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세 가지를 의식주라고 해요. 이 가운데 의생활의 기본이 되는 옷감 짜는 일은 오랜 옛날부터 발전을 거듭해 왔어요. 충청남도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 전라남도 나주에서 만드는 무명, 경상북도 성주에서 만드는 명주는 그 기능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옷감 짜는 일은 무척 고되고 어려워서 기술을 이어받으려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어쩌면 자연 옷감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르겠어요.
시원한 여름 옷감, 모시
모시짜기 | 모시를 만들려면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모시풀을 재배해 거두어들인 뒤,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표백 등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모시를 짤 수 있다.
모시는 우리나라의 여름용 전통 직물입니다. 우리나라 기후는 모시풀을 재배하기에 아주 알맞다고 해요.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모시가 무척 유명했던 것이지요. 옛 글에서도 “결백하기가 옥과 같다.”라는 표현으로 그 섬세한 부드러움을 칭송할 정도였답니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자라는 모시풀의 인피를 쪼개고 이은 실을 베틀에 걸어 짜낸 직물이에요. 한산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지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도 한산모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려 주는 전설이 전해 오지요. 신라 때 한 노인이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 보니 그 껍질이 아주 보들보들했대요. 이 껍질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짰는데, 이것이 한산모시의 시초가 되었다는 거예요.
모시풀이 모시가 되기까지
베틀 각 부분의 이름
한산모시짜기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는 문정옥(1928∼), 방연옥(1947∼)이 기능 보유자이다. 둘 다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문정옥은 어머니 신순철에게서, 방연옥은 어머니 박수영에게서 기능을 전수받았다. 나중에 방연옥은 문정옥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현재 한산모시짜기 전승 현황은 기능 보유자 두 명(문정옥, 방연옥), 전수 교육 조교 두 명(박승월, 고분자), 기능 이수자 네 명(강옥란, 정순진, 황선희, 이현주), 전수 장학생 한 명(이혜랑)이다.
모시의 원료가 되는 것은 모시풀입니다. 모시를 만들려면 먼저 태모시부터 만들어야 해요. 태모시는 모시풀의 잎을 훑어 내고 줄기의 맨 바깥쪽 껍질을 벗겨 낸 것을 말합니다. 태모시를 한 줌씩 묶어 물에 하루쯤 담가 두었다가 햇볕에 말려 물기와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할수록 질 좋은 모시를 얻을 수 있지요. 이제 태모시를 다시 물에 적셔서 이로 한 올씩 쪼개는데,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합니다. 모시째기는 모시 섬유의 굵기를 결정하는데, 쪼개는 굵기에 따라 모시 품질의 상·중·하가 가려진답니다. 모시째기가 끝나면 쪼개진 모시올을 연결하는데, 이것을 ‘모시삼기’라고 합니다. 짤막한 모시올의 두 끝에 침을 묻혀 무릎 위에서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하지요. 이렇게 만든 실 가운데 날실로 만들 것은 ‘모시매기’를 합니다. 모시매기는 모시삼기를 해서 만든 실에 콩가루와 소금과 물을 섞어 만든 반죽을 묻혀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고 왕겻불로 말리는 것이에요. 씨실로 사용하기 좋게 모양을 내는 것은 ‘꾸리감기’라고 합니다. 실이 완성되면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짭니다. 날실은 베틀에 고정시키고, 씨실은 북에 담아 좌우로 엮으면 모시가 완성되지요.
실용적인 사철 옷감, 무명
목화 | ‘면화’라고도 하며, 한해살이 초목이다. 온대에서는 90cm 안팎, 열대에서는 2m까지 자라기도 한다. 목화의 씨앗에는 긴 솜털이 달려 있는데, 털은 모아서 목화솜을 만들고 씨앗으로는 기름을 짠다.
