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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일 돕기
□우리집 환경------------------------------
당시 대개가 그랬지만 몰락 양반가들의 자손들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본 징용으로 6.25때 보국(급)대로 몸둥이 하나로 돈을 꽤나 많이
벌었다고 하나 효심 하나로 부모님 모시는 큰아버지에게 다 부쳐드렸고,
영리했으나 부지런하지 못한 큰아버지는 그 돈을 다 써버려 결국 두 주먹으로
장가가서 밥그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장수촌으로 유명한 영천이씨 집성촌인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서 태어나
결혼 후 정착한 곳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십리 벚꽃과 쌍계사로 유명한 운수리
신촌에서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며
부지런히 일하셨고
어머니 역시 지리산을 해메며 호랑이도 봤고 멧돼지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많은 채취활동으로 논과 밭을
사 모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장수촌의 당몰샘
나에게 형님인 큰아들이 인물도 출중하고 머리도 좋아 산촌에서 썩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고생을 각오하고 순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차관급까지 오른 형님으로 인해 그 기대는 충족하셨지만 부모님 입장에선 안해도 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
농사만 짓던 분들에게는 도시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큰아들에 대한 기대에 따른 이런 부모님들의 고생이 나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만약 이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난 촌에서 적당히 초등학교 마치고 대강 밥 먹고 사는
범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화개 다랭이 논 많이 팔아봤자 순천에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 한 채 사고나니 겨우 논 다섯 마지기
장만한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우리집엔 밭이 없었다.논 다섯 마지기로 학교 보내고 먹고 살 수가 없었기에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만드셨던 문종이를 화개에서 떼다 5일장인 순천장과 광양장을 오가며 팔았고 그 틈틈히
양송이 공장을 다니는등 노동 품을 팔면서 농사도 지었다.어머니 역시
달비(여자들의 긴 머리를 사서 가발가게에 납품하면 그것으로 가발을 짜서 일본에 수출)장사를 비롯
옷가지를 팔러 다니는 방물장수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그래야 7남매를 먹여 살릴 수 있었고
희망대로 형을 출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군대도 줄을 잘 서야 하지만 우리집을 보면 자식도 태어난 순서가 좋아야 되는 것 같다.
부모님이 고달프도록 뛰어봤자 경제력은 항상 한계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 위의 누나와 내 바로 밑 남동생이 희생이 됐다.
학비 관계로 하나씩 띄워서 진학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
그 아래 남,여 동생들은 형님이 결혼하고 내가 돈을 벌게되어
조금씩 도와 모두 대학교까지 나올 수 있었지만 누나와 바로 아래 동생은 진학을 못했다.
형에 대한 기대로 난 항상 집안일,농사일에 동원 1순위였다.
부잣집에서 아무리 비싼 과외를 시켜도 못들어 간 순천중학교였고 동부2시6군 센터학교에서
광주 서중이 무시험제로 바뀌어 전남 제1의 중학교가 되었던 순천중학교라 전라남도의 인재들이
다 모였기에 피 터지게 공부해도 될지 말지 하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일손을 돕는 게 나의
우선 임무였다.그러니 중학교때도 시험기간이든 뭐든 상관없이 농번기에는 일을 도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인 내가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아마도 아버지는 심심해서도
나를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난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아야 하는데 가자고 하면 거절도 못하고 인상 박박 쓰면서 따라 다녔다.
□ 보리농사 돕기-------------------
겨울엔 보리를 밟아줘야 한다.우리 논 뿐 아니라 학교에서 단체로 인근 논에 보리밟기에 동원된 적도 있다.다음 보리가 조금 큰 이른 봄에는 북을 해 줘야 한다.나는 논 도랑의 흙과 잡초를 괭이로 파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뒤에서는 아버지가 삽으로 그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보리 사이사이에 붓는다.
보리보다 작은 잡초를 묻으면서 겨울 서릿발에 들 뜬 보리 뿌리를 덮어 보온효과와 뿌리 안착을 도와 주려는 조치이다.그 일을 하면 조그만 허리가 왜 그리 아팠던지..
더군다나 들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정말 싫었다.그러니 한 시간만 지나면 집에 가고 싶어
“저걸 언제 다해요? 그만 갑시다”하고 졸라댄다.
