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3편
무척.보조.기조실 23.12.09 07:07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3편 ( 48:05 )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3편
제 3장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
< 한 범죄자의 전향 >
하느님은 내 열심을 격려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잊고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 당신 마음에 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 나는 두 여자와 한 소녀를 살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밖에도 그는 보석을 훔쳤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경찰은 혐의자를 체포했는데, 그의 이름은 앙리 프란치니였다.
프랑스와 외국 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해 두세 번 보도를 했으며, 악랄한 몇몇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프란치니는 범죄의 잔악함 때문에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뉘우치지도 않았고, 한마디 자백도 하지 않았다. 또한 교정사목, 사제와의 면담도 거부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악한이라 부르며 그에 대해 격분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꼭 구하고 싶었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가 지옥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지상에서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도 중에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드렸다.
"프란치니의 대죄를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니, 이것은 또한 프란치니를 위한 것이기도 해요. 그가 하늘나라에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 밖에도 셀리나에게 부탁하여 생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미사의 지향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겁이 나서 스스로 미사를 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미사의 지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셀리나는 내 비밀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상냥하면서도 강력하게 다그쳤던 것이다.
셀리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중죄인 프란치니 전향을 위해서 그녀도 협력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프란치니의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나 스스로 용기를 잃지 않고 프란치니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다.
'프란치니가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지라도 당신께서는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내 신뢰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그렇게 컸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께 그가 뉘우친 표시를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내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빠가 어떤 신문도 보지 말라고 금했음에도 나는 프란치니에 관한 신문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그가 처형된 다음 날, 나는 '라 크루와' 신문을 집어들었다. 급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프란치니가 고해성사를 보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 그는 사형대에 올라 머리를 소름 끼치는 구멍으로 들이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사제가 들고 있던 십자가를 움켜쥐고 예수님의 상처에 세 번 입맞춤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은혜를 느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한다."
나는 내가 청했던 표시를 받은 것이다. 아무도 내 기쁨의 눈물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숨겼다. 이 사건은 하늘나라를 위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나의 결심을 더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를 위한 최상의 자리가 바로 가르멜 수도원으로 여겨졌다. 프란치니는 내가 하늘나라를 위해 얻은 최초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 꿈처럼 아름다웠던 1887년 > 사랑하는 하느님은 편협한 자기중심적 세계로부터 단숨에 나를 이끌어내셨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길을 뒤돌아 볼 때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크다.
그럼에도 첫 걸음을 시작했을 때 내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았음을 인정한다.
나는 흥미 있는 모든 것에 감격하며 몰두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림 그리기와 도자기 만들기를 좋아했다.
나는 더 이상 수업과 선생님이 내주는 숙제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하면 허기진 지식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스스로 찾아냈다.
내 방에는 역사와 자연과학에 관한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밖의 분야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몇 달 안에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나는 언젠가는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 것을 꿈꾸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햇빛이 비치는 작은 집에 사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나는 어느 방에서든 바다가 보이길 원했다. 소, 나귀, 양, 닭과 새들이 가족이 될 것이다.
내 작은 집은 성당 가까이 있어야 한다. 매일 아침 미사에 갈 수 있기 위해서 나는 나귀를 타고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며 그들에게 약도 나누어 주고, 간호도 해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름다운 노르망디 지방에서 은수자로 살 것인데, 그 삶은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과 꿈에 관해 셀리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친구였다. 우리 둘은 많은 것을 함께 했으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달빛이 빛나는 여름날 밤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찬란한 미래를 꿈꾸었다.
우리 친척들과 친구들은 달라진 나를 보고 놀라워했으며, 이지적이고 예쁜 소녀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음으로써 허영심으로 우쭐거리거나 자존심만 센 소녀가 될 수 있음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때 내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이 있었다. 나는 내가 서서히 여자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는 많은 지식을 습득했지만, 내가 탐독한 그 많은 책은 사랑에 굶주린 내 가슴을 차갑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아빠 서재에서 새로운 종교 서적을 발견했으며, 내 방에 들어앉아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지금까지 읽은 책을 통틀어 지상에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주시고자 하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나는 끊임없이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되풀이했다.
거기에는 잃을 위험이 없으면서도 사랑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애착과 사랑은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이미 세 번이나 체험했다. '하느님은 나를 항상 언제까지나 끝없이 사랑하신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나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리라고 결심했다.
더 나아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했다.
이렇게 중요한 발견을 셀리나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밤마다 누각에서 만났으며, 우리의 생각을 나누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커다란 내적 일치를 느꼈다. 셀리나 역시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충만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가슴 속에 사랑의 불을 놓으셨으며, 이제는 그 불이 타오르길 원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며 앞장서 걸으며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길 원하셨다.