무명은 목화의 씨앗을 싸고 있는 솜에서 실을 자아 베틀에 걸어서 짠 전통 옷감이에요. 실용적이고 위생적이어서 옷 재료는 물론이고 각종 생활 용품의 소재로도 즐겨 쓰인답니다. 무명짜기를 ‘샛골나이’라고도 하는데, ‘샛골’은 지명이고 ‘나이’는 ‘베짜기’라는 뜻의 길쌈을 말하지요. 무명은 고려 시대 공민왕(1330∼1374)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1364년(공민왕 13)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씨앗 열 알을 붓통에 숨겨 돌아왔던 거예요. 문익점은 이것을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경상남도 산청군에 심게 했어요. 그 가운데 딱 한 알에서 싹이 텄고 곧 온 나라로 퍼져 나갔지요. 이렇게 해서 조선 시대에는 백성 모두가 무명옷을 입을 수 있었답니다.
목화에서 무명까지
양손잡이 2인용 씨아 | 숫가락과 암가락이 맞물려 함께 돌아가는데, 귀가 서로 잘 맞아야 씨아 가락이 잘 돈다.
나주 샛골나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 샛골나이는 이미 고인이 된 김만애(?∼1982)와 김만애의 며느리 노진남(1932∼ ?)이 기능 보유자이다. 조선 후기 이래 고양나이, 송도의 야다리목, 문경의 세목, 강진·해남의 극세목, 진주목 등이 무명의 명산지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무명실을 잣는 곳은 나주의 샛골나이뿐이다. 현재 나주 샛골나이 전승 현황은 보유자 한 명(노진남), 전수 교육 조교 한 명(김홍남), 이수자 네 명(김미자, 강재례, 나귀숙, 원경희)이다.
샛골나이의 재료인 목화의 생산은 음력 3월 말에 보리밭의 보릿골 사이에 목화씨를 뿌리면서 시작됩니다. 목화씨를 뿌리기 전 오줌동이에 잠깐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아궁이의 재를 묻힌 다음 햇볕에 잘 말려서 써야 해요. 이렇게 씨를 뿌려서 4개월 정도 지나면 목화가 정말 탐스러운 솜을 토해 내는데, 이 솜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지요. 수확한 솜 속에는 목화 씨앗이 들어 있어요. 씨앗을 먼저 뽑아 내야 하는데, 이것을 ‘씨아기’라고 해요.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했던 정천익은 씨를 손쉽게 빼낼 수 있는 ‘씨아’라는 기구를 만들었어요. 숫가락과 암가락 사이에 목화솜을 밀어 넣고 씨아손을 돌리면 솜은 가락 사이로 빠지고 씨는 뒤로 떨어지지요. 씨를 빼낸 솜은 손가락 굵기의 고치 모양으로 만들어 둡니다. 다음은 고치 모양의 솜을 실로 만드는데, 이것을 ‘실잣기’라고 해요. 실잣기를 하는 데에는 ‘물레’라는 기구를 이용합니다. 물레는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가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에요. 물레를 이용한 실잣기는 손놀림이 아주 섬세해야 한답니다. 이 과정에서 손놀림이 얼마나 섬세한지에 따라 실의 가늘기, 모양, 빛깔이 달라지거든요. 이렇게 뽑은 실을 다시 ‘베날기’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날실과 씨실로 만듭니다. 그리고 베틀에 날실과 씨실을 걸어 베를 짜면 무명이 완성됩니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비단, 명주
실을 토해 내는 누에 | 누에는 번데기로 변하면서 가느다란 명주실을 토해 자기 몸을 둘러싸는 고치를 만든다. 여기서 실을 뽑아 짜면 명주가 된다. 누에는 뽕나무의 싱싱한 잎을 가장 좋아한다.
명주짜기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의 전통은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북도 성주는 조선 초기부터 명주를 짜서 이를 공물로 바치던 곳이다. 특히 안동 권씨가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숙부인 민씨가 명주를 짜기 시작한 이래 집안의 비법으로 며느리들에게 전수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14대째 이어져 내려와 권씨 집안의 둘째 며느리 조옥이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명주짜기 전승 현황은 기능 보유자 한 명(조옥이), 전수 교육 조교 한 명(이규종)이다.
명주는 비단 옷감 가운데 하나예요. 우리나라 명주는 삼국 시대부터 중국 명주보다 품질이 우수했다고 해요.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뽕나무 지역에서 누에를 키우면서 명주를 짰답니다. 아주 오랜 옛날 부여 때부터 명주짜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월정사 8각 9층 석탑 속에서는 명주 보자기 유물이 나오기도 했어요. 지금의 서울 잠실이라는 곳도 예전에 뽕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뽕나무 잠(蠶)’ 자를 써서 지은 지명이랍니다.
