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무진주의 치소, 무진도독성
근대 광주가 남도의 중심지가 된 것은 23부제가 13도제로 바뀌면서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된 1896년부터다. 1896년 이전 남도의 중심 치소는 나주였다. 고려 왕조를 개창한 왕건이 나주 호족인 오씨 세력과 결합하면서 나주의 위상이 갑자기 부각된 결과였다. 그러나 천년도 훨씬 이전인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는 광주가 남도의 중심지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나눈다. 당시 광주의 명칭은 9주의 하나인 무진주(武珍州)였고, 지방장관인 도독이 파견되어 15개 군을 관할하는 치소가 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가 처음 설치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광주읍지 읍선생조를 보면 문무왕 18년(678년)에 아찬 천훈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된 기록도 있다. 무진주는 이후 경덕왕 16년(757)에 무주로 개편된다. 그리고 주의 장관인 도독이 근무하는 무진도독성이 축조된다. 1910년대에 일제의 만행에 의해 허물어져버린 고려 말 건립된 광주읍성 이전에 무진도독성으로 불린 또 다른 통일신라시대의 읍성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광주에 읍성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어서 역사가 좀먹은 결과이겠지만, 찾아보려는 관심 부족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진도독성은 통일신라시대 무진주의 치소로 현재 광주광역시의 출발이 된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위치나 규모 등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무진도독성이 기록되어 있는 문헌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143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동국문헌비고(1770), 광주목지(1798), 대동지지(1866), 광주읍지(1879) 등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무진도독 때의 옛 토성은 둘레가 2,650보다.”라고 서술된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진도독고성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32,448척이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문헌상의 기록은 현이 주로만 바뀔 뿐 신증동국여지승람처럼 단편적이다.
일단 문헌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진도독성이 고려 말에 축조된 광주읍성의 북쪽 5리에 위치했고,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둘레가 3만 여 척으로 8,253척인 광주읍성보다 컸다는 사실 뿐이다.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것은 지도 동여비고(1682)와 대동여지도(1861)다. 동여비고는 십신사라는 절 왼편에 무진도독고성을,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읍성 북쪽 냇가 건너편에 고읍을 표기하고 있다. 고읍이란 조선시대 읍성 이전의 옛 읍으로 무진도독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진도독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한동안 도독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신라시기의 귀면문양의 암막새와 새 문양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된 잣 고개의 돌로 쌓은 석성이 무진도독성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1988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잣 고개 성은 무진도독성이 아닌 무진도독성의 배후산성으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광주광역시의 출발이 된 무진도독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1994년부터 무진도독의 치소였던 옛 성터에 대한 발굴 성과가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그 구체적인 위치가 확인되기 시작한다. 1994년 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는 누문동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와 기와 조각을 찾아낸다. 특히 건물지는 광주 시가지의 핵심도로인 충장로와 평행하면서 접해 있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충장로를 포함하는 도로망이 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02년에 나온 광주읍성유허지표보고서는 고려 말에 건립된 광주읍성이 무진도독성의 격자형 가로망 위에 축조되었음을 밝힌다. 무진도독성은 9주 5소경이 설치된 경주나 남원의 읍성처럼 격자 가로망 구조였다. 즉, 고려 말에 조성된 광주읍성이 이 격자 가로망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에 네모난 모양이라는 것이다. 고려 말에 건립된 광주읍성은 4대문이 있는 사각형 모양의 읍성이었다. 즉 동문인 서원문은 대의동 옛 광주문화방송국 옆 사거리, 서문인 광리문은 황금동 옛 광주 미문화원 부근 사거리, 남문인 진남문은 광산동 옛 광주시청을 지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가는 사거리, 그리고 북문인 공북문은 금남로 4가 충장 치안 센터 앞 사거리였다. 그 4대문을 경계로 해서 사각형으로 쌓아진 성이 광주읍성이었다. 그 읍성의 중심도로가 남문과 북문을 잇는 대로, 즉 지금의 충장로다. 전남대 김광우 교수도 무진도독성의 격자형 시가지 일부에 석성을 쌓은 것이 광주읍성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는 무진도독성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분명히 확인시켜준다.