그러면 아버지는 항상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다.남은 것을 보지말고 손으로 일만 해라”
하셨다.쉬는 시간은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실 때 같이 쉬었고 막걸리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할 때
좀 오랫동안 쉬는 셈이다.술집이꽤나 멀었기 때문이다.
보리가 패면 깜부기를 뽑으러 간다.보리 사이사이에 큰 독새풀도 따로 베어 도랑에 두면 거름이 되고 일부는 담아와 돼지도 주고 토끼도 준다.가끔은 무자수라는 독 없는 뱀을 보기도 했는데 독이 있으나 없으나 징그러웠고 그 때는 뱀을 보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가능한 한 죽였다.
힘들 때면 애매한 개구리를 잡아 못살게 하거나 패대기를 쳐 죽였으니 참 정서적으로나 의식 수준이 후진적이었던 것 같다.아마 누구나 다 그랬을 것이다.개구리도 왜 그렇게 컷던지~~
“6월이 오면” 사람마다 생각나는 것도 많을 것이다만 난 6월6일 현충일이
싫다.뻐꾸기 소리도 정말 듣기 싫다.
생각조차 하기싫은 옛생각이 나기
때문이다.풋보리를 베어 구워 먹는
망종은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대개 현충일이 공휴일이므로
우리집에선 그 날 보리를 베었다.
그 때가 5학년 실과 책에서 배운
황숙기다.날씨는 더운데 먼 산 뻐구기 소리는 더 덥게 한다.
못살던 시대라 먹는 게 시원찮아 일찍 지치는데 날이 더우면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힘이 빠지는데 껄끄러운 보리 까시는 허리 굽혀 벨 때 얼굴 높이와 같아져 얼굴을
찌르게 된다.땀 범벅 얼굴을 보리가시가 찌르면 정말 짜증이 나는데 화풀이 할 곳이라고는 개구리나
벌레들 밖에 없으니 들고 있는 낫은 그것들에게는 바로 흉기가 된다.
베어놓은 보리를 묶는 것도 신경질 나는 일이다.보리가시가 팔목주변을 찔러 나중엔 벌겋게 되고 씻으면 무척 쓰리다. 거기까지도 괜찮다.보리 운반하는 것, 이것이 죽음이다.
집이 가까운 논에서는 발동기와 타막기(탈곡기)를 가져와 논에서 직접 타작하여 알곡과 보릿대로
구분해 옮기는데 우리는 집이 멀어 어차피 운반 거리가 멀므로 보리다발로 운반해야 되는데
큰 길까지 옮겨 놓으면 리어카로 실어 동네 방앗간으로 가져 온다.
논에서 큰길까지 논둑길과 조례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냇물을 하나 건너 약3~400 미터를 날라야
하는데 아버지는 10여 다발씩 지게로 날랐고 난 지게도 없지만 지게질을 안해봐서 보리 3~4단씩을
새끼 멜빵으로 져 날랐다.보리가시는 살에 붙으면 잘 안떨어지는 습성이 있다.
또 옷 속으로 들어가 가려워 몸을 뒤틀면 더 파고 들어간다.
그러니 땡볕에 보리가시와의 싸움?생각만 해도 지겹다.
이런 힘든 노동으로 얻은 보리를 삼시세끼 지겹도록 주식으로 먹고 컷다.
그러니 보리에 대한 인식이 좋겠는가?
요즘 추억을 생각하고 건강을 생각한다며 보리밥집에 많이 가는데 난 절대 안간다.
피치못해 가더라도 반드시 쌀밥을 먹는다.
그 때는 보리밥도 없어 대부분 농가에서는 점심은 고구마로 먹거나 아예 굶는 집도 많았다.
우리집은 부모님 덕택에 삼시세끼 꼬박 먹고 살았지만 주로 꽁보리밥을 많이 먹었다.
정부에서 혼식분식을 장려하던 때였지만 우리에게는 혼,분식이 생활화 됐던 때였다.
보리타작은 벼와는 달리 보릿대를 포함한 전체를 탈곡기 속으로 넣어버린다.
야외에서 타작할 때에는 기름으로 돌아가는 발동기에 피댓줄로 탈곡기를 연결하여 보릿대를
한 묶음 들고 열매 부분을 일단 돌려가며 털어낸 다음 통째로 집어 넣는다.
