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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의 정체성과 새로운 행보 ㅡ본격문학으로서의 디카시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1. 지금 여기 이른 디카시의 여정
인류 예술사에 있어서 가장 먼저 문학적 형식을 갖춘 장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시다. 원시적 음률과 가창의 단계를 거쳐 서사시와 비극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 시의 발전 과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학이 「황조가」나 「공무도하가」 그리고 「구지가」와 같은 원시 가요가 구전口傳의 단계를 거쳐 기록으로 남게 된 국면에 있어서도 그 중심은 시에 있었다. 소설과 같은 산문 장르가 문학사의 지평에 떠오른 것은, 서민 대중의 의식이 자각과 성장을 도모하기 시작한 중세 이후의 일이다. 시는 점진적으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최대한으로 축약하고 이를 운율 실어서 표현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여러 문예 형식의 기반을 이루었다.
우리의 옛 선인들은 짧은 시의 문면文面에 진중한 생각을 담는 데 능숙했다. 한시에 있어서 절귀絶句나 율시律詩의 유형이 그러하고, 시조 또한 기본이 3장 곧 3행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 짧은 문안에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생 세간의 이치를 수용하여 후대에 남겼다. 가장 오랜 시조집으로 알려진 김춘택의 『청구영언』에 전하는 조선조 기생 황진이의 시조들은, 시대적 한계와 신분의 제한을 넘어서는 절창이다. 그 기량에 있어 사대부 선비의 시조에 굴하지 않는 기생들의 시조가 많은 것은, 이 문학의 외형이 난해하지 않고 길지 않다는 데 일말의 이유가 있다. 짧고 쉬우면서도 깊은 뜻을 안고 있는 시나 글이 결코 만만할 리 없으니, 인간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종교의 경전 또한 그 기본적인 가르침이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한국 현대 시에 있어서, 우리는 짧은 시가 큰 성가聲價를 나타낸 사례들을 다음과 같이 쉽게 예거할 수 있다.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 조병화, 「해인사」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 고은, 「그 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시를 쓴 시인이나 시가 처한 환경을 모두 제척除斥하고, 시가 표출하는 강렬한 상징적 의미만을 두고 볼 때 그야말로 대가일성大家一聲의 시들이다. 지금 여기서 공들여 압축적 문학 형식으로서의 시와 그 축약된 의미의 힘을 강조하고 있는 연유는, 그와 같은 형식적 단련을 거쳐 오늘의 디카시에 이른 그 연원淵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전통적 문학 장르에 있어서 짧은 시적 언술과 오늘날 영상문화 시대의 디지털 사진의 결합이, 어느 날 두서없이 출현한 근본도 유래도 없는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디카시가 동시대 문물의 변종이 아니라 본격적이고 전통적인 문학의 후계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2. 새로운 한류 문예 장르 디카시
짧고 쉬운 시가 반드시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문학, 더 나아가 세계의 문학에는 의미 해독이 어렵고 상징성이 강한 명편의 시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문학의 독자가 점점 작품으로부터 멀어지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독자 친화를 말하는 짧은 시에로의 경도傾倒가 갖는 효용성은 어떤 경우라도 가볍다 할 수 없을 터이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시대정신Zeitgeist도 바뀌어 가는 마당에, 이제는 활자매체 문자문화의 시대에서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로 문화와 문학의 중심축이 현저히 이동해 있다. 이와 같은 때에 한국의 한 지역 문화운동으로 시작된, 짧고 감동적인 시의 새로운 장르로 디카시가 부상하여 어느결에 전 세계적인 확산을 구현하고 있다.
