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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딩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까지 가는 정딩역사문화거리
▶ 정딩역사문화거리에 있는 개원사와 광덕사
어제 삼국지 여행의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 구경에 나선다. 정딩 시내 도로를 따라 걸으며 정딩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까지 가는 도로 주변으로 개원사(開元寺), 광덕사(廣德寺) 등의 고찰이 새벽잠에서 덜 깬 듯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부지런한 노점 행상들은 시민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
▶ 정딩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
▶ 창러(長樂)문 주변 옛 토성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 시내에서 북쪽으로 15km 되는 지점에 자리한 정딩현(正定縣)은 약 2000년 전부터 군사요새지로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본래는 ‘백성들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한다(眞正安定)’는 뜻에서 ‘진정(眞定)’이라 불렸으나 청나라 옹정제 즉위 시 황제의 이름인 ‘윤진(胤禛)’과 같은 발음인 ‘진(眞)’의 사용이 금지되면서 정딩(正定)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딩현 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으로 올라가는 곳은 입장료(門票, 30元)를 내야 하지만 아직 관리인이 출근 전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북주(北周·557∼581년) 시대 처음 세워진 이 성문은 명(明)나라 초기 재건된 뒤 2001년 2월 춘제(春節, 설)때 폭죽놀이로 잿더미가 돼 복구공사를 한 것이다. 매년 설 때마다 뉴스에서 폭죽놀이로 발생한 중국의 화재 소식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로 인해 천여 년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문화재가 소실됐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온다. 옛부터 군사요새지였던지 정딩성의 창러문 좌우로는 아직도 낡은 토성 성벽 터가 남아있다. 이 남문 밖 서쪽 어딘가에 조자룡의 생가가 있었다고 하지만 풀과 나무만이 무성해 어느 곳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 창러문 주변 조각상
성문을 아래엔 정딩현 출신의 수많은 유명한 학자, 장군들의 동상이 있다고 하나 문이 닫혀 있어 볼 수 없다. 단지, 성문 주변으로 몇 개의 조각상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장식하고 있다.
▶ 자룡광장 한복판에 있는 조자룡 석상
▶ 자룡광장 조자룡 석상 뒷편에 있는 조자룡의 활약상을 새긴 부조
호텔로 돌아오는 길, 정딩현 곳곳에서는 자룡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앞의 자룡대교, 자룡소학교, 조자룡대주점, 자룡광장, 조운(趙雲 조자룡의 이름)路에 이르기까지 조자룡은 마치 이곳 주민들과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듯하다. 특히 자룡광장 한복판에는 조자룡이 한 손에 창을 들고 말을 탄 석상이 지금도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고 외치며 전쟁터를 향해 달려 나갈 것 같은 기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석상 뒤편에는 조자룡이 전쟁터를 누비며 승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택시를 타고 조운사당(趙云祠堂)으로 향한다. 사당으로 향하는 아침의 햇살은 어제의 악몽을 씻어 주기라도 하는 듯 상쾌하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시내버스(1人를/2元) 갈아 타야하는 불편이 있고 택시로 이동하는 게 빠르고 편한 것 같아 택시를 탄다.(7元)
▶ 조운묘 앞에 있는 장판교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는 조자룡 동상
조자룡의 이름을 따서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조자룡 사당 앞에는 장판교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뛰어들었던 조자룡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서늘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 주군의 아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창 하나 들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든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와 깊은 충심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 조운묘(趙雲廟) 조벽
▶ 조운묘 입구 산문을 지키는 말과 부하 장수
▶ 조운묘(趙雲廟) 안내도
▶ 시진핑 주석이 부주석 시절 조운묘를 방문한 기념 사진
이곳 조운묘는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400만 위안을 투자해 청 도광제 때 세운 조운묘 터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8000㎡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사당은 모두 청나라 때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떠 재건했다. 역사 기록에서만 네 차례에 걸쳐 조자룡의 사당이 건설 된 바 있다고 하니 옛 중국인들도 조자룡에 대한 숭배는 지금 못지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도 현 중국의 주석인 시진핑이 부주석 시절 이곳을 방문해 조자룡의 기상을 높이 샀다고 한다,
▶ 군신전(君臣殿) 전경과 군신전 내 조상
1인당 20元의 입장료를 내고 사당 내부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군신전(君臣殿)’이 눈에 들어온다. 줘저우 삼의궁(三義宮)이 삼국지의 명장면 ‘도원결의’의 세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를 모셔놓은 사당이라면 이곳은 조자룡까지 포함해 모두 네 영웅을 모신 곳이다. 군신전 안에는 유비가 가운데 앉아있고 뒤편에 관우와 장비가, 바로 옆에 조자룡이 서 있다. 유비 바로 옆에 관우나 장비가 아닌 조자룡이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는 조자룡이 삼국지에서 화려한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으로 거듭난 듯하다. 실제로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서술했다. 조자룡이 유비로부터 관우와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주고 항상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충직한 신하를 어찌 피붙이같이 여기지 않으랴.