알곡은 무게가 있어 앞으로 떨어지며 쌓이고 보릿대는 가벼워 기계에서 나는 바람에 의해
멀리 날아간다.보리가시가 날리고 먼지가 날려 더위를 무릎쓰고 눈만 내놓고 다 가려도 먼지가시가
목덜미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괴롭다.
□ 벼농사 돕기-------------------
보리를 베고 나면 곧바로 논을 갈아 엎고 물을 댄다.모내기를 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론 보리논 옆에 못자리는 이른 봄부터 만들어 옮겨 심을 수 있을 만큼 모가 자라 있다.
며칠간 물을 대 놓고 물기가 흙 속으로 충분히 스미도록 한 다음 모 낼 날이 가까워 오면 써래질을
하여 바닥을 고른다.쟁기질이건 써래질이건 모두 소가 도와줬다.
이럴 때는 우리 어린애들이 할 일이 없다.산에 가서 잎이 무성한 도토리 나무나 풀을 베다가 논에
뿌려 거름이 되도록 하는 일도 대개 어른들이 했다.
써래질 하는 모습
모내는 날은 분주하다.잔칫날 같다.전날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잔뜩 사온다.
마치 그날 하루 먹고 죽을 것처럼 잔치수준의 부식을 만든다.양도 많이 한다.
모내기를 할 때는 여자가 많이 필요하다.남자는 못줄 잡는 사람 세 명,모를 공급해 주는 사람
한,두명이면 된다.대개 품앗이로 한다.아침이면 선수급 아주머니들이 못자리에서 모를 찐다.
전 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둑을 맞는 경우도 있어 웬만하면 당일에 한다.
지푸라기를 한 줌씩 허리띠처럼 매고 가서 일정 크기로 다발을 만들어 지푸라기 하나씩 빼서 묶는다.이것이 끝나면 아버지는 발대를 얹은 바지게에 물이 줄줄 흐르는 모다발을 잔뜩 얹어 써레질을
해놓은 논으로 가서 적당한 간격으로 던져 놓는다.못줄은 일정 간격으로 빨간색 실이 묶여져 있는데 논 가운데로 한 줄,양쪽으로 각각 한 줄씩 고정시켜 놓고 세 사람이서 못줄을 잡는다.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 주는 게 제일 숼하기 때문에 중학생 때에는 내가 잡았다.
양쪽에서 못줄을 잡는 사람은 노래도 하면서 여자들이 모를 다 꼿았는가를 보면서 일정 구령신호를
해서 일정 간격으로 옮겨 주는데 심어놓은 모를 다치지 않게 하고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간격을
맞춰야 하기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전라도 여자들의 모내는 솜씨는 전국에서 으뜸이다.
모를 심을 때면 손이 안보일 정도고 물소리가 ‘쪽쪽쪽’ 일정 간격으로 즉 기계적으로 났다.
그래서 1모작으로 2모작을 하는 남부지방보다 먼저 모내기를 하는 경기도 쪽에서 모를 심을 때
전라도에서 여자들을 사갔다.전라도에서는 모심는 일은 남자가 하지 않지만 경기도에 가면
남자들이 모를 심는다.대신 벼 베는 것을 여자들도 한다,
전라도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낫질을 하는데 말이다.
모를 심을 때 가장 신경 쓰이는 게 거머리들이다.
거머리가 못 물도록 스타킹을 신은 것은 한 참 후에 일이고 당시에는 맨살로 견디며 수시로 제거를 해야 했다.거머리가 문 장단지에는 지혈이 안 돼 피가 계속 흐르고 피냄새를 맡은 거머리들은
계속 달려들고 그렇게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점심을 먹을 때는 동네 잔치가 벌어진다.밥은 평상시 할아버지나 아버지,큰 형이나 먹어보는 먹어보기힘든 쌀밥이다. 반찬도 서대를 넣은 미역국에 꽃게탕에 고막무침,조기나 갈치 지짐 등
진수성찬이다.그리고 인부의 가족들이 다 와서 먹는다.논 일을 하느라 집에서 밥을 챙겨줄 시간도
없어서겠지만 쌀밥에 진수성찬을 이 때나마 자식들에게실컷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모를 심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나면 뜬 모 꼿으러 간다.’뜬 모’란 심을 때 옆사람과 보조를
맞추느라 속도를 내다보니 제대로 심지 못한 모가 물위로 뜨게된 것이다.이것들을 바로잡아
꼿아줘야 제구실을 하게 될 것 아닌가.이 또한 심어놓은 모를 보호해야 하므로 우리 같은 애들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다만 심심하니까 데려가는 것이다.
