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 급하신가… 백련잎차 한잔 먼저 하시게
널따란 다기에 백련(白蓮)이 피었다. 은은한 초여름 빛깔이 담겼다. 성래원에 이르니 이응원 교무가 백련잎차 한 잔 마시고 일을 보란다. 뭐가 그리 급하냐며 앉기를 권했다. 쪽머리에 검은 치마, 하얀 저고리 차림의 이 교무 인향(仁香)이 살포시 감싼다. 원불교가 태어난 영산성지다. 둘러보니 안팎을 경계 짓는 꽃담조차도 없다. 바람도 사람도 쉬 넘나드니 자유롭다.
연꽃 차향이 온 몸에 퍼진다. 연꽃의 생명은 3일이란다. 첫날은 절반만 살짝 핀 뒤 금세 오므라든다. 이틀째, 비로소 활짝 핀다. 꽃대를 꼿꼿하게 세우고 하얀 꽃망울을 맘껏 터뜨린다. 향기가 넘친다. 백련 차는 이 때 채취한다. 3일째 연꽃은 연밥과 꽃술만 남기고 사라진다. 꽃잎을 하나 둘 떨어뜨린다. 자기 몸이 가장 화려할 때 물러날 줄을 안다. 사람이 그리 하기 쉬운가.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정호승 作 ‘연꽃구경’일부
빛이 날카롭다. 폭염이란다. 원불교는 낯설지만 영산성지는 눈에 익다. 생경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성래원 오른 길로 ‘영산 대각전’으로 향한다. 1936년 지어진 원불교의 법당이다. 연면적 65평 남짓한 교도들의 법회공간이다. 성당, 교회라 할까. 가만히 문을 열었다. 텅 빈 마루 바닥에 정면 일원상과 불전 도구들이 가지런하다. 불단에는 촛대, 향로, 청수기, 경종, 목탁뿐이다. 화려한 상징도 장엄한 조형물도 없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1916년 큰 깨달음을 계기로 영광에서 창도했다. 영광과 변산 시대를 거쳐 익산에 총부를 두고 있다. 백수읍 길용리 영산 성지는 창립정신이 녹아 있는 곳. 교조의 탄생가, 구도지인 구수 산 삼밭재 마당바위, 깨달음을 얻은 노루목 대각지 등이 그대로 세월을 지키고 있다. 건물은 낮고 아담하다. 영산원, 영산학원실, 법모실 등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일갈했다. 안내하던 하상덕 교무가 설명을 보탰다. “새로운 물질문명의 시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이 물질에 인간이 먹혀들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려 인간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알파고의 충격,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과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에 말문이 섰다. 원불교는 그래선지 형상보다는 본래 마음을 중시한다. “불법을 구하러 산으로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교당이 도시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3가지를 중시한다고 했다. 시대에 맞게 의식을 간소하게 한다는 시대화, 일반 백성과 함께하는 대중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생활화이다. 결혼, 상례가 번거로우면 살아 있는 자에게 부담이니, 의식의 간소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르침은 셋이나 하나처럼 이해됐다.
가만 보니 대각전도 검박하다. 지붕이 사찰, 궁궐 건축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우진각이다. 지붕의 앞 뒤, 양옆이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우리네 초가집과 기와집 안채에 주로 사용했다. 서민, 민중의 지붕이다. 외부는 격자형 유리창문에 나무로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 영광에서 가장 큰 건물로 당시 3300원이 들었단다. 집 뒤 언덕을 베개 삼고, 너른 벌을 마당으로 끌어안았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 했던가.
대각전 건너편은 드넓은 논이다. 정관평(貞觀坪)-. 1918년 소태산과 제자들이 바닷물을 막아 만든 간척 답이다. 220마지기 2만5707 평으로 1년 만에 완공했다. 초기 교도들이 간척 공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임야를 구입해 잡목은 땔감으로 팔고, 개간한 땅에 복숭아 100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교무들이 직접 쌀농사를 짓고 있다. 노동으로 일궈 낸 원불교의 창립정신이 녹아 있다.
정관평 논 사이에 작은 강이 흐른다. 보은강, 간척 답이 조성되면서 생긴 물길이다. 어른 키만 한 수풀인 구들(부들?) 사이로 홍련, 백련이 어우러져 있다. 보은강 연꽃 너머에 언뜻 소박한 대각전이 보인다. 바로 무질러 가면 200 여m 될 성싶다.
정관평, 보은강 연꽃, 대각전이 한 줄로 서 있다. 연꽃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했는가.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 세상을 정화하니 성인에 비할 바 아니다. 연꽃을 화과동시(花果同時)라 일렀다. 삼라의 꽃과 나무는 꽃이 지면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는다. 이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이웃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고마움을 키우며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깨달음의 삶이라는 의미일 게다.
그러고 보니, 곡식을 일구는 노동의 정관평과 목탁을 두드리는 대각전의 깨달음이 따로 있지 않은가 보다. 이제야 정관평과 보은강 연꽃, 대각전이 왜, 한 자리 한 눈금으로 있는지 눈치 챘다.
보은강을 왼편에 끼고 농로를 걷는다. 법성포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갓 자란 벼들이 하늘거린다. 7월이라 벼들이 어른 팔 길이 만 하다. 선학대 입구에 들어선다. 편도 1차선에 팽나무가 도열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에 팽나무가 많아 훗날 길가에 심었단다. 팽나무 녹음이 하늘을 덮는다. 군데군데 키 작은 코스모스가 때를 기다린다. 가을이 오기만을. 오른편 멀리 옥녀봉 바위에 둥근 원이 새겨져 있다. 우주와 인생에 대해 의심을 가졌다는 소태산의 흔적이다. 대학교에서 옛 대각지까지 600여m 수림길이다. “이른 새벽이슬이 구르는 이 나무 길을 거니노라면 무념의 상태에 빠져듭니다. 이곳은 언제든지 좋지요. 지금부터가 더 좋을지 모릅니다. 또 오세요.” 눈빛 선한 하 교무가 다시 볼 것을 청한다. 이 교무가 부산하더니 민들레차를 건넨다. 연신 고개 몇번 숙이고 황망하게 차에 올랐다.
백수해안에 노을이 비꼈다. 황혼녘 노을은 끝, 마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늘 한 해 끝자리에 백수해안을 찾았다. 백수(百壽)시대에 황혼은 언제일까. 다시금 영산성지 보은강 연꽃이 그려진다. 연꽃 씨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누군가 적당한 물, 바람, 햇살을 주면 다시 싹이 튼다.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래, 백수 해안을 태우는 노을에 내일의 씨앗이 있는 거야. 마감이 아닌 시작일지 모르지….
민들레 차를 달였다. 여러 상념에 어지럽다. 다시 한 모금, 민들레 꽃말이 ‘감사하는 마음’. 둔자(鈍者)는 말·글로 다그치는데, 두 교무는 고운 마음씨로 가르치는구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