<준주성범>이라는 소책자 안에서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많은 가르침을 발견했다. 나는 '내적 생활'을 다룬 첫 장을 읽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면 너는 부유하다. 네게는 그분으로 충분하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너의 조력자가 될 것이며, 끝까지 충실하게 내 곁에 계실 것이다.
너의 모든 신뢰를 하느님께 두어라. 그는 너를 위해 오실 것이며, 네게 최상이 되도록 모든 것을 이끄실 것이다.
너는 영원한 집을 갖고 있지 않다. 너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으며, 지상의 모든 것을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라. 모든 것은 한 번은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은 진정 현명한 사람이다!'
이러한 내용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나는 그것들을 외웠다.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은 분명해졌다. 나는 새로운 감격을 느꼈다. 예수께 대한 사랑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갈망은 결코 허황된 생각이 아니었으며, 가장 진지한 것이었다.
< 커다란 투쟁 >
가르멜에 입회하고자 하는 결심은 점점 더 굳어졌다. 이 거룩한 소명을 위해서라면 불속이라도 통과하려는 듯 결심은 나를 재촉했다.
나는 가르멜의 면회실에서 두 언니 마리와 폴리나에게 가르멜의 입회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폴리나만이 나를 이해했다. 마리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으며, 내가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해를 시도했다.
겨우 15살의 나이로 가르멜에 입회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을 셀리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숨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셀리나는 곧 나의 결심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말리기보다는 용기있게 이 희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 둘은 이미 한마음 한 영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몇 달 전부터 우리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편안했는데, 이런 생활은 많은 소녀들이 단지 꿈에서나 그릴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생활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을 누릴 시간이 거의 없었으며, 그것은 곧 끝을 고할 참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내 결심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밤낮으로 고심했다. 아빠는 이미 당신 딸을 둘씩이나 가르멜에 보냈으며, 나에 대한 아빠의 애착은 특별했는데 이제 나마저 아빠를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내 결심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엄청난 고백을 하기 위해서 성령 강림 대축일을 선택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적합한 단어를 떠올리면서 성령 강림 대축일 내내 기도했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아빠와 이야기할 좋은 기회가 왔다.
아빠는 정원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앉았다.
아빠는 내 눈에서 눈물을 보았고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내 작은 여왕이여, 무슨 일이냐? 아빠에게 말해보렴."
아빠는 충격을 감추기 위해 일어섰으며 나와 함께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때 아빠는 내 머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르멜에 입회하고자 하는 열망을 아빠에게 고백했다. 아빠도 역시 눈물을 흘렸으며, 내 성소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의 말씀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어려운 결단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리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소망이 곧 하느님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함으로써 드디어 아빠를 설득했다.
아빠는 깊은 신앙심에서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께서 아이들을 수도원으로 부르심으로써 내게 커다란 영예를 드러내 보이시는구나!"
우리는 그날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나는 가슴속에 있던 돌멩이를 꺼내놓은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아빠가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담 옆으로 가서 백합처럼 보이는 작고 하얀 꽃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뽑아서 내게 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보려무나, 사랑의 하느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이것을 키우셨고, 오늘까지 보살펴 주셨는지."
나는 아빠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예수님이 작은 꽃을 위해 하신 일과 작은 데레사를 위해 하신 일 사이에는 닮은 점이 많다.
나는 그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아빠가 그 꽃을 뽑을 때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뽑아올렸다는 것이다. 그 꽃을 마치 기름진 다른 땅에 옮겨 심으려는 것 같았다.
아빠가 내게 가르멜에 입회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그곳에서 계속 성장하여 활짝 꽃 피울 수 있도록 했을 때, 아빠는 꽃에게 한 것처럼 내게도 똑같은 일을 했던 것이다.
나는 아빠의 허락을 받고 가르멜에 입회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곧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의 교육에 책임을 갖고 있던 외삼촌은 나의 수도원 입회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17살이 되기 전에는 가르멜에 대해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15살 소녀를 가르멜 입회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정신 나간 처사라는 것이다. 외삼촌은 그 밖에도 많은 말을 했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설득시키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나는 모든 말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조용히 돌아왔다.
내 마음은 슬픔과 쓰라림으로 출렁거렸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기도였다. 나는 예수께 이시도르 외삼촌이 요구하는 기적을 이루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는 사이 대략 2주 정도가 흘렀는데 내게는 영혼처럼 길게 느껴졌다. 지독하게도 처참한 시기였다. 내 마음속 모든 것이 캄캄한 밤과 같았고, 나는 고독 가운데 하느님한테서도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도 쓰라린 내 슬픔에 동조하는 양. 3일 동안 내내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비만 세차게 내렸다.