난 따라가서 논 주변을 서성거린다.우리 논 뿐만 아니라 남의 논도 둘러 본다.
겨울 내내 땅속에서 월동을 한 우렁이들이 물을 잡아놓은 논에 많이 나와 있다.
산란을 하여 새끼들도 많다.이것들을 잡아 모아오면 어머니는 살짝 삶아 껍질을 베껴
초무침을 해 주시는데 막걸리 안주로 일품이요우리들도 밥 반찬으로 맛있게 먹었다.
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논을 매야 한다.
그 때는 제초제가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벼 사이를 헤집으면서 손으로 잡초를 뽑아 한 줌이 되면
논 뻘바닥에 발로 꾹 눌러 묻어 버린다.
논을 매기 위해 엎드리면 벼의 크기가 딱 얼굴 높이가 된다.
날카로운 잎 끝에 얼굴이 씻기게 되어 세수할 때 쓰라린다.
내가 고학년 때 나온 것이 죽죽 밀고 다니는 제초기였다.
그것이 나오고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내가 97년도에 백두산 갔을 때 연변 용정과 회령의 농촌을 보니 초등학교때 우리나라 농촌과
흡사했다.모두가 엎드려 논을 매고 있었다.
비포장 도로와 포플러 가로수, 느릿느릿 가는 소구루마가 완죤히 60년대 우리 농촌과 같았으니
30년정도 뒤졌다고 봐야하나?말그대로 ‘슬로우 시티’였다.
농약을 치는 것도 고학년 때 마력이 센 엔진 기계가 나왔지만 저학년 때는 쇠로 만든 통에다
농약을 타서 메고 다니면서 펌프질로 뿌렸고 멸구 방지를 위한 가루약은 자루에 하얀 가루약을 넣어 막대기로 털고 다녔다.위생보건 관념이 없던 우리 부모님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남 하는 대로 하다가 농약중독 사고를 많이 당했다.
한여름에 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물을 잡아놓은 논에는 송사리,피라미는 물론 새끼 붕어들이 많았다.높이가 있는 논둑 물고에 모기장으로 만든 자루를 대 놓으면 밤새 붕어,미꾸라지는 물론 개구리
심지어 물뱀까지 잔뜩 들어가 있다.그것을 거둬다 돼지나 닭에게 삶아서 주면 아주 살이 잘 올랐다.오염되지 않았기에 논에서 많은 생물들이 같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농업기술의 낙후로 소출은 지금의 반도 못됐다.그래서 항상 농민들은 힘들었다.
들판에 벼가 익으면 공기에 묻어 오는 냄새가 고소하다.황금물결을 이룬 들녘을 보는 농부들은
그야말로 안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할만큼 뿌듯했다.하지만 나같은 어린애들에게는 그저 귀챦은
일거리일 뿐이었다.
벼를 벨 때는 그나마 습도 없는 햇볕이라 기분이 괜찮다.논이 적어 놉을 얻을 수가 없어 벼를 벨 때면 형을 제외한 온 가족이 다 달라 붙어 벤다.낫을 숫돌에 갈아 주시는 것은 아버지 몫이다.
요령을 배운 후 조막 손이지만 두포기씩 잡고 싹뚝싹뚝 벴다.
아버지는 네포기 어머니는 세포기씩 베어 나갔다.
농사일을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날씨가 아무리 시원해도 금방 땀이 난다.
허리도 굽혀야 하고 평소 안쓰던 근육으로 낫질을 해야 하니 금방 피곤해 진다.
짚이 될 잎사귀들이 가끔 얼굴에 부딪혀 쓰라리지만 견딜만 하다.
