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께서는 수억겁의 생을 통한 수행 끝에 보리수 밑에서 무명을 떨치고 깨달음을 얻은 후,
수주동안 혼자 깨달음의 열락을 즐긴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초전법륜의 설법은 두카에 대해서였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불교를 비관적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티벳과 같은 불교국가의 사람들은 왜 즐겁게 살고 있을까?
풍부한 물질과 좋은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서구인들이 삶에 대한 만족도가 극히 낮은데 비해
모든 것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티벳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즐겁게 살고 있다
티벳어 사전을 편찬한 한 신부는 티벳사람들이 명랑하고 즐겁게 산다고 설명하면서 기독교를 믿게 되면
기독교를 믿게 되면 더욱 행복할 것이라고 썼다.(웃음)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즐거워 하지만 아이는 울면서 태어난다.
좋아하는 대상과는 만나지 못하고,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게 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윤회의 세계는 바다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난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고, 사람에게 집착한다.
왜 우리가 외부의 대상에 집착할까? 그것은 무명으로 인해 잘못된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나 속에 영속하는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는 의식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의식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집착하고,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혐오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바스반두의 유가행파의 유식론에서는 우리의 의식을 전오식(안.이.비.설.신)과 이를 종합하는 육(의)식과 모든 경험들을 저장하는 팔식(알라야-저장), 경험들이 팔식에 저장되기 전에 통과하는 나라는 잣대의 칠식(말나)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