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여,
나는 날마다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하여 읊조리는 내 생명의 찬송가입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전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전달하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표출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이 알아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느끼는 것을 그도 느끼게 해 주세요. 그러나 그의 마음이 나처럼 아프지 않게 하세요."
나는 기도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끼기 바라는 것은 좀 야박한 타산이나 욕심같이 생각되기도 하고 너무 조건적이겠지요.
그래서 나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다시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것은 인간의 사랑이며 한 여자의 사랑이며 더구나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의 사랑입니다.
나는 곧잘 사람의 얼굴에서 동식물의 얼굴을 찾아내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 여자는 튤립 같고 저 여자는 모란 같다."
"저 남자는 너구리 같고 저 남자는 호말 같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찾아낸 것은 맹수나 야수가 아닙니다. 초식동물의 얼굴입니다.
당신의 모습에서는 사슴이나 기린·노루·학 같은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끝없는 동경의 시선, 당신의 근간을 쥐고 있는 숙명적인 고독, 그 고독이 잔잔히 뿌리 뻗을 수 있는 평화와 안녕을 나는 사랑합니다.
당신의 청정한 목에 반짝이는 한낮의 일광을 눈물겹게 바라보며 용납과 이해와 신뢰의 뒤통수를 나는 좋아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내 감정과 이성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견제하며 숙고하면서 조심스럽게 내 가슴의 파도를 거느립니다.
나는 내 사랑이 속되지 않게, 추하지 않게 내 동체를 추세우며 그리함으로써 내 생명이 날로 아름답게 연소하고 비상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바라보는 내 시력의 범주 안에 순수의 나무가 자라고, 억만년이 가도 우리들의 관계에서 권태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움도 싹도 보이지 않게 되기를, 실망이 없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들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되돌아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내 발자국은 내 생애 전 질량의 정성과 묵도로서 여기 머물러 있겠습니다.
당신이 언제고 나를 알아보고 찾아오실 수 있게 나래짓하며 서 있겠습니다.
유원한 시간에 떠밀려 내가 저쪽 강 언덕에 홀로 남아 표박하게 된다 하여도 나는 지난날을 지난날"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지난 일이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스럼없이 내왕하며 공존하는 초시간적인 공간이 나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회억의 즐거운 간수이며 기다림의 명수이며, 그들의 숙명적인 친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지 못합니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의식하고 주저하며 겁을 내며 체념하며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걷는 사랑의 길은 아득히 멀고 희망이 희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나는 당신에게 속일 것이며, 절망 속에 나를 던져 부서지는 어둠을 응시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는 크고 작은 그림.
어느 배경에 혹은 원경으로 혹은 근경으로 당신이 스쳐 지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당신의 깊어가는 머리 숲에 무심히 날아와 앉는 티, 검불 하나에도 나는 떨리는 애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담담히 지극히 의젓하게 나는 걸어갈 것입니다.
단호하게 말할 것이며 냉정하게 판단할 것입니다.
끝끝내 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대여,
우리가 죽어서 환생의 요요한 길거리에서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