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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의 역사 2 -
정병규, 2013.12.04 동네책방 개똥이네 책놀이터
우리에게 그림책은 무엇인가?
지난 9월 한 지상파 텔레비젼 방송 9시 뉴스에서는 한 권의 그림책을 소개하는 꼭지가 방영된 바 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뒷 날 다른 방송사에서도 같은 내용의 앵커 멘트가 나왔다.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 전 세계 40만 부가 팔린 국내 창작 그림책, '구름빵'이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뒤이어 화면이 바뀌면서 기자는 이 그림책의 몇 장면을 이야기와 함께 보여준다.
2004년 신진작가로 이 그림책을 선보인 뒤 2005년 볼로냐 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뽑히기도 했다는 수상 이력도 덧붙여 전한다. 그런데 이 뉴스가 전하려는 의도는 오히려 이 그림책의 변신에 있었다. 원작을 콘텐츠로 한 다양한 분야의 진출, 그중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큰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뉴스거리가 된 것이다. 인쇄 매체와 다르지만 비슷한 복제예술 장르인 영화는 심심찮게 관객 수 백만을 동원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수많은 개봉영화중에 간혹 한 두 편이 그러함에도 흥행에 성공한 일부만이 관심을 받는다. 그렇더라도 영화는 많은 대중을 확보하고 있다. 이례적이라는 말은, 그림책에 있어서 아직까지 <구름빵>처럼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확장이 이뤄진 경우 외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영화와 다른 점은 폭이 넓지 않은 독자 대상에 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어쩔 수 없는 굴레, 그림책은 어린이책이라는 것. 대부분이 그렇게 본다. 그래서 몇 십 만 부를 판매한 종수는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 한 해 150여 종 안팎의 국내창작그림책이 나오는 환경에서 그림책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교육의 도구인가 모든 연령층이 보고 즐길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시각예술인가, 그리고 아직 성장의 가능성은 더 있는가에 대해.
우리나라의 그림책, 60년
지난 1982년 이탈리아 '볼로냐 아동도서박람회'에서 <먼나라 이웃나라>(초판 1987, 개정판 1998, 김영사)로 잘 알려진 이원복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이 픽션 부문 도록에 처음 소개된 이래 우리나라 작가들의 활동이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림책의 공식 발표 무대인 노마 콩쿠르를 비롯 BIB, 볼로냐 도서전 등에서 이제 낯설지 않게 한국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은 이런 분위기가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 제46회 볼로냐 아동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되어 세계 70여 나라의 출판인, 일러스트레이터, 아동 교육 관련 단체 관계자 500여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그림책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두루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한국관에 31명의 원화 64점, 그림책 200여 종이 함께 전시되었다. 한편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CJ 그림책 상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현상이었다.
'21세기 문화 아이콘 그림책, 페스티벌로 만나다'라는 슬로건으로 한국의 CJ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있는 이 그림책 축제는 국제 규모의 그림책 축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 재단이 밝히고 있는 행사의 취지를 살펴보면 최근 변화하고 있는 그림책 동향을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특정 지역 또는 문화 언어권의 한계가 있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 들어서는 전 세계에서 수준 높은 그림책들이 속속 선보이면서, 그림책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 사람들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미술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CJ문화재단은 21세기 문화 아이콘인 그림책을 지원하여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모두가 함께 풍요로워질 수 있는 문화의 토대를 만들고자 합니다. 특히 그림책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라는 점에 착안하여 전 세대를 아울러 나아가 범세계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축제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국내 대형 미술관에서 열었던 세계 유명 그림책 작가 원화 전시회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어린이책으로만 여겼던 분야에 기업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우키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림책의 원류로 삼았지만 우리나라의 그림책 초기 자료도 가장 확실하게는 1946년과 1947년에 <우리들 노래>(조선아동문학협회)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무렵에는 현재와 같은 픽쳐북 형태는 아니었다. 조선아동문화협회가 공모한 동요 당선작에 7명의 화가(김용환, 정현웅, 김규택, 김의환, 조병덕, 김기창, 김용준)가 그림을 그린 작품집 형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삽화의 수준을 넘어선 당시 한국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연주의와 토속에 널리 퍼졌던 회화(민화)에서 보듯 그 내면의 정서가 맞닿아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가 등장하는 지금의 그림책들에서도 그렇듯 기법이나 재료와 무관하게 전통을 잇는 정서는 계속된다. 이종미의 그림 <해님달님>, 권문희의 <까치와 호랑이와 토끼>, <팥죽할머니와 호랑이>를 그린 최숙희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이면서 독창적인 우리의 조형세계를 서양의 그림책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굳이 자료를 들어 열거하면 65년 안팎의 햇수로 한정되겠지만 최근의 그림책에 대한 관심은 인쇄매체 발생 이전부터 들춰보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이를 글거로 도서관은 전시와 활동을 어렵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옛 그림 일부를 따라 그려볼 수도 있고 민화의 한 장면에 자신의 글을 올려 간단한 그림책이나 이미지 포스터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던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예술 세계를 접할 수 있는 방법, 자주 개발하고 사용하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자신이 스스로 또 다른 창작 예술가가 될 수 있다.
