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하나님의 나라가 너에게 임하리니(神國臨爾)
마태복음 6:10, 25:40
홍제원교회. 또 정동교회. 상동교회
夫神國何也? 保羅曰 夫神之國, 不在飮食也, 在賴神而平康及義是也. 롬十四章十七, 눅十七章二十, 太十六章十九, 고前四章二十. 主曰我立國非世之國也. 門徒不悟只信之, 率天軍而王于聖京, 主言十架之苦後落望, 然則神之國, 在何處也? 至或神之國, 非在今世只在來世, 又在世之外, 與今世決然無干涉, 如佛敎在世之外云則, 有妨于神國運動也. 神之國與今世敎友別無關係云, 自然敖視今世, 今世滅亡而已. 何足取也云. 余曾見某篤信者, 投擲敎科書曰 此皆腐物而無用. 又曾見西人云, 我天國之民非世國之民也. 其國領事聞之還國時不給文憑. 此皆以天國以別國視之, 與今世初無關係. 又敎會讚頌曰 有一福地在彼遠處, 又曰我是行路之旅, 不過留宿一夜, 曾我門前有乞人而不欲顧, 信者之將來希望, 雖爲美德, 然今世有渴急之要求, 不可等閑視之, 現在基督徒對現社會有二種義福云. 主之福音敎訓, 皆現世的敎訓云. 故彼等言福音社會, 重生社會在良心, 社會的意志而已云. 至於十架, 主之伸保事業, 不欲說明亦甚非也. 人皆有肉有靈, 社會亦然, 捨靈肉兩者則無可說明者矣. 故主言個人之價値甚貴, 而說神國之敎訓矣. 且欲擧社會之形便使之改善, 而先自個人始矣. 然而或者守保守主義, 而曰信者但付福音而已. 其外社會內各種不公平, 公娼及犯罪者, 勞働及資本問題與我初無關係云. 如此則福音傳播, 有何急義乎? 我所傳之福音, 彼受者之形便, 有如雖不公平, 受主之敎訓則爲慰不少矣. 是個人之形便, 與當時社會上罪惡, 與此個人有關係, 敎會與政治無關係可矣. 然敎會有司命, 可傳之於當時政治家, 又敎會與農業者亦無關係云, 公務等問題亦無關係云, 然則敎會有何事業乎? 主之當時, 亦有此等不平, 主曾痛罵曰 彼禍哉彼禍哉! 當時行政者辯護士執法者等, 若有感化則當時不滿之政法, 亦能改定矣. 實業界從事者如有感化, 則當時實業界之不公, 亦能正之. 然此世之外別有一世, 政治家法律家實業家, 爲此別世而從事, 則比如擊空, 其事業皆幻花空殼而已耳. 故今日之敎會, 所要者爲現世而奉仕, 使現世之人, 理解吾等之福音而信之. 其律法實現于生活而爲準則, 使之服從然後, 天國臨于人世矣.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과 의와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14:17, 누가복음 17:20. 마태복음 16:19, 고린도전서 4:20). 주께서 ‘내가 세우는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자,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께서 천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말하신 후 제자들은 낙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으며, 또 세상 밖에 있어서 금세와는 결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가? 마치 불교가 세상 밖에 있는 것 같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세의 교우들과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자연히 세상을 멀리하게 되어 금세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족히 취할 것이 있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어느 독신자를 보니 교과서를 내어버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썩은 물건들로써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보았는데, 서양 사람이 ‘나는 천국에서 온 사람이고 이 세상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자, 그 나라 영사(領事)가 그 말을 듣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증명서를 내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두 천국을 특별한 나라로 본 것으로 금세와는 애초에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또 찬송가에 ‘저 먼 곳에 복된 나라가 있다’고 하고, 또 ‘나는 길 가는 나그네, 하룻밤 묵어감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 앞에 거지가 와서 구걸을 하였으나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의 장차 소망이 아무리 미덕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이 세상일에 매우 급박한 요구를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현 사회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의 의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복음과 교훈은 다 현세의 교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말하는 복음사회와 중생사회는 양심사회의 의지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이르러서는 주께서 행하시려는 사업을 전도하지 하지 않으니, 이는 매우 잘못 된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와 영이 있습니다. 주님은 개인의 가치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또한 사회의 형편을 개선을 하는 데 있어서도 먼저 개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혹은 보수주의를 지키면서 ‘신자는 다만 복음을 전해줄 뿐이고 그 밖에 사회 내의 각종 불공평한 공창(公娼)과 범죄자, 노동과 자본문제는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다면 복음전파가 어찌 뜻을 갖겠습니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영접하면 그 위로가 적지 않습니다. 개인의 형편은 사회의 죄악과 더불어 개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와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사명이 있어서 정치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교회는 농업자와도 관계가 없다고 이릅니다.
공무(公務) 등의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는 무슨 사업이 있습니까? 주님이 있을 당시에도 역시 이러한 불평이 있어서 주께서 일찍이 ‘화로다! 화로다!’고 준열히 꾸짖으셨습니다. 당시의 행정가, 변호사, 집행자 등이 이 말씀에 감화되었다면, 불만이 가득찼던 정치와 법이 개정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실업계의 종사자가 감화했다면 당시 실업계의 불만도 바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별다른 세계가 있어서 정치가, 법률가, 실업가들은 이런 세계에 종사를 하게 되니, 비유하건대 허공을 막대기로 치는 것 같아서 그 사업들은 헛되이 빈 껍질만 남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현세를 위하여 봉사하고 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생활의 준칙이 되게 하여 복종하게 한 후에야 천국이 인간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