4일째 되던 날, 드디어 외삼촌을 방문했는데, 그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므로 나는 무척 놀랐다. 외삼촌은 기도하면서 깨달았다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하느님께서 심고자 하시는 작은 꽃이며, 당신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뷔소네로 돌아오면서 행복이 넘쳤다. 하늘의 구름은 사라졌으며, 내 마음도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내게 기쁨을 다시 주셨으며, 나는 목표에 아주 가까이 왔다고 믿었다.
외삼촌의 동의를 얻은 며칠 후 가르멜에 있는 폴리나를 방문했다.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치 뇌성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곧 가르멜의 지도 신부님이 내가 21살이 되기 전에는 가르멜에 입회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을 때 있는 힘을 다해서 설득하려 했지만 그의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제관을 나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또다시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우산 속으로 나를 숨겼다.
아빠는 나를 달래느라 주교님이 계시는 바이외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내 뜻을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며, 이렇게까지 말했다.
"만일 주교님이 가르멜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로마까지 가겠다."
나와 함께 바이외에 가기로 한 아빠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상생활은 겉으로 보기에 변화된 것이 없었다.
나는 공부도 하고 셀리나와 함께 미술 수업도 받았는데, 선생님은 내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하느님과 이웃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자라났다.
우리가 바이외에 가기 전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기쁨 하나를 주셨다. 나는 막내둥이로서 작은 동생을 가지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는데, 슬픈 사건 안에서 이것을 체험하게 해주셨다.
우리 집 가정부의 친척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어린 아이 셋을 남겨놓고 죽었다.
그녀가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두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나는 하루 종일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의심 없이 모두 다 받아들였으며,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그중 큰 아이는 예수님과 천국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그 아이는 감격하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동생들과 이제는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서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결코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것으로 그 아이는 나를 큰 아가씨라고 불렀던 것이다.'
드디어 바이외의 주교님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1887년 10월 31일이 되었다. 나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긴 머리를 틀어올렸다.
나는 뒤숭숭한 느낌으로 아빠와 함께 길을 떠났다. 난생 처음으로 언니들 없이 혼자서 그것도 주교님을 방문해야만 했다. 이제까지 중요한 일에 대해서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나 스스로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내가 왜 15살의 나이로 가르멜을 입회하기를 원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아! 이것은 내게 얼마나 힘든 여행이었던가. 실제적으로 예수님만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었다. 단지 그분에 대한 사랑만이 주교님을 설득할 수 있도록 내게 용기와 힘을 주었다.
우리가 바이외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빠는 나의 예쁜 옷이 젖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주교좌 성당으로 갔다. 여기서 나의 비참함이 시작되었다.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장례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주교좌 성당은 검은 옷차림을 한 여자들로 가득 찼으며, 모두들 나의 환한 옷과 하얀 모자를 쳐다보았다.
아빠는 그 모든 것에도 나를 데리고 성당 제단 앞까지 나아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지만 밖에는 비가 쏟아져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나는 결코 그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불쾌한 내색 없이 지루한 장례미사에 참석하고 있던 바이외의 사람들의 기분 전환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중앙재단 뒤에 있는 작은 경당에 들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경당은 고마운 은신처였으며, 나는 거기 오래 머물면서 주교님과의 면담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기도했다.
드디어 비가 그쳤을 때 성당 안도 텅 비었으며, 아빠는 르브로니 총대리 신부님에게 가기 전에 성당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부님은 우리의 방문을 알고 있었음에도 거기에 없었다. 그가 방문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바이외 위에 시내를 산책하다가 다시 주교관 가까이로 돌아왔다.
아빠는 나를 멋진 식당으로 데려갔는데 나는 물론 입맛이 전혀 없었다.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아빠는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고, 주교님은 내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두 번째 방문을 시도했으며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주교관 앞마당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모든 수문을 열어놓은 듯 또다시 비가 쏟아졌다.
르브로니 총대리 신부님은 친절하게 맞아주었지만 우리의 방문 목적을 듣고 아주 놀라워했다. 그분은 웃으면서 나를 찬찬히 살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 내가 다이아몬드를 보았군. 존경하올 주교님께는 그것을 보여드리면 안 돼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드디어 총대리 신부님이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주교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전임 주교님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커다란 응접실을 지나갔다. 나는 마치 조그마한 개미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갑자기 두 분의 신부님과 회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대화에 몰두해 있는 주교님과 마주쳤다. 총대리 신부님이 주교님과 몇 말씀 나누는 동안 우리는 그분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는 3개의 커다란 안락의자가 벽난로 앞에 놓여 있었고, 벽난로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교님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와 아빠는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주교님은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당연히 우리의 대화에 함께할 르브로니 신부님이 가운데 안락의자를 가리키며 내게 앉으라고 말했다.
