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실패한 자를 도우십니다(題助失敗者)
마가복음 9:14-29
체부동(體府洞)
2월 12일 (주일)
儒曰 傾者覆之, 主則不然, 敗者反助, 信者豈不感謝乎? 苦者苦而已, 痛者痛而已, 則人皆欲死而已也. 彼投身水國者皆以此也. 成三問臨命有詩曰, 黃泉無客店, 今夜宿誰家? 此痛而已. 前亦言日本中學生, 上日光瀑布上, 硏究宇宙, 而終不可解, 乃投水而死. 此苦而已也. 右兩人若遇主則不必如是也. 今擧主助失敗之證, 彼犯淫之女, 至主前哭泣, 以髮拭之, 此女犯淫之後, 人皆知之, 無復生世之望, 人嘲人罵, 自不能堪, 雖死無復洗恥, 主說五百兩蕩減之語, 而赦其罪曰, 無使更犯云. 摩西之失敗, 在殺人救國事業, 猶遲四十年. 初欲以腕力成功, 又恃學問情神, 猶人必盡附於己, 使之興國矣. 主不許事敗, 其謀不猶不成, 反懼禍及而逃焉. 乃大覺其敗而祈主, 人若敗而或尤人或怨天, 吾未見其復活者. 必反省更起可也. 古人亦言謀事在人成事在天, 失敗有兩樣, 靈的肉的也. 牧會者欲使子爲善, 而皆不如意, 非但子也, 自己亦不能, 或犯罪有自新, 而環境嘲罵, 人不信之, 必爲落心也. 此何故? 自新者人不能故也. 故歸其良心之天, 而自信其心而已, 於是神宥焉. 例有人犯盜, 人皆知之, 雖欲自新不見信, 及至敎會, 而痛情自服, 更爲新生之人, 此不指外貌, 指內心也. 余曾見妓生悔改受洗, 出嫁于良人, 其後有不合, 乃背夫淫奔, 舊習乃發, 此何故也? 卽外面悔改. 又當事業失敗, 鮮有反省, 盲進不辨水火, 益益苦痛, 而乃反省其失, 問于高手之人, 蒙其指導, 則更有希望, 如弟子之問主, 如呂蒙之問肅, 如昭烈之問諸葛, 此其一例也. 門徒之失有數, 不祈禱一也, 不念人苦痛一也, 乃欲矜能一也, 與他徒一也. 有此數種之失, 而徒從憑己力而驀進, 則失敗又失敗也, 可慮可慮.
유교의 <중용>에서는 ‘기운 것은 엎어버린다[傾者覆之]’고 하였지만, 주께서는 ‘오히려 실패한 자를 돕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자로서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괴로운 자는 괴로울 뿐이고, 아픈 자는 아플 뿐이라면 누구나 죽고 싶을 뿐일 것입니다. 물에 빠져 자살하는 자가 다 이 때문입니다.
성삼문(成三問)이 처형을 당할 때의 [임명시臨命詩]를 남겼습니다. ‘황천 가는 길에는 여관도 없다는데[黃泉無客店]/ 오늘 밤에는 뉘 집에서 쉬어 갈까?[今夜宿誰家]?’하였는데, 이것은 아픔만 있을 뿐입니다. 전날에도 말했지만, 일본의 한 중학생이 일광폭포(日光瀑布)에 올라가서 우주현상을 연구하다가 의문이 풀리지 않자 마침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이것도 괴로움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사람이 만일 주님을 만났더라면 반드시 이렇게까지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실패를 도와준 증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간음을 범한 여자가 주님 앞에 이르러 울부짖으며 머리털로 눈물을 뿌렸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을 한 후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두 알았으므로 다시는 세상에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비웃고 나무랐기 때문에 스스로 그 수치를 견딜 수 없었고 비록 죽음을 당하여도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모세의 실패는 살인으로 구국을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 일은 오히려 40년을 지체시켰습니다. 처음에는 힘으로 성공하려고 하였고, 또 학문의 정신으로 유대인을 모두 자기에게 붙여서 그로써 나라를 흥왕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지 않아 일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이 미칠까봐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실패를 크게 깨닫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만약 실패를 하고 간혹 남을 원망하든지 하늘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여 부활한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드시 회개해야만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이 또한 말했습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을 성공 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라고.