이처럼 격자형 가로망 및 건물지와 통일신라시대 출토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무진도독성이 충장로 일부를 포함한 누문동, 북동 일대임을 암시한다. 이 위치는 이미 소개한 조선조의 문헌의 북쪽 5리에 있다는 기록이나 고지도인 동여비고 및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위치와도 일정 부분 일치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여러 사찰 터에 남아있는 석탑이나 석불 등도 위치를 비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9세기의 동구 지산동 5층 석탑은 백천사지의 유물이고, 증심사의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옛 도청소재지의 대황사지 유물로 추정된다. 평지에 위치한 이 사찰들은 그 사찰들로 둘러싸인 광주의 도심지가 당시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무진도독성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진주에 최초로 파견된 도독은 문무왕 18년(678)의 아찬 천훈이다. 이후 신문왕대를 거쳐 경덕왕 16년(757)에 무주로 개편되는 것을 보면, 이 무렵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흙으로 쌓은 지상의 읍성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1915년에 제작된 광주시가지 지적원도에 새겨진 격자 모양의 가로망은 놀랍게도 천년을 넘는 세월을 이어오며 천년 고도 광주의 역사적 징표가 되고 있다.
무진도독성은 광주가 남도의 중심지가 된 시점이 도청소재지가 된 1896년이 아닌, 7세기말부터임을 알려준다. 무진도독성에서 시작된 광주의 도심지는 고려 말 조선시대 광주읍성을 거쳐 오늘 인구 150만의 거대도시로 발전한다.
무진도독성의 배후 산성, 무진고성
산수동에서 전망대를 지나 4수원지로 넘어가는 길목을 잣 고개라고 한다. 이 고갯마루의 좌우 산기슭에 새롭게 복원된 돌로 쌓은 성이 있다. ‘무진주 시대의 옛 성’이란 의미를 지닌 무진고성이 그것이다.
잣 고개 성은 한동안 무진도독의 읍성인 무진도독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향토사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된다. 실제로 1986년 광주일보 향토문화연구소와 향토문화개발협의회 회원들이 지표 조사한 결과 ‘國·官·城·京(국·관·성·경)’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과 경주 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가릉빈가의 변형으로 추정된 새 문양(왕벌문양으로도 봄)의 수막새, 귀면 문양의 암막새 등을 발굴한다. 더군다나 주변마을 사람들은 성터 너머 마을을 도독골이라 부르고 있었다. 도독골은 도독고을이며, 우리말 고어 잣은 ‘城(성)’으로 잣 고개는 성 고개이다. 그러므로 잣 고개의 성터는 바로 무진주 도독이 근무하는 무진도독성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탄력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진고성은 무진도독성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무진도독고성을 언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현의 북쪽 5리에 흙으로 쌓았다.” 혹은 “주의 북쪽 5리에 쌓았다.”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무진도독성은 조선시대 읍성으로부터 북쪽 5리에 위치하며, 토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진고성은 방향과 거리에서 전혀 맞지 않고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 실제로 1988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무진고성은 총 길이 남북 1킬로미터, 동서 500미터, 둘레 3천 500미터의 타원형 구조의 성으로 판명된다. 동·서·남·북문 등 4대문이 있었고, 성 능선에 17개소에 이르는 건물터, 성 안에 5개소에 이르는 건물터가 발견된다. 그러나 전남대박물관은, 무진고성은 토성이 아닌 석성이며 출토 유물 중 무진도독성임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유물이 없어 무진도독성터로 볼 수 없다고 발표한다.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이 설치된 남원, 김해, 공주 등지에 산성이 있었음을 감안해보면 잣 고개에 위치한 무진고성은 유사시에 대피하여 장기간 농성할 수 있는 무진도독성의 배후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