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 화평케 하는 자
마태복음 5: 1-12절,
강매(姜邁) 선생.
姜邁先生, 馬太五장 一절 至十二절, 「和平케한者」
此五福中, 多重要之言, 而今欲擇九節, 尤有硏究者, 平和者, 不可無者也. 平和者與使平和者相異也, 使平和者, 使兩方之不平者, 使之平和者, 止爭止戰者也.
골一장 二二절, 使無欠者, 使立其前, 使人平和也. 人無平和者, 而惟主平和, 人與神之間, 有一墻隔之, 人與神戰, 人失敗而入于死亡, 非但人神關係而已也, 人與人之間, 甚有不平, 非主則不可平之, 猶大國有許多階級, 而互相爭鬪, 而惟主平之, 以稅吏言之, 人與人間, 不與言不與食, 而惟主與之言, 使之和平. 有各宗派, 바리새人及사斗개人, 互相紛爭, 惟主平之, 主與사마리아女人言, 由此民族及人種之間, 使之平和.
엡二장 十四절, 惟主使二爲一, 兩方疾視相對, 惟主和之, 디모데전서(듸도)二장 五절, 仲保於神人之間和睦, 吾等非由主, 則不能進于神前, 主之于神人之間, 卽盡職從事, 三年之間盡瘁事業, 皆使人歸之義也. 主在十架, 完成其義務, 吾等信如是之主則, 取如何態度則可也? 非和平, 不可足學主之精神.
롬十八장 十二절, 力可及與人和睦云, 此主訓徒之言, 保羅亦訓之, 使和之意更硏究, 則卽平和者, 止戰者, 或有善戰者, 已不平而欲人不平, 則甚不平也. 然則己先和睦而後, 使人和睦, 故主在十架上, 爲和睦祭, 墨者黑故, 接者亦黑. 朱者紅故, 接者亦紅. 主之自己爲和睦故, 使人能和睦也. 吾等家庭之內, 有不平則果何爲也? 己不作和平, 則亦不能使人和睦也. 此吾等之所深究者也. 在演壇高聲疾呼曰, 勿犯淫勿犯盜云, 然無一結果, 作黨卽不平之始也, 主不作黨, 猶大各人, 以各主義, 來主立名自己之主義 而主不從, 主不偏不倚, 故能止爭止戰者也. 然今日信宗中, 有各宗各派, 互相是非, 互相排擊, 皆非主徒也. 今之人若不入黨派, 世人指以爲無人格者, 而主則不然, 在人種在民族, 皆一視之, 少無他意, 故主爲平和仲保也.
여기 오복(五福) 중에는 중요한 말이 많은데, 지금 9절을 택하여 더욱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라고 하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평화롭게 하는 자와 서로 다릅니다. 평화롭게 하는 자는 양 쪽에 불평을 가진 자로 하여금 평화롭게 만들어서 다툼과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2절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워서’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평화자가 없으니, 오직 주님만이 평화이십니다. 사람과 하늘 사이에는 담장 하나가 가려 있으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싸우면 사람이 실패하여 사망으로 들어갑니다. 다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불평이 심하게 있으면 주님이 아니고는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유대 나라에 많은 계급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다투자 오직 주님만이 그것을 화평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세리를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함께 말하지도 않고 밥도 함께 먹지 않았는데, 오직 주님만이 함께 먹고 함께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화평을 이루게 했습니다. 또, 여러 종파가 있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분쟁하자 주님께서 화평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말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민족과 인종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오직 주님만이 둘로 하나를 만드사 양쪽이 미움으로 서로 대하는 것을 오직 주님께서 화평케 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이르기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로서 화목케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을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직분을 다하여 3년 사이에 애써 종사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의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의무를 완성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을 믿은즉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겠습니까? 화평이 아니면 주님의 정신을 배우는데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8장 12절에 ‘힘은 다른 사람과 화목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계하신 말씀입니다. 바울도 역시 그렇게 훈계하였는데, 화목 하라는 뜻을 가지고 다시 연구해 본다면 이것이 바로 평화자이고 전쟁을 그치게 하는 자입니다. 혹 전쟁을 좋아하는 자가 자기는 불평을 하면서 남이 불평을 막으려고 하면 매우 평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즉 자기가 먼저 화목한 다음에 다른 사람으로 화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먹은 검기 때문에 접촉하는 자도 검어지고, 자주색은 붉기 때문에 접촉하는 자는 역시 붉어집니다. 주님은 자신이 화목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불평이 있으면 과연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화평을 하지 못하면 역시 다른 사람을 화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깊이 연구할 대상입니다. 연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한 가지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당파로 뭉치는 작당(作黨)은 불평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작당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의 주의(主義)를 가지고 주님께 와서 자기가 만든 주의를 이름 지어달라고 하였으나 주님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기 때문에 능히 다투는 일을 말리고 싸움을 중지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신앙의 종파 중에는 각종(各宗) 각파가 있어서 서로 시비를 따지고 서로 배척하여 물리치려고 하니, 이는 모두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당파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인격이 없는 자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종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 모두 똑 같이 바라봅니다. 조금도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평화의 중보가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