누에에서 명주까지 명주의 원료는 누에고치예요. 뽕잎만 먹고 자란 누에가 번데기가 되기 전에 지은 고치에서 실을 뽑아 내 명주를 짭니다. 따라서 명주짜기를 하려면 누에를 먹일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치면서 뽕잎을 따다 주어야 해요.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 고치를 만들 때까지 40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에에게 뽕잎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에 따라 1년에 여러 번 누에치기를 할 수도 있답니다.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는 입으로 명주실을 뽑아 3일 만에 고치를 다 지어요. 이 고치에서 실을 뽑아 내는데, 한 개의 고치에서 1200∼1500m의 실이 나옵니다. 이 실은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길며, 실 뽑는 과정도 다른 섬유들에 비해 간단하고 시간도 적게 듭니다.
인피 | 식물 줄기의 껍질은 겉껍질과 속껍질로 되어 있는데, 속껍질을 ‘인피’라고 한다. 인피는 옷감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쓰인다. 모시풀 | ‘저마’라고도 하며, 뿌리 쪽 줄기가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2m쯤 자라면 수확한다. 수확은 1년에 세 번, 5월 말에서 6월 초, 8월 초에서 8월 말, 10월 초에서 10월 말에 한다. 날실과 씨실 | 천을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이는 실이 날실이고, 가로 방향으로 놓이는 실이 씨실이다. 오줌동이 | 오줌을 받아서 담아 두는 동이이다. 주로 거름으로 쓰려고 받아 둔다. 김홍도 「자리짜기」16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왼쪽에 있는 여인이 왼손에 고치를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 손잡이를 돌려 면실을 잣고 있다. 19세기 풍속화에서도 물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모두 면실을 잣고 있다. 물레바퀴는 지방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저절로 죽어라 명주한 게 지금까지야.”_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기능 보유자 조옥이
조옥이 할머니는 18세에 안동 권씨 집안에 시집 와 시어머니 남양 홍씨와 큰동서 강석경에게 명주짜기의 여러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친정은 500평이 넘는 밭에 목화를 심던 중농으로, 15세 이전에는 친정어머니에게서 베 짜는 기예를 배웠지요. 할머니의 남편은 결혼을 하고서 바로 일본으로 장사를 하러 떠난 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객사했어요.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안 살림을 돌보고, 밤낮으로 베를 짜는 것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여름에는 삼베를 짜고, 가을에는 무명을 짜고, 겨울에는 명주를 짜는 등 사시사철 베를 짰답니다. 할머니의 베 짜는 솜씨는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해서 웃돈을 주고 할머니의 베를 사 가기도 했지요. 할머니가 한창 베를 짜던 1960년대에는 성주 근방에 명주, 삼베, 무명 등을 짜는 사람이 많아서 늘 베틀 소리가 났다고 해요. 그러나 나일론이라는 인조섬유가 나오면서 조옥이 할머니 댁을 빼고는 거의 명주를 짜지 않게 되었답니다. 특히 누에는 농약을 친 뽕잎을 먹으면 모두 죽기 때문에 집에 있는 뽕잎밖에 먹일 수가 없었어요. 할머니는 집에 뽕나무를 옮겨 심고, 봄가을로 누에를 먹여서 명주를 짜고 있습니다. 누에를 먹일 때에는 누에가 어찌나 뽕잎을 많이 먹는지 밤낮으로 따도 뽕잎을 대기가 바쁠 정도랍니다. 젊어서 혼자된 할머니는 외동딸을 시집 보내고 명주를 짜면서 외로움을 잊고 있습니다. 조옥이 할머니는 명주짜기의 기예를 후손에게 올바르게 가르쳐서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그대로 계승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딴 마을에 와서 고된 과정을 거치며 10여 년을 베틀과 함께해야만 모든 과정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는 집 안에 명주짜기에 필요한 도구를 모두 갖추어 두고 가르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