에 카메오 브로우치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한번도 달아본 적이 없다.
도대체가 우리가 서양인의 옆얼굴이 새겨진 것을 왜 달아야 하는지 또 그것이 특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하회탈의 목걸이가 훨씬 정감이 가고 걸고 싶을 뿐이다. (설마 이런 기준으로 저를 국수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겨울 하루해의 짧은 일정으로 아테네를 맛보았다. 디바니 팰리스 아크로폴리스 호텔로 돌아가 여장을 풀었다. 일행들이 모여 간단한 회의를 하였다.
내일 새벽이면 터어키를 향해 다시 여장을 꾸려야 한다. 과연 그리이스를 얼마나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알게 되었을까? 박물관에서 산 책과 서울에서 가져간 그리이스 로마신화를 읽다가 노트북을 펼쳐놓고 출발할 때의 간단한 단상들을 메모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