내가 공손하게 거절하자 그분은 거기 앉으라고 재차 말하며 순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또래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얼굴을 붉히며 존경하올 주교님이 손수 의자를 갖고 와서 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빠가 말해주기를 바랐는데, 아빠는 내가 스스로 주교님에게 내 용건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한다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내가 왜 15살의 가르멜에 입회하기를 원하는지 주교님께 설명하려 노력했고 애썼다.
주교님은 내 동기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며, 언제부터 내가 가르멜에 들어가길 원했는지 물어보았다.
"존경하올 주교님,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그러자 총대리 신부님이 웃으면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15년은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 역시 웃으면서 "맞는 말씀입니다." 라고 대꾸했고,
"그러나 여러 해를 허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세 살 때부터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봉헌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주교님은 "아직은 조용히 아빠 곁에 머물러 있거라" 하고 말하면서 이것이 아빠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가 내 편을 들면서 당신 손수 주교님에게 내가 15살의 나이로 가르멜에 입회해야 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자 주교님은 심히 놀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주교님은 친절하게도, 만일 내가 허락을 받지 못할 경우 교황님께 말씀드리기 위해 로마 성지순례단에 참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더 이상 모든 말이 소용없어 보였으며, 주교님은 수도원 지도 신부님과 의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울한 내용은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가르멜 지도 신부님한테서 이미 거절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총대리 신부님이 주의를 주었음에도 주교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존경하올 주교님은 내가 우는 바람에 당황해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달래느라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단다. 네가 아빠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고 나면 너의 성소가 더욱 견고해질 거야. 우는 대신에 오히려 기뻐해야지."
주교님은 계속해서 다음 주에 성 야고보 성당의 주임 신부님과 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위해 리지외에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이탈리아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주교님에게 계속해서 간청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더 이상의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으며, 내 모든 말 주변도 바닥이 났다.
주교님이 우리를 정원까지 배웅해 주었는데, 내가 나이가 더 들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들어올렸다는 사실을 아빠가 이야기했을 때 주교님은 보기 드물게 즐거워했다.
내 비밀이 폭로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훗날 주교님은 나에 관해 말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총대리 신부님은 우리를 정문까지 안내했다. 길에 나서자마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미래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내 영혼은 쓰라림 속에서 허우적거렸지만 마음은 평화로웠다. 나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 리지외에 도착했으며, 가르멜에 있는 언니들을 찾아가 주교님 방문이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음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폴리나와 마리는 다정한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 오, 아름다운 여행이여! >
바이외에서 돌아온 지 3일 후 우리는 긴 여정에 올랐다. 영혼의 도시 로마를 향하여. 순례단은 11월 6일 일요일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바실리카에서 9시에 처음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파리를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틀 먼저 출발했다.
1887년 11월 4일 새벽 3시에 아빠와 셀리나, 그리고 나는 아직 잠들어 있는 리지외를 출발했다. 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으며, 무언가 엄청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아빠는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기차가 출발했을 때 아빠는 옛날 노래를 즐겁게 선창했다. "달려라, 달려라 나의 마차야 우리는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네."
오전 중에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으며, 곧장 시내 관광에 나섰다. 아빠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이틀 동안 우리에게 파리의 멋진 곳을 보여주었다.
파리의 중심가 샹젤리제 거리에서 본 꼭두각시 인형극, 훌륭한 튀일리 정원, 파리의 개선문, 바실리카 왕궁, 루브르 박물관, 앵발리드와 그 밖의 많은 것을 감명 깊게 보았다.
내가 파리에서 본 아름다운 것들은 정말 대단하고 놀라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우리 가족은 이 대성당을 사랑했으며, 특히 1883년 5월 13일 이후 더욱 그러했는데, 그날 나는 성모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치유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난 4년 동안 혹시 상상으로 성모님의 웃음을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에 시달렸다. 이 비밀스러운 고통에 대해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1월 5일 토요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이러한 의혹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성모님은 내게 내적 확신을 주었는데, 그 당시 내가 본 것은 진정 내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나를 치유해준 사람이 바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모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엄마라는 칭호로 말을 건넸다. 어머니라는 말보다 엄마라는 말이 더 다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대한 여행이 수도성소를 위해서 별로 유익하지 못한 온갖 유혹과 위험을 수반하며, 특히 죄악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므로 나는 성모님에게 모든 악한 것을 나한테서 멀리해 주시고 내 마음을 순결하게 지켜주시길 간절히 청했다.