실패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 자식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모두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식뿐만 아니라 자기 역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죄를 짓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이도 있지만, 주위의 환경이 비웃고 나무라며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양심을 하나님께 돌리고 난 뒤에 믿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어 비록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습니다. 마침내 교회에 와서 자기의 잘못 된 생각을 통렬하게 자백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밖에 나타난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기생이 회개한 뒤에 세례를 받고 선량한 사람[良人]에게 시집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두 사람이 맞지 않아 마침내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다시 음탕한 옛 버릇대로 살았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곧 외면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사업의 실패를 당하여 회개는 하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통만 더욱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반성하고 자기보다 앞선 사람에게 물어서 그 지도를 받아 나가면 다시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제자들이 주님께 묻는 것 같고, 삼국시대 오나라 여몽(呂蒙)이 노숙(魯肅)에게 묻는 것 같고, 한나라 소열 황제가 제갈량에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그 한 예입니다.
제자들의 실패가 두어 가지가 있으니 기도를 안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남의 고통을 생각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며, 끝내 자기의 능력만 자랑하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려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종류의 실수를 가지고 있으면서 오로지 자기의 힘만을 의지하여 무턱대고 나아가려고만 한다면 실패에 또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염려되고 염려됩니다.
고린도전서 15:4
이선창(李善昌) 씨
2월 12일
保羅法利賽人中法利賽人也. 而主擇之爲使徒, 證其復活於世人, 熱狂的傳之, 故世皆曰染病者也. 諸君亦傳此道必遭迫也. 自古聖人皆死, 科學者皆證之, 而惟信者傳此道, 遭迫宜矣. 當時有兩黨, 法利賽沙斗介也. 其黨或信或不信, 此世人亦然. 神造人在萬物之上, 反在萬物之下, 則無復活也. 經云 寢者何也? 나사로死時, 已四五日復活, 亦證其道也. 或信者當死甚怖, 非眞信者, 何不信復活者也? 古之使徒在獄, 而讚美者, 心有復活故心有膽力, 死亡不足畏也. 吾信者中有病者, 則輒生恐怖, 先走藥局問醫, 不祈禱者何也? 無信心故也. 十二年血漏症女人, 一捫主衣, 血漏卽止, 其故何也? 心有復活也. 心有復活則可力說于王者前, 可急證于勞働者中也. 余讀一誌, 某女人至官前, 及定刑不畏, 今世亦有此試心, 若無信心則失敗, 然若有信心則可勝此試. 데前四章十三졀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골라 사도로 삼아 자신이 부활한 것을 세상에 증거로써 알리게 하니 바울은 열광적으로 그 사실을 전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전염병이 든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 도를 전하자면 반드시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인은 다 죽었지만 과학자가 이를 증명하였습니다. 오직 신자가 이 도를 전하게 되면 핍박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당시에는 두 개의 당이 있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 당파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만물의 위에 있게 하였는데 반대로 만물의 아래에 있게 한다면 부활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잠잔다고 한 말은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4,5일 만에 부활하게 된 것이 역시 잠자는 이를 깨운 도의 증거입니다. 간혹 신자가 죽음을 앞두고 매우 두려워하는데 이런 사람은 진실한 신자가 아닙니다. 왜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까?
옛날에 사도가 감옥 안에서 찬미(讚美)했는데 마음에 부활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담대해져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 중에 병이 든 자는 문득 공포감이 생겨 먼저 약국에 가서 치료하는 방법을 물으면서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오던 여인이 주님의 옷을 한번 만지자 혈루증이 즉시 나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으면 임금 앞에 가서도 역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노동자들 가운데 가서 급히 증거로 알리십시오.
내가 어느 잡지에서 ‘어떤 여인이 관리들의 앞에 가서 형벌로 처벌한다는 협박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읽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렇게 마음을 시험하는 일이 있으니 만일 믿음이 없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믿는 마음이 있으면 이러한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