▶ 군신전에서 순평후(順平候)전 가는 길 좌우의 나무들
군신전을 둘러보고 나오니 사람 형상으로 잎을 깎아놓은 나무마다 손에 18반 병기 하나씩을 들고 있다. 18반 병기란 중국에서 18가지 무술을 펼치는데 사용되는 도(刀), 검(劍), 창(創), 모(矛), 극(戟) ,과(戈) 등 18가지 무기를 가리킨다.
▶ 오호전(五虎殿)
▶ 오호전(五虎殿) 내 오호대장군 조상 좌로부터 황충, 조자룡, 관우, 장비, 마초
▶ 오호전(五虎殿) 오호대장군들의 대표적인 전투장면 벽화
18반 병기를 하나하나 살펴가며 길을 걸으면 양 옆 좌우에는 오호전(五虎殿)과 사의전(四義殿)이 있다. 오호전에는 촉한의 대표적인 장수들인 관우, 장비, 조자룡, 황충, 마초 등의 조상과 그들의 대표적인 전투를 그린 벽화가 화려하다.
▶ 사의전 내 조상, 좌로부터 조자룔, 관우, 유비, 장비
▶ 사의전 내 좌우 벽화
사의전엔 유비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우와 장비, 조자룡이 나란히 앉아 있는 조상이 있고 사의전 좌우 벽엔 도원결의와 네 명과 관계된 벽화가 그려져 있다.
▶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순평후(順平候)전
▶ 순평후(順平候)전 내 조자룡 부자(父子) 조상
▶ 순평후(順平候)전 내 조자룡의 활약상을 그린 벽화
▶ 순평후(順平候)전 내 조자룡을 칭송한 글과 시
▶ 순평후(順平候)전 내 상상전고
길 끝 중앙에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순평후(順平候)전이 나온다. 순평후는 조자룡이 대장군으로 봉해질 당시 받았던 시호다. 순평후전에 들어서자 왼편에는 인의(仁義), 오른편에는 상승(常勝)이라 써 붙인 글씨가 있는데 이는 조자룡의 깊은 의리와 충심, 용맹함을 네 글자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후에 사람들이 조자룡이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 용장이었음을 기리며 당시 그가 태어난 곳의 지명인 상산(常山)에서 뒷글자 하나만 바꿔 상승(常勝) 조자룡이라고 불렀다. 사당 중앙엔 조자룡이 은빛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홍색과 금색 비단을 어깨에 걸친 채 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리고 사당 벽 가득히 그려진 그의 활약상을 담은 벽화가 시선을 끈다. 특히 장판교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단숨에 돌파해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오는 조자룡의 당당하고 우렁찬 기세는 마치 벽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조자룡의 용맹함에 대한 장판파 전투 당시 일화가 있다. 이른 아침 조조가 산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데 백마를 타고 흰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칼만 휘두르면 고꾸라지는 병사가 부지기수 아닌가. 그래서 조조는 “저 흰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고 부하는 “상산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조조는 이번에는 붉은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적진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는 “그럼 저 붉은 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부하는 “상산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해가 질 무렵 조조는 또 자색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그럼 저 자색 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더냐”고 물었고 이에 부하는 “역시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이 긴박한 전쟁터에서 하루에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는 장수가 있다니 그 호기가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는 이야기다. 조자룡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적군의 피가 흰 갑옷에 튀겨 낮에는 붉은 색으로, 해가 질 무렵에는 자색으로 보인 것으로 조자룡의 호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설이 아닐까.
▶ 조자룡의 말이 물을 마시던 조자룡음마조(趙子龍飮馬槽)
▶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된 한순평후조운고리비(漢順平侯趙云故里)
이밖에도 조운묘에는 과거 조자룡 생가에서 발견됐다는 우물과 과거 조자룡의 말이 물을 마시던 조자룡음마조(趙子龍飮馬槽)가 정원 한 곳에 보관되어 있고 청나라 광서제 때 조자룡의 용맹함을 기리며 세운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된 한순평후조운고리비(漢順平侯趙云故里)가 정자 안에 보관되어 있다.
▶ 조자룡의 일생을 새긴 비석
常山有虎將 智勇匹關張 (상산유호장 지용필관장) 漢水功勳在 當陽姓字彰 (한수공훈재 당양성자창) 兩番扶幼主 一念答先皇 (양번부유주 일념답선황) 靑史書忠烈 應流百世芳 (청사서충렬 응류백세방) 상산 땅에 호랑이 같은 장수가 있으니, 용맹과 지혜가 관우 장비와 견줄만하다. 한수에서 공훈을 이루고 당양에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이나 어린 주인을 구하고 한 마음으로 선주께 보답하니, 그 충렬함은 역사에 길이 기록돼 후대에까지 영원할 것이다. |
삼국지연의에서 상산 조자룡의 용맹무쌍함과 충심을 묘사한 부분이다.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는 백전불패 용장의 모습, 평생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는 듬직한 신하의 모범상, 그리고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군자의 면모가 역역하다.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조자룡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충심은 깊으나 자만한 관우, 용감하지만 경솔한 장비와 달리 조자룡은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영웅상의 표본으로 본 것이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전쟁터를 누비다가 목욕 중 껄껄 웃으면서 호기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조자룡은 정치적 이해에 의해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다른 인물과 달리 만인이 흠모하고 동경하는 중국인들의 영원한 우상일 것이다.
