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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회 제5차 심화(深化) 교육(敎育)
1.강화도(江華島) 요새(要塞)
강화도는 삼국 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된 까닭은 무엇이며, 왕들이 위급할 때마다 피난처로 강화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강화도가 가지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강화도 전등사를 마주 바라보는 김포 덕포진 앞, 좁은 바다를 사람들은 염하(鹽河) 또는 염하강 이라고 부릅니다. 헤엄치면 건너갈 만한 물길로 강과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불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바다는 물살이 거세고 빨라 사고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섬의 주위는 사방이 갯벌이나 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렵게 염하를 건너온 적들이 발이 빠지는 갯벌을 건너거나 절벽을 타고 올라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이 내린 좋은 요새였던 것입니다
2.광성보(廣城堡)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에 파괴된 성가퀴와 문루 등을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3.초지진(草芝鎭)-운요호(雲揚號)사건과 강화도(江華島) 조약(條約)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국서문제로 인하여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이 보낸 국서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하던 ‘황(皇)’과 ‘칙(勅)’이 사용되어 조선을 불쾌하게 했다. 조선은 국서를 고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1875년 4월 운요호를 비롯한 군함 3척을 동원해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함포시위를 벌였다. 이후 8월에는 운요호를 제물포 앞바다에 정박시킨 후 보트를 동원해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하였다. 초지진의 수비병들은 예고없이 침입하는 일본 선박을 공격하였다. 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마찰을 원했던 일본에게 좋은 기회였다. 운요호는 즉각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일본을 경계하며 냉담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함 8척과 600여 명의 병력을 강화도 갑곶에 상륙시키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강압이 거세지자 조선은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가 관철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지만, 그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함께 부산·원산·인천의 개항, 조선 연해 측량 허용, 일본인의 통상 활동 허가를 명시하게 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그 밖에도 개항장에서의 치외법권을 설정함으로써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조선의 사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서양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조선을 상대로 그대로 강요했다. 이로 인해 근대적 조약을 체결한 경험이 없었던 조선은 일방적인 손해를 입어야만 했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은 급속히 개방되어 서양 열강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한 조선의 개항은 순조롭지 못했다.
4.전등사(傳燈寺)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5.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普門寺)
석모도는 강화도 외포항에서 서쪽으로 1.5km 해상에 위치하는데 과거 예성강과 한강을 드나드는 화물을 수급하는 장소였고, 1910년 강화군에 편입된 섬이다.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며, 넓은 간석지를 이용한 굴양식이 활발하고, 삼량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데, 새우젓과 천일염이 지역 특산물로 유명하다. 석모도는 아직 육지와 이어지지 않는 섬이지만 강화와 연결되는 삼산연륙교가 내년 초 완공될 예정이다. 그러므로 석모도 가는법을 알고자하는 관광객들은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석모도 배시간을 확인해야한다. 석모도의 중앙부에는 낙가산(落伽山)이 위치해 있는데, 낙가산 중턱에는 연간 100만명이 넘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석모도 보문사가 위치해 있다.
신라시대 창건한 석모도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 중의 한 곳으로써 아이들이 문화재로 지정된 천연동굴 내에 석불과 절벽에 새겨진 관음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석모도 가볼만한곳 중에 한 장소이며,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로 유명하다.
강화도 석모도는 관광객들의 지친 피로를 풀기 위해 석모도의 온천에서 온천수로 무료족욕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리안월드이다.
리안월드는 보문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여, 보문사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현재 석모도 온천을 운영하는 곳은 리안월드가 유일하다.
6.평화(平和) 전망대(展望臺)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통일염원소,휴게실 등이,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이,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땅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한땅 조망실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문화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 등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 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 다시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7.부근리 강화지석묘(江華誌石墓)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강화고인돌광장 내에 위엄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는 강화지석묘는 일찍이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12월 강화고인돌 중 70기 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강화지석묘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화의 고인돌은 명칭이 2008년 인천광역시 고시에 의해 모두 ‘지석묘’에서 ‘고인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강화지석묘를 강화고인돌로 변경시킬 경우에는 강화의 전체고인돌을 가리키는 용어와 혼돈될 우려가 있어 변경시키지 못하였지만 2011년에는 강화부근리지석묘로 최종 명칭을 변경하였다.
