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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야 할 이유>의 줄거리: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원수의 잘못이 사랑안에서 나 자신에게 가려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내게 잘못한 사람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결코 타인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게 잘못한 원수의 죄가 내 마음 안에서 덮여 가려지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버립니다. 지금 내가 불행한 것은 내게 잘못한 사람의 죄가 덮히고 있지 않기 떄문입니다.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야 할 이유
(벧전4:1~19)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야 할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야 할 이유!
오늘 우리가 읽은 8절 말씀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는 이 구절을 중심으로, 오늘 베드로전서 4장 말씀 전체적인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많은 일화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목사님들을 통해 우리가 참 자주 듣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절친한 친구와 굉장히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 대한 증오와 분함과 억울함이 마음에 가득차서, 그림을 착수하려고 하면서 첫 번째 떠오른 얼굴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고 배반한 가룟 유다의 얼굴입니다.
친구에 대한 증오심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떠오른 가룟유다의 이미지가 화폭에 옮겨졌어요.
자! 가룟유다를 그리고 났는데, 이제 그림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무래도 그려져야 될 거 같아요.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리 몇날 며칠 밤을 애를 써도, 예수님의 그 사랑 많으시고 긍휼이 가득하신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 문득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에 지금 친구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활활 불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를 깨닫고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를 요청합니다.
친구와 화해를 한 뒤에 와서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이 그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예수님 얼굴을 그렸다는 얘기입니다, 친구를 생각하며 그린 가룟유다 그림은 지우고.
이 일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요.
이거는 우리도 똑같은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험인가 하면, 분명히 내게 잘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의 잘못을 ‘아! 이건 잘못된 거다 내가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잘못을 눈으로 마음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해서 그 사람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속에.
근데 막혀버려요.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십자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한 번 미워해 보세요.
어떤 사람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해내고 그 잘못을 기억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내가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화가 난 가운데 하나님을 불러보세요.
막혀버려요, 안 만나집니다, 그거 참 묘한 거지요.
근데 이게 묘한 게 아니라, 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분명히 내게 잘못했는데,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정말 100% 잘못한 게 없다고 객관적으로 확 될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그 잘못이 내 마음에 기억되고 있는 동안에, 나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은, 얼마든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구절을 이해하면 아주 좋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는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오해를 제거해야 될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잘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건 아니에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의 뜻은, 내게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 내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 되면, 그 사람의 잘못이 덮어지고 가려져서 잘못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는 이 말씀이 같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의 참 의미가 뭡니까?
지금 내게 원수가 원수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해악을 했는지 다 기억이 되고, 그 사람의 잘못이 내게 참 억울한 상황을 가져다줬다는 것을 다 내가 판단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랑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 마음에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원수로서 성립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더 깊은 뜻은, 나한테 무슨 잘못을 하는 그 사람이 아무리 해도 내게 원수로 성립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행위 이전에, 행위에 앞선 존재차원에서 원수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원수가 성립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원수가 왜 원수에요?
아파트 베란다에서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쓰레기 모아두는 곳이 있어요.
근데 거기에 보면 분리수거를 하니까, 이 종이박스 같은 거 보로박스라 그럽니까? 그런 걸 모아놓은 자리 있지 않습니까? 근데 하루에 두 번씩 조그만 트럭을 몰고 와갖고 그것들을 다 갖고 갑니다.
아마 그걸 팔면 돈이 되는 거 같아요.
우리도 강릉에 살면서 택배로 받는 물건이 많다 보니까, 그 박스를 거기다 갖다 버려요.
근데 그걸 아무리 집어가도 그분이 내게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대상들을 가져가거나 빼앗거나 뭐 빼앗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겠지마는(밖에 있으니까),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내게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원수가 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볼펜 한 자루라도 내가 아주 소중하게 마음에 아끼면서 간직하고 있는 볼펜일 때는, 그 볼펜을 몰래 훔쳐간 그 사람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 식으로 이제 귀중한 그 대상들이 점점 더 커져서, 우리 가족에게 해악을 행하는 사람은 원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 맨~ 아버지의 원수를 자식이 갚고 뭐 그러지 않습니까?
마음에 담고 있는 아끼는 대상인데, 누가 마음에 아끼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 해악을 가할 때는 내게 원수가 돼요.
그리고 그 사람은 내게 큰 잘못을 악을 죄를 저지른 게 됩니다, 나에게 죄를 저지른 게 돼요.
그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것의 문제는 하나님과 그 사람이 해결해야 될 문제이고, 지금은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게 원수가 되고 내게 죄를 짓는 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행위를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의 의미가, 원수가 성립되지 않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원수가 내게 성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면서 살 수는 없어요.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내게 무엇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 나를 짓밟으려고 하는 사람,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원수로 성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내게 속해 있는 그 어떤 것들도 내 마음에 담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아까워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나와 원수가 될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라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않음으로써, 원수가 성립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라 이런 얘기입니다.
