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소설 감상비평-이 명희
작가가 베이비부머 세대라 소설의 눈높이에 믿음이 갔다. 여성의 권위를 위해 총알받이 된 만큼 세간의 관심과 페미니스트를 대변하고 있다. 소설을 90년대가 아닌 2018년 이후에 집필했다면 본인의 감정적인 성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성이 당하는 성적폭력 및 여성의 맞벌이 문제의 난항을 여자와 남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여자들이 처한 현실
90년대에 앞서가는 남편들은 아내가 맞벌이하기를 원했다. 친정엄마가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조신이 있다 시집가야 한다.”고 음악교습소를 계약하는 날, 밤 8시에 맞선을 보게 했다. 여자가 사업을 하면 팔자가 세진다고 일을 못 하게 하려는 처사였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남자의 보호를 받고 싶으면서도 일하길 원하는 이중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 반면 맞벌이를 조건으로 거는 남자에겐 희생할 가치가 없다고 결혼대상에서 제외했다. 자의적인 것과 타의적인 것의 차이라고 할까, 결혼하고 아내가 일을 갖는 것에 못마땅한 경우는 보수적인 부모 세대와 일부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편견일 뿐 긍정적인 사람들이 더 많다. 소설 속 혜완의 일에 대한 욕망은 사고로 애를 잃은 사건만 아니면 문제가 될 수 없다. 경환이 오히려 고루한 남편이라 부부갈등의 소지가 충분하다. 시댁의 금전적 보조가 장점이긴 해도 자기의 능력을 썩히고 싶지 않았던 절실함은 죄가 아니다. 요즘 워킹맘은 시댁의 도움을 받았다고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다. 맞벌이가 필수인 현대의 풍경이다. 90년대는 주부로 사는 걸 당연히 여겼고, 부부의 성폭력이나 연애폭력은 수치로 여겨 은폐했었다. 지금처럼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혜완이 남편한테 당한 성적폭력. “무엇이 이 폭력 앞에서 여자들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혼 무렵 남편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폭력이 혜완의 살갗으로 기억보다 먼저 돋아났다.” 폭력은 학벌. 직업. 교양과는 무관하다. 상대의 자라 온 환경이 더 지배적이다. 거부할 수 없이 당한 수치스러움이 어쩌면 그녀가 이혼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아직도 여자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가정폭력은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는 성폭력이 대부분이다. 현대의 여성들은 안팎으로 일하고,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전천후 여자로 살고 있다. ‘미투’의 물결을 보니 여권이 신장한 건 확실하다. 이제야 여성들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엔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했다고 이혼당한 사례도 있었는데, 이제는 과거에 당한 성폭력과 성희롱을 고발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여성의 사고를 능동적이고 탄력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본다.
*어떻게 살아야 현명한가!
혜완이 사고로 자식을 잃었지만, 운이 나빴던 거라 생각된다. 맞벌이가 어디 한두 명인가! 중요한 건 자식을 다 키우고 난 후 달라진 나의 가치관이다. 엄마와 자식 간의 상호작용은 커서도 인성에 영향을 준다. 의지만 확고하면 혜완은 늦게라도 소설을 쓸 수 있다. 나는 일찌감치 맞벌이를 했는데 장점은 경제적 안정이고, 단점이 더 많았다. 당시 혜완은 급하게 돈을 벌어야 할 만큼은 가난하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는 자식 교육에 손실이 크다. 형편이 어려우면 모를까, 본인의 성격이나 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자식의 양육시기를 놓치거나 방치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세 여자. 자아가 강한 여자, 희생을 자처하다 무너진 여자, 현실적인 여자의 표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은 여자들의 문제점을 복선으로 깔고 있다. 맞벌이로 인해 파생될 부부 문제. 자식들에게 줄 상처는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모성. 영선은 도태된 자신을 비관하여 자살을 최선으로 생각했고, 자존감이 바닥인 것을 회복하려거나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방법은 찾지 않았다. 우울증은 자신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는 위험한 병이다. 현명한 여자와 우매한 여자의 차이는 자기의 늪에 빠지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결혼생활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편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지 말며, 부모 된 책임으로 자녀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현명하게 산다. 육아를 공동으로 책임지고, 가난해도 질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서로를 원망만 하고 살던 옛 부모들의 삶과 대조적이다.
*남편과 아내가 윈윈하는 방법
보기에 딱한 여자 중에 ‘남편-바라기형’이 있다. 맞벌이해 온 나로서는 생일을 기억 못 한다고, 꽃이 없다고 슬퍼하는 여자들을 보면 답답하다. 기억하도록 달력에 표시하던가, 직접 꽃이나 선물을 사면 될 것을, 공주도 아니면서 왜 공주처럼 사는지 모르겠다. 사십엔 감정을 다스리고, 오십엔 남편과 친구가 되고, 육십엔 남편을 불쌍히 여길 줄 안다면 이미 성숙의 궤도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잘나가는 남편들을 보자. 그들은 자기의 위치만큼 아내도 지적 수준이 상승하기를 바란다. 이건 순전 여자의 몫이다. 영선은 가정에 안주해 살림과 아이들 돌보기를 남편 공양의 최선이라 생각했다지만 그건 자기합리화다. 잘나가는 남편에 만족했고, 영웅적으로 내조도 즐겼다. 남편의 사회적 반경이 넓어지자 자신이 능력을 갖추기엔 현실의 갭이 큰 것을 느끼고,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분노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혜완. 영선. 경혜 셋 중 현실의 적응을 잘하고 있는 여자는 경혜다. 그렇다고 경혜의 모든 면이 옳다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경혜는 교양이 없고 된장녀 기질도 있지만, 혜완이처럼 자존심만 강하고 영선처럼 원망이 많기보다는 자신의 신세를 덜 볶는 편이다.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 눈감아 줄 뿐, 그렇다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깨인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가 수동적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내가 순종적이고 감정적으로 살기보다 자신의 발전을 위해 지혜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식들도 결혼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다. 부모의 삶이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는 당신들만 희생했다고 하소연한다. 자식 세대는 왜 어리석게 사냐고 한다. 요즘 남편들은 징징거리는 아내보다 능력이 있어 맞벌이하며, 뒤끝이 없는 술친구 같은 아내를 선호한다.
예전부터 딸에게 “능력은 키우되, 아무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요즘 청년들에게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라고 한다. 작가 공지영을 센 여자라고 수군대지만, 여자들이 남자보다 똑똑하면 강하다, 세다, 라고 치부하는 사회의 이면에 비겁한 남자들이 있어, 칭찬보다는 험담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작가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살아가기엔 아직 환경이 척박하다. 또한 신념이 강한 여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풍토도 남아있다. 똑똑하다는 것과 지혜로운 것은 다르다. 똑똑한 여자든 지혜로운 여자든 나이가 들면 심간이 편안해야 한다. 작가는 여자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대항하느라 부딪치고, 넘어지고, 사나워질 만큼 힘들었을 것 같다. 젊을 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당당한 여자로 살아가는데 도전은 되겠지만 살면서 깨닫는 것이 혼자서 가는 길보다 여럿이 가는 길이 지혜도 얻고 의지도 되는 것 같다. 뾰족한 자아에서 둥글둥글해진 성품이 되면 굳이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권을 위해 앞장서는 페미니스트도 존재해야 한다. (2018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