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세종,효종의 영릉과,명성황후 생가 등 답사기
오늘 역사탐방하는 날로 오래전 날 받았는 데 오늘 비가온단다, 아니 태풍이 분단다. 며칠 전부터 tv에서 날리다. 6.25 난리는 난리도 아닌 것 같이 일기 예보가 난리다. 그 태풍 이름도 너저분한 이름을 가진 이름이다. 뭐 ~쁘라삐룬 태풍.. 별로 기억하기도 싫고 알고 싶지도 않은 ....태풍이름. 그렇게 태풍으로 요즘 며칠 가슴조이게 한 궂은 날씨인데 탐사 당일 오늘 아침 6시 햇살이 놀랍게도 서울 하늘아래 한강변에 빗살무늬로 꽉 퍼지는 데
아 ! 이 무슨 조화냐고 나는 놀랐다.. 그런데 오늘 6시에 우리집 아파트에서 하늘을 보니 왠 “푸른 하늘”이다. tv에선 일기예보에 제주도와 부산쪽 뉴스가 나오고 여기 서울과 여주쪽엔 아무 말이 없다. 기쁘다. 다시 아파트 15층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오늘은 빛나는 아침이다. 햇살 신선하고 찬란하다. 며칠간 그리도 싸대던 비바람이 그치고 빛나는 새날을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이가 있다고 혼자속으로 생각하였다. 기도와 우리들 모두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판교 경강선 입구로.... 1. 원래 주 테마인데... 가보지못한 릉, 세종, 그 이름에 드리우는 역사들,그리고 그가 잠자는 곳, 英陵영릉.... 세종에 대해서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답일께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세종을 어쩌니저쩌니 하고 누구이냐고 ,그리고, 어떤 죄표를 가지고 어떤 무게로 자리매김되는가 묻는건 보나마나 비디오다,
조선의 4대왕 세종.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 양녕과 효령이라는 첫째,둘째보다 아버지 태종은 셋째 충령을 세자로 점찍고 그를 심온 딸 소헌황후 과 결혼했고 열심히 일해서 아런저런 좋은 실적을 올리고 지금까지 칭송받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워고 정치인들도 죄다 세종을 좋아한다고 아첨?까지 듣는 부세출 임금이다. 그런데 그는 왜 여주땅에 묻혔고 그 배경은 아쉽게도 그의 능은 요즘 공사중이어서 못보았다 한글이 창제되던해 세종 부인이 사망하고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영릉을 만들었다가 세종이1450년 사망후 합장하였는데, 풍수지리상 안좋다는 말이 계속 있다가 예종때(1469년도), 그러니까,
세종 사망 19년후 여주 땅에 옮기는 데 , 이유는 단종과 수양대군으로 대변되는 피바람 골육상전 원인이 세종 묘 잘못썻다는 속설인데 파보니 역시 물이 흥건하고 안좋아 1469년 당시 최고 명당이라던 지금의 여주땅 英陵으로 조성되면서 병풍식과 석실제도를 폐하고 조선의 능시스템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어릴 때 시골에서 보던 상여 형식도 세종 작품이고 한글창제등 형언할수 없이 그 실적이 많다, 그런데 재밌는 게 또 있다.연주리라는 ... 지금의 세종 능은 원래 廣州광주이씨 이인손 우의정 묘자리인데 이를 이런저런 이유로 즉, 조선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 양해를 얻어 지관으로 하여금 지금의 세종능이 됐다고 한다. 2. 효종 ,그는 누구이며 그에 얽힌 사실과 그의 릉 또다른 영릉 寧陵 .... 효종은 17대 왕인데 효종 아버지 인조의 첫째가 아닌 둘째가 곧 효종. 첫째가 당연 왕 돼야하는 데 인조 지가 잘못해서 치욕의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피신과 지 아들 첫째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무려 8년이나 잡혀갔는 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자를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즉 효종을 왕으로 세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조가 청에게 당한 심리적 원한이다. 숭명배청 (崇明背淸)과 복수설치 (復讐雪恥). 그래서 송시열을 시켜 북벌론을 폈으나 송시열의 자기권력,자기 사람을 심어서 북벌정책은 실패하고 10년만에 죽는다. 그후 효종 능이 구리시 동구릉에 유택을만들었으나 겨울철 부실하게 만들어져 효종 후임 현종이 자기 아버지 효종 묘를 지금의 터 여주에 설치했는 데 이는 조선 시대 42개 능 가운데 좌우이웃 능이아닌 앞뒤 나란히 동원상하 형식이라합니다.
내 친구중 하나가 원래 경영학 전공자로서 고급 공직으로 있다가 아마추어로 연구해서 조선 릉에 대한 박사급 지식을 가진 친구가 있는 데 그에 의하면 효종능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식이고 왕비 뒷모습과 정자각 뒷모습이 보이는 데 그것도 우측에 보이는 데 이는 북상이라하여 가장 좋은 묘자리라고 합니다. 효종의 묘가 그렇다합니다. 3. 민자영, 들꽃같이 지고 불꽃처럼 살다간 조 선의 국모 ,명성왕후 ,,, 영광과 좌절과 아픔과 질고의 세월을 가른 명성왕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명성황후... 혹자는 민비라고 혹평하기도 하지만 ... 민자영 그녀는 남편 고종과 함께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의 거친 파고 속에서 일제와 미국과 러시아와 청나라의 사각 국제구도속에서 이 당을 지키려했고 국제적 정세 와중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여인이지요. 자기 남편 고종, 그리고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역사적 사건들속에서 절대절명 상황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제압함) 외교 전략을 구사하여 나라를 지키려했다.고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마침내 대한제국 수립됐지만 일본 자객들에 의해 살해당한 황후. 명성황후는 노론의 거물이었던 민유중의 6대손 민치록과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외동딸.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 출생.그 생가를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청년시절에 소설가 유주현의 흥선대원군 장편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 데 막상 일제 사진이 있는 전시관을 보니 다시 일본이 몹시 밉습니다.많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