주일인 다음 날 순례자들은 몽마르트에 모여 조를 나누었으며, 바실리카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이 바실리카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성전으로 재단 위 높은 곳에 모자이크로 만든 예수 성심상이 놓여 있었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바실리카에 전 세계에서 순례자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예수 성심께 우리를 봉헌하고 나서 다음 날 아침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정확히 6시 35분에 로마를 향해 파리 동부역을 특별열차로 출발했다. 성직자 75명을 포함하여 197명의 프랑스 순례자들로 구성된 이번 성지순례는 교황 레오 13세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여행 동안 내가 체험한 바와 같이 로마 성좌에 대한 성실한 프랑스 교회의 연대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나는 단지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 성소를 위해서 교황님께 조기 입회에 관해 말씀드리기 위한 것 뿐이었다.
그때 고향 리지외에서는 아빠가 가르멜에 대한 내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아빠는 내 계획을 옹호해 주었으며, 나는 마치 사자처럼 그것을 위해서 싸울 태세가 되어 있었다.
각 그룹은 기차에서 그들이 사용할 칸을 배정받았으며, 그 칸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모든 순례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이름이 명명되었는데 우리카는 '성 마르탱'이었다. 아빠는 금방 흥분했으며, 곧장 순례단의 인솔자인 쿠탕스 교구 르구 총대리 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때부터 순례자들은 아빠를 '성 마르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지 순례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데, 참가자들 가운데는 귀족들이 많았다. 아빠도 이번 여행을 위해서 오랫동안 저축했을 것이다.
셀리나와 나는 순례단에서 가장 어렸으며 정말 명랑했다. 우리는 다른 순례자들로부터 곧 호감을 얻게 되었다. 아빠는 우리를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으며, 우리 역시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순례자들 중에 내 사랑하는 임금님보다 더 멋있고 존경할 만한 신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상한 귀족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폰'이나 '주' ... 따위 앞에서 현혹되지 않았는데, 특히 여자들은 이런 칭호를 내세우려 했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반짝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으며, 한편 옷이나 칭호가 사람을 멋지게 보이게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나 한 인간이 지닌 가치와 품위의 진정한 위대함은 오로지 하느님한테서 오며 그때 그는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종종 자비롭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서는 귀족들의 칭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사람은 하느님한테서 배정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예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지상에서 가난하고 잊혀진 자로 산 사람은 하느님께 첫째가 되고 귀족이 되며 부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내게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바이외의 총대리 르브로니 신부님이 우리 순례단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무척 불편했다. 그분은 어쩌면 내 모든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자 하는지 모른다. 나는 그분이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당신 가까이에 있지 않을 때도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보기 위해서 눈에 띄지 않게 수단과 방법을 찾아냈다.
확실히 그분은 내가 가르멜 수녀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내게 접근하려 했다.
'영원의 도시'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컷 맛보았다. 기차가 스위스를 지나는 동안 눈 덮인 산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진 높은 산을 보았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찬 물소리와 함께 저 아래 계곡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보았으며, 곧바로 커다란 양치식물들과 야생 꽃들이 이들을 가려버리곤 했다.
계곡에는 다리가 있어 낭떠러지를 이룬 협곡을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베풀어 주셨는가!'
우리는 또한 교회 종탑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갔는데 그곳에는 맑고 깨끗한 초록빛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그 위로 석양이 붉게 물들어갔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감상하기에는 눈이 부족할 지경이었으며, 할 수만 있다면 동시에 기차의 양쪽 창문에 앉아 있고 싶었다. 그 모든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이 벅차 올라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위대하며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갑자기 수도원 생활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 담장 안의 일상생활은 단조로울 것이다. 기분 전환도 없을 것이며, 들꽃이 만발한 초원이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한 조각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며, 포기와 순명의 작은 희생을 많이 바쳐야 하고, 자유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하느님의 작품들이 마치 꿈처럼 스쳐가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얼마나 쉽게 자기의 소명을 잊을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훗날 언젠가 가르멜 안에서 어려운 때가 오고 별이 빛나는 한 조각의 하늘만 볼 수 있을 때, 나는 오늘 내가 본 모든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리라.
나는 내 마음이 외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길 바란다.
나는 결코 하찮은 것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하느님 말씀 위에 내 인생을 건설할 것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은가.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 9) 그렇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의 위대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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