▶ 한단 츠시엔 가는길
한 시간 반에 걸쳐 조운사당을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들고 업성(鄴城)유적지가 있는 한단(邯鄲)시 츠시엔(磁縣, 자현)으로 향한다. 정딩에서 츠시엔으로 가려면 우선 스쟈좡(石家庄, 석가장)으로 가 한단까지 버스로 이동한 다음 버스를 타고 츠시엔으로 가야 한다. 정딩에서 스쟈좡까지는 시내버스가 다니는데 스쟈좡은 허베이성의 성도로 매우 큰 도시라 버스터미널이 여러 개다. 시내버스를 타고 한단 가는 버스터미널을 물으니 동승한 아주머니가 윈허챠오(運河橋)터미널로 가라고 해 버스를 내려 가르쳐 주는 대로 찾아 가니 터미널 매표소 직원이 장거리버스터미널(長途汽車站)으로 가라한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장거리 버스터미널로 가 한단 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1人/60元) 11시가 넘어 정딩에서 출발해 한단행 버스를 타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오후 1시 반이 넘었고 버스 시간이 임박해 아침에 준비한 빵과 계란으로 점심을 대체 한다. 한단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좀 넘었다.
한단이라는 도시는 무척 오래된 도시다. 이미 기원전 2천여 년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곳으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도 기원전 500여 년 전이라 한다. 조(趙)나라의 도읍으로 무척 번성했기에 물 좋은 곳으로 많이 회자하는 곳이다. 여불위가 당시에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시황의 아버지 되는 자초를 처음 만나 자기의 애첩을 무상으로 주어 나중에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고 그의 아들인 영정이 후에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시황이 태어난 곳이다. 진시황의 아버지인 자초 이인과 여불위의 운명적인 만남이 바로 한단에서 이루어졌고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희가 바로 한단이 배출한 미인으로 원래 그때까지는 여불위의 애첩이었지만, 여불위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내던 진시황의 아버지를 초대해 베푼 연회에서 진시황의 아버지는 조희를 보고 탐내자 함께 술을 마시던 여불위가 일부러 술에 취한 척 상에 엎드려 주는 연기에 속아 자초가 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해 마각을 드러내고 추근거리다가 여불위에게 딱 걸려 식겁한 곳이며 여불위가 애첩 조희를 자초 이인에게 양도하여 그날로 바로 한단에서 황홀하고 아름다운 밤을 지새우며 바로 진시황을 잉태한 곳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있다. 여불위가 애첩 조희를 자초 이인에게 양도하기 전 이미 조희는 여불위의 애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이화접목(移花接木)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하늘이 내린 타고난 장사꾼인 여불위는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하나의 국가에 투자하는 대단한 발상을 한 것이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란 말이 있다. 아주 물 좋은 곳을 일컫는 말이지만, 개꿈이라는 말이다. 노생이란 자가 한단에서 여옹의 베개를 빌려 잠시 잠을 자며 80년간이나 아주 행복하게 지낸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보니 그게 여옹이 누른 조밥을 짓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덧없음을 말하는 게 한단지몽이라는 말로 개꿈을 뜻한다고 한다.
한단 버스터미널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츠시엔으로 향한다.(1人/6元) 40여분을 달려 츠시엔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터미널 앞 호텔에서 방을 구하려는데 외국인 숙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인근 경찰서를 찾아 외국인 숙박이 가능한 호텔을 물으니 메모지에 샹커룽(尙客龍)酒店을 써 주며 택시를 타라고 한다. 경찰서 앞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7시가 넘었다.
▶ 츠시엔(磁縣) 종루
호텔에 짐을 풀어 놓고 지도를 보니 종루가 보인다. 저녁을 먹을 겸 거리 구경도 할 겸 종루 방향으로 걷는다. 츠시엔은 무척 작은 곳이라 걸어간다. 츠시엔에서 유일한 볼거리는 종루다. 종루를 중심으로 주변은 시장이다. 종루는 츠시엔의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크다. 종루가 크다는 의미는 예전에 츠시엔이라는 도시가 제법 큰 도시였다는 뜻일 것이다.
▶ 츠시엔(磁縣) 야시장
종루 구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시장에서 훠궈(火鍋)로 저녁 식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