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아니 그것은 죽은 것
혹은 벗어놓은 것
떠밀려온 것
유유자적
흘러온 것
눈알은 하나뿐이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메마를 것 같다
언젠가
미끈한 눈웃음 짓던
사람을 사랑한 고래가 그랬듯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무언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막 내던져진
작은 눈빛
오늘은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
어디에도 흐린 곳 하나 없다
너무 밝다
최선을 다해
기지개 켜는
눈알의 의지
출처: 국제신문
https://n.news.naver.com/article/658/0000062177?sid=103
[2024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해변에서 /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
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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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지하
황주연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
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출처 : 경상일보(https://www.ksilbo.co.kr)https://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8691
[2024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솟아오른 지하 - 황주연 - 경상일보
솟아오른 지하 - 황주연몇 겹 속에 갇히면그곳이 지하가 된다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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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잔
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출처: 경남신문
https://m.jjan.kr/article/20231226580337
[202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시] 알비노 - 최형만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m.jjan.kr
#신춘문예2관왕#한백양#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