강화지석묘는 고려산 북쪽의 봉우리인 시루메산(시루메봉,216.5m) 아래로 길게 뻗은 완만한 언덕 끝자락의 해발 20~30m 높이의 대지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인돌의 북쪽 옆 으로는 서해로 흘러가는 금곡천이 있는데 간척사업전의 해안선을 복원시켜보면 강화지석묘도 해안가에 위치했음을 알수 있다.
덮개돌은 두꺼운 판석 받침이 동북-서남향을 장축으로 나란하게 세워져 ‘二’자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부정타원형의 판석이 올려 있는데, 20° (우측 24.9°, 좌측 15.6°)정 도 남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받침돌은 남동쪽으로 약 30°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원래 세울 때의 공법이었는지,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토사 유출과 덮개돌의 무게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04년 정밀안전진단결과 받침돌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북쪽의 받침돌은 윗면의 가운데에서 서쪽부분이 덮개돌과 맞닿아 있는데 덮개돌과 맞닿은 부분의 받침돌에는 다듬은 흔적이 많이 보인다.
양쪽 막음돌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덤방 크기는 4.52㎡(452×100㎝)가 되는데 이렇게 무덤방이 길이에 비하여 좁은 너비일 경우에는 대부분 막음돌을 받침돌 안으로 깊숙하게 들인 상태로 세워 ‘ㅍ’ 자의 평면을 이루게 된다.
입지는 암반이 풍화되어 흙으로 변한 단단한 구릉의 끝자락을 황토흙으로 다진 뒤에 고인돌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무덤방 입구는 덮개돌이 튀어나와 있는 서남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북쪽에는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고인돌 측면의 넓은 마당에서 장례와 제의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 다.
고인돌의 석재 재질은 최근 정밀조사에서 덮개돌은 미그마타이트질 편마암으로, 좌측 받침돌은 운모편암, 우측 받침돌은 화강암질편마암으로 각각 밝혀졌다.
덮개돌의 무게는 53t에 달하고, 덮개돌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454m이다. 한편 좌측 받침돌의 하중은 13t, 우측 받침돌의 하중은 약 9t이며, 덮개돌을 합한 강화지석묘의 총 하중은 75t에 달한다.
강화지석묘이 용도는 강화 북부 지역의 축조집단을 통합한 강력한 지배자의 무덤이거나 일부에서는 제단 고인돌의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덮개돌에 사용된 석재는 약 1.5km 떨어진 고려산 또는 시루메봉에서 운반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으며, 300m 이내에 있는 15호, 118~120호 고인돌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연구테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8.마니산(摩尼山) 고려궁지(高麗宮址)
고려시대 때 이곳에는 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 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 궁지는 고려시대 궁궐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고려 궁지 안으로 들어가면 보물 제11호 강화동종,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 이방청,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강화유수부동헌과 외규장각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곳으로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였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사로잡은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병인양요는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11명이 처형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범한 사건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함대는 양민을 학살하고, 조선의 왕실 서고였던 외규장각을 불태워 6,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다. 또한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왕실 문서와 은괴 수천 냥을 약탈한 사건이다.
고려 궁지 주변은 볼거리가 풍부하다. 고려 궁지로 오는 길에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흥궁이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용흥궁은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 바로 위쪽에는 사적 424호로 지정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고요한 초대 주교가 1900년 축성한 건물로 주도하였다.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한국 정통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 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 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9.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평은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건평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10.성공회(聖公會)성당(聖堂)
성당을 한옥으로 지은 곳이 있다. 성공회강화성당은 사찰 같은 겉모습이 사람을 당황하게 하지만, 내부는 바실리카식 성당을 잘 소화해 내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은 규모는 매우 작아 소박하지만 전통 건축에 신앙을 무리 없이 담아내 아늑한 건축 공간을 성취해 낸다.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두 성당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강화도는 역사의 지층이 두터운 곳이다. 선사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이곳에서는 하루에 짚어 볼 수 있다. 역사 기행을 염두에 둔 주말 나들이로 손색이 없다.
< 8월 21일~22일 1박 2일 답사, 자료작성과 해설 조기완>
첫댓글 문지회 연수를 멀리서 했군요.~~자료 작성하시는라 애많이 쓰셨군요.일송은 참말로 부지런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