디카시가 발원한 시점은 2004년 이상옥 디카시집 『고성가도』이며, 디카시 문예 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20년 한국디카시인협회가 제1회 디카시학술심포지엄 겸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식 출범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11개의 지부 및 지회, 해외에 17개의 지부가 결성됨으로써 화룡점정의 틀을 충실히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조직은 그야말로 디카시 ‘문예’를 진작하고 추동하기 위한 도구일 뿐, 디카시의 문학적 성취와 본격문학으로서의 고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수준 있는 지위에서 독자와 교감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제 몫과 값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디카시는 디지털 카메라와 시의 합성을 말하는 새로운 시 형식이다. 근자의 한국인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순간 포착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밀착하는 짧고 강렬한 몇 줄의 시를 덧붙이는 것이다. 일상의 삶 가운데 가장 가까이 손에 미치는 영상 도구를 활용하여 가장 쉽고 공감이 가는 감각적인 시의 산출에 이르는, 현대적 문학 장르다. 그러한 영상과 시의 결합이 가능하리라는 생각과, 그것을 시의 방법으로 확장하고 더 나아가 하나의 문예 운동으로 이끄는 행위 사이에는 큰 상거相距가 있다. 이 시운동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디카시인이 될 수 있다는 보편성과 개방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짧고 강하고 깊이 있는 시, 거기에 생동하는 영상의 조력을 함께 품고 있는 시의 형용이 폭넓게 수용되는 경과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처럼 손쉽게 독자와 만나고 교유하는 시의 자리가 시들거나 뒤로 물러서는 법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디카시의 창작에 자신의 남은 생애를 건 사람들, 디카시가 좋아서 그 시와 사진에 밤낮없이 몰두하는 사람들, 훌륭한 디카시를 창작하기 위하여 여러 시⸱공간에서의 궁구窮究를 다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한 디카시의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포착의 사진과 촌철살인의 시가 보람을 다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그 시에서 삶을 읽는 우리 마음의 수준이 아닐까 한다. 이는 디카시를 본격문학으로 견인하는, 예술성 곧 미학적 가치와도 연동되어 있다.
3. 디카시와 본격문학의 예술성
앞서 디카시 이전의 짧은 시들이 본격문학으로서의 수발秀拔한 예술적 가치를 갖는 사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형시로서 절귀나 율시의 형식을 가진 한시가 그러하고, 시조 또한 그러했으며, 우리 현대 시의 짧은 시들이 그러했다. 일본에서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정착한 다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하이쿠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많은 뛰어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이 하이쿠가 서구에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초반부터 프랑스에서 유행한 짧은 시 쓰기 운동은 그 대표적인 범례에 해당한다. 다음에 몇 가지 사례로 드는 하이쿠의 이름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 논의를 보다 실증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 마츠오 바쇼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칸노 타다토모
다리 위의 저 거지도 아들을 위해 반딧불을 잡으려 하네 – 고바야시 잇사
언 붓을 녹이려다 등잔에 붓끝을 태웠다 – 타이로
달이 동쪽으로 옮겨가자 꽃 그림자 서쪽으로 기어가네 – 요사 부손
한밤중 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흰 메꽃이 떨어졌다 – 마사오카 시키
이러한 짧은 시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선례는 여러 가지를 말해준다. 디카시가 편의주의적 생활문학이나 갑남을녀 누구나 유희처럼 접근하는 시 놀이로 침윤하지 않고, 지고至高한 예술의 세계를 지향해 나갈 수 있다는 선명한 증좌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디카시인의 대열에 참여한다는 사실 확인을 넘어서, 놀랍고 훌륭한 디카시의 창작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꾸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강변한다. “디카시를 쓰기는 쉽다. 하지만 잘 쓰기는 어렵다!” 여기에 참고가 되도록 예술지상주의의 금언金言 하나를 첨부한다. “놀랍지 않으면 버려라!” 우리는 이 시대 이 땅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나가는 디카시인이다. 그 전방의 과녁에 ‘본격문학’으로서의 디카시가 게시되어 있지 않다면, 시인이 아니라 동호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 모두 동호인이 아니라 시인이 되어야 한다.