1990년대, 그림책이라는 장르
흔히 낱권으로 구입해보는 그림책(단행본)이 우리들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어린이책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1990년대는 문화 격동기로 경계를 긋는 시기이다.
대중 문화가 마치 어떤 억압에서 풀려난 듯 젊은 세대가 문화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해 소위 신세대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 평소 가요를 폄하하고 멀리 하면서 외국 팝송을 즐겨 듣던 사람들까지 모두 끌어들일 정도로 한 시대를 지배했던 ‘현상’ 그 자체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가 청소년들의 귀를 사로잡았고 ‘슬램덩크’ 만화도 빠지지 않는 오락물의 필수품이었다. ‘워크맨’, ‘삐삐’의 필수품목에 이어 90년대 후반 등장한 ‘스타크래프트’의 열기가 게임시대를 열었다. PC방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게임 하나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어린이책, 특히 그림책에서도 도약의 시기였다. 그 이전에는 ‘명작 그림책’이라는 국적불명의 소위 ‘디즈니 만화’와 동화를 혼합한 ‘애니메이션 그림책’(전집류)이 마치 어린이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외국의 초기 고전 그림책에서부터 흥미있는 유명 작가의 그림책들이 낱권 판매로 속속 출간되면서 마치 새로운 매체의 출현처럼 그림책이 확산되었다. 소위 7080세대라 불리는 30, 40대의 부모들도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갔다.
한편으로는 창작 그림책이 미처 자리잡기도 전에 외국 그림책의 낯선 이미지가 봇물처럼 흘러 들어왔지만 보다 더 긍정적으로 보면 창작 그림책을 빠른 시간에 많이 나올 수 있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대의 등장, 다른 장르의 문화 현상처럼 그림책에서도 이들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자유분방하면서 사회의식이 뚜렷한 소재로 작업을 했다.
우리 생활 문화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내 그들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서서히 독자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한다.
- 솔거나라 (1995~, 보림)
- 우리 문화 발견 (1995, 길벗어린이)
- 바보 이야기 (1995, 계몽사)
- 도토리 자연 그림책 (1998, 보림)
등의 시리즈 형태와 <자장자장 엄마 품에>(류재수 그림, 1993, 한림),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억배 그림, 1997, 재미마주), <만희네 집>(권윤덕 그림, 1995, 길벗어린이), <아씨방 일곱 동무>(이영경 그림, 1998, 비룡소),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정승각 그림, 1994, 초방기획) 등은 이들 작가들이 펼친 주요한 작품들이면서 매우 의미있는 시도였다.
이때부터 작가들의 호칭도 변화한다.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으면서 일러스트레어터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사용되고 그림책과 어린이책에 그림 작업을 하는 전업 작가층이 생긴다.
2000년 이후 현재, 이미지의 축제
2000년부터 6년간 출간된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은 320여 종, 이어서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간은 600여 종, 10년 기간을 둘로 나누면 수치상으로 언제쯤부터 증가의 폭이 많은지 알 수 있다. 2006년 이후 4년 기간이 이전보다 평균 3배 이상 늘었고 작가층도 훨씬 두터워져 2005년까지의 50여 명에 비해 그 이후는 140여 명 이상으로 갑자기 증가한다.
발행 출판사 역시 6년간 20여 출판사가 그림책을 1종 이상 출간했던 데 비해 그 이후 현재까지 매해마다 갑절이 넘는 50곳 이상이 창작 그림책을 내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 이 같은 현상을 수치로만 지켜본다면 아마 특정한 요인에 의한 과열로 볼 수 있다. 이미 1990년대부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다면 그렇다. 이들 중 일부는 데뷔 초기에 소위 ‘전집’ 시리즈 기획에 참여해 그림책의 작업과정과 감각을 터득하면서 잠재력을 축적해 왔다. 여기에 때마침 신규출판사들의 그림책 분야 진출이 새로운 작가 군을 필요로 했다.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더 매력적인 흡인 요소로 작용한 것 중 또 하나는 외국 그림책의 국내 번역 출간이었다. 한 곳의 출판사가 1993년 미국 작가 버지니아 리 버튼의 1942년 작품 <작은 집 이야기>(시공주니어)를 필두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무려 60여 종, 5년 동안 100여 종을 출간해 냈다. 뒤를 이어 다른 한 곳도 1995년부터 비디오 그림책 <곰>(레이먼드 브릭스, 비룡소)의 발행을 시작으로 2003년까지 100여 종을 발행했다. 2005년까지 10여 곳의 출판사들은 400여 종 남짓 외국그림책을 발행해왔다. 이 가운데 영미권을 포함 유럽의 19C 고전부터 인기 있는 유명 작가 그림책 거의 망라되어 명실 공히 세계 그림책의 전시장을 옮겨놓은 듯 했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 홍수를 경험하면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특정한 시기를 가르며 많은 차이를 보이는 출간 러시는 이런 이유로 성장을 거듭해왔다. 2006년쯤엔 세계의 그림책 시장이 점차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20C 유명 걸작이 나온 뒤 이제는 언어권 구분 없이 인기 있는 작가의 새로운 타이틀을 우리나라에서 동시 출간하는 마케팅이 늘어가고 있다. 여기에 한몫을 더해주는 이슈들이 있다.