자! 스테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뭘 잘못했다고 돌로 쳐요 지금, 잘못한 게 없어요.
근데 돌로 쳐 죽이고 있습니다.
근데 원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분노로 증오로 활활 불타오르면서 원수들에 대한 ‘너희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 두고 봐라’ 이러한 저주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죽어야 되는데, 원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스테반 집사님 자신의 육체를 마음 안에 담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육체를 돌로 치는 자들이 원수로 성립하지 않는 겁니다.
존재가 그런 존재가 되고 난 뒤에 어떤 행위가 나타납니까?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죄악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모르면 바보게요? 그거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립되고 있는 저 죄를,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면서 사랑하며 죽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는 그 사도베드로의 권면 속에서, 우리가 우리와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될, 사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는 거예요.
마음 안에 아~무것도 이 세상 것 중에서 소중하고 아까워하면서 담고 있는 것이 없는 상태가.
그러면 그냥 비워두면 가능한 겁니까?
그런 법은 없어요.
기독교에서는 빈 마음이라는 게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라고 하는 것은, 채우기 위해서 비우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마음에서 아까워하고 좋아해서 담고 있는 것, 이게 이 세상 안에서는 없을 때라야, 영이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왜? 우리 마음이 육체와 유착을 해버립니다.
마음과 육체는, 유착을 하지 않고 이개이동을 해야 돼요.
이개이동이란, 정경유착 그러잖아요, 정치와 경제가 유착을 하면 안 됩니다.
정치와 경제가 밀접하게 한 나라 안에서 같이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돌아가 있지만, 이게 유착이 되면 엉켜 붙어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서로 독자적으로 협력하면서 돌아가야 되지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엉겨 붙어버리면 정경유착이 일어나 안 되는 거죠?
마음과 육체도 마찬가지에요.
밀접하게 붙어있으면서 같이 기능하고 있지만, 유착이 되어버리면 안 되는데, 이게 유착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걸 찢어내느라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신 겁니다.
그걸 찢어내서, 왜 찢어냅니까?
유착된 상태에서 자꾸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을 마음으로 담고 좋아하고 기뻐하니까.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을 자꾸 하려고 그러니까 찢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 한 분만을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이웃사랑의 준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 겁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게 이게 무슨 말씀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자! 잘못했어요, 내게서 돈을 한 100만원 떼어 먹었습니다.
근데 진심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고 있느라고, 미처 돈이 마음속에 담겨질 틈이 없었어요.
그 100만원이 내 마음에 담겨질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100만원 떼어 먹은 나에 대해서 저지른 죄가 무혐의가 됩니다.
그걸 내가 아까워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손 양원 목사님께서, 아들을 둘 다 잃으셨으면서도 그 아들들을 죽인 자들을 양자로 삼으시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느라고 미처 자식을 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그런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이삭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내 육체까지도 내 마음 안에 담지 않고 있을 때에, 이 세상 그 누구도 내 마음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게끔 내게 잘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의 의미라는 거예요.
혐의가 없어지는 거예요, 무혐의가 돼버리는 겁니다, 내 마음 안에서.
그 사람이 나의 돈을 떼어 먹었으면, 돈을 떼어 먹은 도둑질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청산해야 되고, 그 죄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만 덮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그 사람이 갖고 간 것들을 내 마음에 담지 않고, 하나님을 담고 있음으로 해서 그 사람의 죄가 무혐의로 돼버린다는 거예요.
왜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이 ‘뜨거운 사랑을 통하여 허다한 죄가 덮여야만 되느니라’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내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이 아주 똑~똑하게 내 마음에 기억되고 보이고 있어요.
그러면 이제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과의 길이 막혀버립니다.
왜 하나님과의 길이 막히는 겁니까?
사람이 내게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이 기억된다는 얘기는 내 마음이 아끼고 있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내가 만약에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내 자식의 얼굴에 손톱으로 확~ 이렇게 긁어서 손톱자국을 낸 옆집 아이가 미운 거예요.
체면 때문에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미운 거예요.
왜 그래요? 내 자식이 마음속에 아주 소중하게 있기 때문에.
근데 이렇게 된 상태, 이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아버립니다.
내 마음속에 뭔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아깝게 느껴지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고, 끊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내게 잘못을 했을 때, 잘못을 느낀다는 거 그 사람의 잘못이 내게 잘못으로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고 마음속에 다른 걸 끌어들였기 때문이고, 반대로 그 사람이 내게 잘못을 했는데도 그 잘못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마음속에 이 세상 것 어느 것도 소중하게 생각해서 갖고 있는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는 이 얘기는,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얘기와 같은 말이 됩니다.