4. 디카시의 성격적 특성과 기반
디카시의 물결이 한반도의 국경을 넘어 미국과 중국, 캐나다, 영국, 독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로 확장되어 나가는 배면에는 한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그 저변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 그와 같은 힘의 기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디카시가 오늘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디카시는 활자매체 문자문화의 시대에서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로 이행된 상황을, 최적화하여 수용하는 창작 방식이다. 그러한 전자매체의 특성은 SNS를 통하여 디카시 마니아 모임, 카페, 블로그, 단톡방 등을 통해 창작 시점에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과 독자가 연계되는 가장 빠른 상호 공유의 형식이다.
디카시는 일상의 예술이요 예술이 일상이 되는, 이를테면 ‘생활체육’과도 같은 ‘생활문학’이다. 남녀노소 갑남을녀 필부필부 장삼이사 누구나 손안의 소우주 핸드폰으로 창작을 한다. 디카시는 시가 아니다. 디카시는 디카시다. 디카시를 전통적인 문자 시의 잣대로 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어느 날 정처도 근본도 없이 발생한 돌연변이의 문학이 아니며, 우리 선조 문인들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현대 시의 짧은 시들과 접맥되어 있다. 거기에 영상의 합력이 작동하고, 사진에 시를 병렬한 포토 포엠의 물리적 접속과 다르게 사진과 시가 한 몸이 되는 화학적 결합을 지향한다.
5. 성년을 맞는 디카시의 새 행보
이제 20년 성년을 맞아 지구촌을 무대로 하는 디카시와 디카시 문예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문예’가 되어야 한다. 디카시가 값있는 문예 운동이라면 운동이 과녁이 아니라 문예가 종착점이 되어야 옳다. 이것은 곧 디카시가 예술성을 담보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디카시인 또한 ‘동호인’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시인’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카시는 쓰기 쉬우나 잘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디카시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문자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내공의 축적이 필요하다.
앞서서 짧은 시의 예술성을 증거 하는 확고한 사례로 일본의 하이쿠를 들었다. 이는 이미 세계적인 문학 장르로 성장했다. 다카시는 여기에 영상의 힘을 더하였으니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 있다. 디카시의 미학적 가치,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은 이 문예 운동의 운명적 과제다. 온 세계에서 한글로 쓰는 새로운 한류 문예이기에 가일층 창의력과 순발력과 책임감을 발휘해야 할 대목이다. 이상과 같은 생각으로 20년간 축적된, 디카시 창작의 금언(金言)이라 할 워딩들을 간추려 본다.
1. 디카시는 영상문화의 시대로 이행된 상황을, 최적화하여 수용하는 창작 방식이다.
2. 디카시는 일상의 예술이요 예술이 일상이 되는, 이를테면 ‘생활체육’과도 같은 ‘생활문 학’이다.
3. 디카시는 시가 아니다. 디카시는 디카시다.
4. 디카시 문예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문예’가 되어야 한다.
5. 디카시인은 ‘동호인’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시인’을 지향해야 한다.
6. 디카시는 쓰기 쉬우나 잘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7. 디카시의 미학적 가치,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은 이 문예 운동의 운명적 과제다.
8. 온 세계에서 한글로 쓰는 새로운 한류 문예이기에, 디카시는 우리의 자긍심이다.
각기의 명제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주제 문장만 열거했지만, 이제 20년 성년을 맞아 디카시는 한국과 세계를 아울러 활달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그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디카시인들의 행복이요 보람이기도 하다. 남아 있는 생애의 나날이 예술과 더불어 펼쳐지기를 원하는 이들! 그리고 그 예술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디카시는 언제나 손쉽게 당도할 수 있는 옥토의 텃밭이요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미개척의 서부다. 우리는 명실상부하게 그 땅의 주인이요 개간의 손길이다.
ㅡ 디카시 제52호 ㅡ
첫댓글 디카시,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쳐요...
디카시의 알파와 오메가,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보여주신 감동적인 명문의 옥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