국가 간, 언어권별 장애를 어렵지 않게 넘나드는 국제박람회에서의 교류이다. 1998년부터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한 볼로냐국제아동도서박람회 참관행렬은 매년 우리나라 출판관계자를 포함 일러스트레이터, 어린이 책 애호가까지 줄을 잇고 있다. 특히 43회째를 맞는 2009년, 이 박람회가 한국을 주빈국으로 결정함으로서 정점에 다다랐다. 한편으로 이 박람회가 공모한 세계 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원화 수상작품들이 일본에 이어 2009년과 올해 연이어 전시된 바 있다.
61개국에서 2,714명이 응모한 작품 중 20개국 81명의 작가 작품들이 전시장에 걸린 규모 있는 이벤트가 그림책 장르를 대중화 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적인 전시 이벤트 못지않게 국내 아티스트들의 적극적인 활동도 잇따른다. 이미 중견작가로 활약하면서 인지도가 높은 일부 작가는 갤러리에서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거나 그룹전을 통해 현장에서 독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림책작가로 입문하기 위해 준비 중인 신인 일러스트레이터들도 비공식아카데미 활동과 작업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채워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전개되기까지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세계 그림책 시장의 통합, 한국의 그림책 아티스트
그림책을 수량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이제 진부하다. 은밀하게 작업하고 논의하던 수준이 이미 지났고 그림책은 이미 읽기 능력을 위한 보조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영국 최초로 앵글리아 대학교 대학원에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을 개설한 마틴 솔즈베리(Martin Salisbury)는 최근 이런 경향을 반영한 아티스트 36을 소개한 작품집을 선보였다. 전 세계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들의 특징적인 작품세계를 소개한 글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언급한다.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그림책들은 각 나라별로 스타일, 접근법, 시각적·문화적 배경 및 매체 사용법 등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인터넷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상당히 비슷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외부와의 교류 없이 자국의 전통적 그래픽을 고수하던 국가들이 어린이용으로 서구적이고 ‘디즈니화’된 디자인을 무분별하게 수입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한 나라들이 자국의 문화적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노력 중이어서 다행스럽다. 전 세계 곳곳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이란·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의 뛰어난 시각적 전통 계승 움직임이 돋보인다.”
그의 이런 견해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개성과 스타일을 중시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작가의 정체성 있는 시각 표현이 반드시 독자에 대한 배려를 외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1990년대 전후로 <백두산 이야기>(류재수 그림, 보림),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수탉>(이억배 그림, 재미마주), <솔이의 추석 이야기>(이억배 그림, 길벗어린이),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정승각 그림, 초방) 등을 일부에서 다시 한 번 조지프 슈워츠의 견해를 인용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모든 훌륭한 예술이 그렇듯이 보편적 가치를 가장 두드러지게 구현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의 대다수는 지역의 배경과 특성을 강하게 담은 것”이라는 그의 말을 재해석해 본다면 출판사와 작가들이 해외 여러 나라들과의 동시 출간과 교류를 의식하면서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이 한층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특히 요즘에는 글과 이미지의 상호 보완하는 전통적인 관계에서 점점 시각적 텍스트화 하는 경향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그림책은 어린이 독자에게 흥미로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열거한 세 작가의 작품은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이제 전통적인 그림책 해석 방법이나 글과 이미지 어는 한쪽으로 기우는 형식의 문제는 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심지어는 독자 대상 연령에서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있어야 작가의 작업이 보다 더 창조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가의 특징적 조형성과는 별개로 우리나라는 매년 백 수십 명의 아티스트가 그와 비슷하거나 훨씬 많은 그림책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것처럼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제 이 창의적 열정가들이 벌이는 축제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창조적 아이디어로 일러스트레이션 세계를 펼쳐갈지 기대해 볼 일이다.