다섯 마지기를 가족끼리 베자니 어머니는 밥한다고 동생 데리고 좀 일찍 가시면 나랑 아버지만
남아 일을 하게 되는데 일교차가 큰 가을 해거름 때가 되면 쌀쌀하고 장단지나 팔뚝은 허옇게
변하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난다.피곤도 하고 춥고 배고프고 정말 죽을 맛이다.
그 때부터 빨리 집에 가자고 아버지를 조른다.
하지만 아버지 목표량이 있어 쉽사리 일이 끝나지 않는다.
결국 달이 중천에 떳을 때서야 끝내면 이젠 추워서 걷기조차 싫어진다.
논둑길을 따라 오다 보면 김장용 무우가 달빛에 허옇게 속살을 내어놓고 있다.
가을 무우는 크고 시원하고 맵지않고 맛있다.
때 낀 손톱으로 껍질을 까 베어먹으면 정말 맛있다.
한 뿌리를 다 먹을 때 쯤이면 신월 앞 냇물에 이른다.
싫지만 손발을 흐르는 냇물에 씻고 이빨 부딪히는 추위를 잊기 위해 뛰기도 하고 부지런히 걷기도
해보지만 밤길은 무서워서 아버지 곁을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볏단도 보리 나를 때처럼 큰 길로 지고와 집으로 옮긴다.집에다 일단 높게 낮가리를 만들어 쌓는다.비가 올 것에 대비해서 밑바닥에는 장작 등으로 깐다.농사가 많은 사람들은 반수동인 페달을 밟아
돌리는 기계로 탈곡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집은 홀태로 불리는 도구를 이용해 어머니와 놉으로
온 동네 아주머니 서너명이서 완전한 수작업으로 벼를 털어냈다.
난 다 털어낸 집을 다발을 만들어 다시 뒷곁으로 옮겨 낮가리를 쌓는 일을 도왔다.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우선 돈이 궁하니
매상이라는 것을 했다.
지금이야 모두가 기계화 되어 기계로 베어
당일 건조기를 거쳐 쌀로 만들고 포장까지
해버리지만 그 때는 모두가 털어서
햇볕에 말려 정해진 날에 매상을 해야 했다.
마당에다 덕석을 깔고 바짝 말려 일정량으로
가마니에 담아 신대마을에 있는
왕조동사무소 옆 합승 종점 마당으로
가져간다.그러면 농림부 직원이 완장을 차고
샘플을 채취하는 도구로 가마니를 푹 쑤셔 벼를 뺀다음 육안으로 살핀 후 등급을 메긴다.
막대기에 달린 등급표시 도장으로 망치질 하듯 가마니에 등급을 표시해 준다.
희비가 엇갈리는 것은 그 감독관 맘이다.
매상을 하는 날이면 그곳이 장터처럼 북적거린다.소구루마,말구루마,리어커등 운반 도구는 다
모이게 된다.모처럼 돈을 만지는 날이라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노고를 푸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 이삭줍기--------------------
우리는 밭농사가 없었기에 밭에서 생산되는 부식이 귀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먹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여름엔 목화나무나 콩나무 사이로 뿌려서 거두는
열무김치를 먹기가 힘들었는데 다행히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침술로 침을
놔 주면 무우 한,두 단씩 갖다 주는데 그 때서야 김치 맛을 보게 된다.고구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촌 사람들은 돈이 귀해 침을 맞으러 올 때면 돈대신 고구마 한바구니 무우 몇단을 갖고 온다.
당시는 이웃에 상을 당하거나 다른 잔치를 해도 성냥 한 통,소주 한 병,좀 과하게 쓰시는 분은
정종 한 병, 이런 것들을 들고 갔다.
명절 때도 당원,소다,미원,식용유 이런 것들을 들고 인사하면 대 환영이었다.
밭이 없는 우리집에서는 고구마도 맘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가을이면
고구마 이삭을 줍는다.
고구마를 캔 밭에 호미와 걸대바구리를 들고 가 다시한번 고구마 캔 곳을 파
나가면 가장자리에 있던 것,캐다가 뭍힌 것,못보고 못캔 것등이 나온다.
특히 주인이 고구마를 캔 지가 좀 오래된 밭에는 새순이 돋아 고구마가
‘나 여기 있어요’하고 표시를 해 줘서
캐기가 쉽다.
이렇게 한두 개의 밭을 뒤지면 바구니로 하나씩은 쉽게 구했다.