같은 대상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상하고 묘하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이웃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 잘못이 마음속에서 무혐의 처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거에요.
이것이 가능케 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늘 사도베드로가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서 뒤에서, 고난에의 참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참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근데 고난에 참여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첫 번째 길은, 믿음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신 게 나의 죽음이라고 믿는 거예요.
왜 죽었어요? 왜 찢기시고 왜 피를 흘리셨습니까?
내 마음이 이 세상 몸에 유착이 돼 가지고 몸을 통해서 만나는 대상들을 마음이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기뻐하려고 하니까, 그걸 떼어 내는 거예요.
몸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내고, 내 마음에서 간직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 것으로부터 내 마음을 떼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거예요.
두 번째 고난에 참여를 얘기합니다.
이거는 생활 속에서, 내가 지금 믿고 있으면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십자가에 함께 죽는 주님과 함께 죽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중에, 사람들이 내게 박해를 가하는 거예요, 내게 손해를 끼치는 거예요, 내 것을 뺏어가는 겁니다.
이러한 고난이 닥칠 때, 이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이 인생고,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환란이고 시련이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뺏기는 것도 시련이고 환난인데, 이 시련을 통해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동참하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져요.
근데 이렇게 생활 속에서 주어지는 시련들이 갖는 의미가 뭐냐!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더욱 더 공고한 자리로 끌고 갑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집을 뺏겼어요, 그래서 지하 동굴 카타콤으로 들어갑니다.
집이 있을 때, 나도 몰랐는데 집을 의존하고 사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래 집을 뺏기고 나니까, 집에 의존했던 마음만큼 하나님께로 더 돌아갑니다.
하나님께로 마음을 다 돌리려고 하는 이 의도에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고난이 주어지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시련이 주어질 때,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그 의도가, 더욱 더 충실하게 내게서 실현이 된다는 거예요.
욥의 경우를 생각하면 알아요.
욥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까?
자식들이 모여서 잔치를 하고 나면, 그들이 잔치 중에서 마음이 방만해지고 해이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한 일이 없을까 해서 하나하나 불러다가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경건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산과 그의 자녀와 그의 명성과 그의 건강과 그의 아내 그의 친구들 이 모~든 소유들이, 하나님을 못 보게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그 고난을 통해서 그게 다~ 치워지면서,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완성 되었을 때, 다~ 없어지고 아무것도 자기 건강조차도 없어지고, 자기 생의 의미 자체가 없어져 버렸을 때,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내 생애를 좀 더 멋지게 꾸려보겠다고 하는 생각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을 때, 비전이 뭡니까, 꿈이 뭡니까, 내 생애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듣기만 하던 하나님이 보인 겁니다.
바로 이 목적지를 향해서 십자가가 일어난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과 막힘이 없으려면, 우리 마음에 정말 머리털 하나 만큼도 이 세상 어느 것도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일어날 어떤 것도.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 일어났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그 시련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일어난 주님의 고난의 그 의도가 완성되게 하시려고, 이걸 바로 십자가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생활 속의 시련인데, 이걸 또 사도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나머지여생에 채우고 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왜 그렇다고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이 사랑은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주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져서 기뻐질 때에, 내게 어떤 잘못을 이 세상 차원에서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무슨 칼을 들고 달려들어도, 인터넷에 온갖 악플을 달면서 나의 명예를 훼손시켜도, 내 마음 안에 모시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훼손시킬 수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죄는 내 마음속에서는 무혐의 처리되는 겁니다.
그렇게 무혐의 처리 될 수 있어야 하나님과 내가 지금 교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꼭 필요하다는 얘기에요.
누구에 대해서 분한 마음이 생긴다, 하나님과 막힌 겁니다.
분한 마음이 생기고 왜 그래요, 왜 하나님과 막혀요?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마음에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분한 거지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원수도, 김정은이 갖고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서 나 한 사람을 공격해서 묵사발을 만들어도, 내 마음에 하나님만이 소중하면 그 하나님은 훼손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김정은에 대해서 무혐의 처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뭔가 좀 이상합니까?
이게 바로 기독교인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무혐의 처리될 수 있는 거, 그래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무혐의 처리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 값으로, 스스로 그 피 값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가 덮여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기 때문에,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이 너에 대해 하는 잘못을 다 덮어버려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함으로써, 모든 나에 대한 잘못이 무혐의 처리되어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가장 생각을 많이하는데 본인은 반대로 오해하며
욕하고 비난을 한다 그래서
더 이상은 잊어ㆍ버리려 한다 주님으로 가득하니
허다한 허물이 덮어지면
좋련만 속상함이 괴롭다
무혐이가 불가하다
십자가 사랑이 아니고서
스데반일 수도 없고
진심만은 알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