독립된 표현 장르, 옛이야기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요인 못지않게 표현 장르도 중요하게 다룰 수 있는 대목이다. 번역 소개된 그림책과 우리나라 창작 그림책을 백 여종 이상을 눈여겨 살펴보면 차이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서양의 그림책들이 판타지, 즉 상상력에 기반을 둔 특징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책들은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일러스트레이션이 ‘옛이야기’를 다룬 장르라는 점이다. 2009년의 그림책 180여 종만을 대상으로 해도 옛이야기를 텍스트의 소재로 삼은 것이 50여 종을 넘는다. 좀더 지식정보 쪽으로 접근하면 이보다 훨씬 수량이 나온다. 그런데 이 책들의 표현기법이나 스타일은 단순하지 않다. 여러 재료를 섞어 작업한 혼합재료에서부터 수묵, 목판화에 컬러채색, 아크릴, 연필드로잉, 디지털 매체 사용까지 다양하다. 또한 글을 따라가는 보조수단의 이미지보다 오히려 문자와 이미지의 통합에 가까운 대담한 구성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줄줄이 꿴 호랑이>(권문희 글·그림, 사계절)에서 보이는 화면의 구성은 도구와 재료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하고 구사한 감정표현의 자신 있는 묘사로 볼 수 있다. 참기름에 푹 절은 강아지가 깊은 산 큰 나무에 꼬리를 묶인 채 누워 있는 장면, 미끈미끈한 강아지가 호랑이 목구멍을 통해 똥구멍으로 쏙 빠져 나오는 장면까지 길게 펼쳐진 화면을 시각적으로 일관성 있게 포착하기 위한 수단으로 긴 가로 형태의 판면을 사용한다. 여기에 텍스트는 오히려 그림에 방해받지 않는 최적의 공간으로 앉혀지면서 보는 사람은 마치 영화의 프레임에서 소리 없는 한 장면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끄럽지 않은 까칠한 붓질로 꼭 채워야 하는 곳에 채색하고 대부분은 여백으로 두어 공간의 효율도 높인다. 그림과 글의 관계에서 모리스 샌닥이 ‘리듬감 넘치는 단어와 그림의 당김음’이라고 말한 것을 <줄줄이 꿴 호랑이>가 작가의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실현해 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인 옛이야기를 호소력 있게 시각화 하는 데는 이야기를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영민함과 전통화법의 효과적인 활용에 있었다. 이같은 독창적 묘사는 권문희뿐만 아니라 박재철의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천둥거인), 김준철의 <메기의 꿈>(웅진주니어)에서도 고전적인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무리 없이 녹여내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적 배경에서 가장 잘 어울리고 완성도 높은 그림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이 분야가 아닐까?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 중에 또 다른 사례를 하나 본다면 이 문제에 더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다.
<작은 당나귀>(김예인 글·그림, 느림보, 2010)는 텍스트가 옛이야기가 아닌 시를 택하고 있지만 글과 이미지가 하나로 결합된 인상적인 시화로 나온 작품이다.
오랫동안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 작가의 스타일은 분명 미니멀한 미국 현대미술의 전통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기법에서 보이는 붓의 사용과 공간의 활용은 그의 문화적 뿌리가 어디에 연유해 있는지 드러난다. 수채화이면서 수묵화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극도로 절제된 색채 사용에서 정체성이 강하게 배어난다. 단 한 획의 서툰 터치도 허락할 것 같지 않은 정갈함, 그리고 물의 적절한 배합으로 농담의 변화를 주는 것에서도 한국의 수묵담채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작품의 출현으로 기성과 신인의 경계는 물론 어른과 어린이의 독자 구분도 힘들게 되었다. 한편으로 어린이 책 분야에서 수준 높은 일러스트레이션과 디자인을 경험하는 일은 무척 바람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책임이 따른다. 좋은 작품을 즐기고 감상할 기회를 독자들은 외면해서도 안 되는 일이며, 출판사는 독자와 작가를 매개하는 일 외에도 좋은 작품들을 상업적 마케팅에 어떻게 활용하고, 그 공간은 온·오프라인 북샵 외에 또 어떤 곳들이 있는지 눈여겨 보면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다. 더 많은 활로에 대해 작가, 출판사, 독자, 도서관, 갤러리 운영자들과 함께 할 일이 남아 있다.
1990년대에 그림책을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 성년이 되었다. ‘서태지와아이들’, ‘워크맨’, ‘삐삐’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질 것인가? 그림책이라는 전통 있는 매체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미 영국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200여 년의 뿌리가 있다. 이제 정점에 오르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그림책은 세계로 바짝 다가가고 있다. 이들이 구매력 있는 수요층이 될 무렵 다시 10여 년 뒤에는 새로운 차원의 더 높은 수준의 조형 환경이 될지 그 과제는 현재 그림책을 만들고 보는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