당시에는 도시의 가난한 아주머니들이 자루를 갖고 다니면서 전문적으로 이삭을 주워가 먹기도 하고 팔기까지 했다.하지만 아직 캐지않은 남의 밭에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이삭 하면 또 생각나는 게 보리이삭,벼이삭 줍기다.
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업중심의 사회였다.
해서 농촌에 있는 학교의 학사일정은 농사일정에 최대한 맞춰 운영하게 된다.
그래서 보리 벨 때와 모심기를 할 때 3~4일정도 농번기 휴가를 주고, 가을철 나락(벼)을 벨 때
2~3일간 농번기 휴가를 준다.하지만 공짜가 아니다.
반드시 이삭줍기를 하여 학교에 작은 되(소싱되,1리터 들이)하나에서부터 큰 되(대싱되,2리터
들이)한 되까지 학년별로 목표량을 주어서 곡식으로 내도록 의무를 부여한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거둬들인 곡식을 팔아 도서관에 책을 구입하고 화단에 심을 묘목을 구입하기도 했다.못사는 나라에서 예산이 부족하니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삭줍기인데 농사가 많은 집에서는 그나마 얘들 일시킨 삯으로 탈곡해 놓은 곡식을 주는데 나처럼 농사가 적은 애들은 실제로 논마다 다니면서 이삭을 줍기도 한다.
베면서 묶으면서 흘린 이삭을 줍는데 정말 하기 싫다.
특히 보리이삭은 덥고 껄끄럽고 해서 싫벼이삭은 이삭이 작기도 하고 베어낸 벼포기에 고무신
바람의 발이나 장단지가 씻겨 아프기도 해서 싫었다.
결국 학교 가져 갈 곡식은 맨 마지막에 쓸어 담아 돌멩이가 섞여있는 최저품질을 가져가게 된다.
벼나 보리이삭 역시 도시에 사는 빈민가 아주머니들이 하루 종일 들판을 돌아 다니며 주워서
자루에 담아 이고 갔다.그렇게라도 해서 살림에 보태야 많은 애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기에
어머니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 거름 내기--------------------
가을에 벼를 베고나면 황금들판은 금새 사라지고 황량하게 변한다.
날씨는 차가와지고 해도 짧아진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더 추웠다.지구 온난화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말이다.
한겨울에는 장자불 냇가가 꽁꽁 얼어 손수 만든 발스케이트에 고무줄을 칭칭 감고 얼음을 지치면서 한겨울을 보냈었는데 지금 순천에서는 한 해 겨울에 눈도 하루이틀 오다 말고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의 얼음은 아예 얼지도 않는다.
황량한 들판이 되면 아버지들은 바지게에 거름(퇴비)을 져 날라 논에다 뿌린다.
돈이 없어 비료 대신 퇴비지만 사실 그것이 유기농이다.
틈틈히 풀베고 보릿대와 땔감에서 나오는 재를 모아 주기적으로 푸세식 화장실을 퍼 인분과
섞으면서 썩혀서 만든 퇴비를 리어카로 싣고가 큰 길에서 논까지는 바지게로 져다 날랐다.
참으로 힘든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교통이 불편한 논을 가진 사람들은 남보다 훨씬 먼 거리를 지고 날라야 했다.
아버지가 논으로 운반해 온 거름은 어머니가 삼태기에 담아 골고루 뿌리고 나도 뿌리는 일을 돕다가 새참이 되면 당숙집에서 운영하는 신대촌 막걸리 집에 가서 노란 양은 주전자로 한 되 받아 온다.
땀 흘린 뒤의 막걸리 맛이야 뭣하고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거름 묻은 손으로 안주랍시고 김치
한 가닥을 집어 맛나게 드시던 아버지의 젊을 적 생각이 안쓰럽게 생각난다.
이렇게 거름을 골고루 논바닥에 깔고 일정 간격으로 쟁기질을 하여 갈아엎은 흙덩이가 어느정도
마르도록 며칠간 뒀다가 보리씨를 뿌리고 괭이나 쇠스랑으로 깨면서 두덕을 만들며 거름과
보리씨앗을 덮는다.
그러면 얼마 안가서 파릇파릇 보리싹이 나오고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않고 견디어 우리에게
여름에 보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