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泰封(今 鉄原)
泰封(今 鉄原)
泰封은 今 鉄原郡이니 三国史에 弓裔는 新羅 憲康王의 庶子니 髮을 削하고 僧이 되어 号를 善宗이라 하였다.
軒輊하여 胆気가 있더니 羅季에 群盜가 蜂起하거늘 善宗이 北原賊 梁吉의 軍中에 揆하니 吉이 군사를 주 東으로 地를 노략할 때 드디어 猪足과 牲川과 夫若과 金城과 鉄原 等 城을 撃破하고 스스로 王을 称하여 国号를 摩震이라 하고 年号는 武泰라 하다.
青州의 一千戸를 옮기고 鉄円城으로 京이라 称하고 武泰를 고쳐 聖册이라 하였다. 浿西의 十三鎮을 定하고 드디어 聖册을 고처 水徳莞歲라 하고 国号를 泰封이라하다.
스스로 弥勒仏이라 称하고 頭에 金幢을 戴하여 몸에 方袍를 被하고 長子로서 青光菩薩이라 하고 季子로 神光菩薩이라 하여 出한 則 白馬를 騎하고 綵로써 鬓尾를 飾하고 童男女로 하여금 幡盖와 香火를 받을까.
前에 導하여 또 比邱 二百余人을 命하여 梵唄로 後에 随하였다. 輿地勝覽에 楓川原은 弓裔의 都한 땅인데 鉄原 北二十里에 在하니 宮殿遺址가 宛然하였다.
烏鵲飛辺認故宮
凄凉霸業黑金東
設孤猶記端陽節
未作雞林老薛公
鳥鵲이 飛하는 곳에 故宮임을 알았으니
凄凉한 覇業이 黒金東이러라.
設弧할 때 오히려 端陽節을 記하노니
鷄林에 老薛公이 되지 못하였도다.
鳥鵲은 鄭松江澈의 関東別曲에 말하되 弓王 故闞에 鳥鵲이 啾々라 하는 뜻을 写하였다.
黒金東은 鉄原을 云함이니 高麗史에 말하되 唐의 客商王昌瑾이 市中에서 一人을 遇하니 状貌가 瑰偉하고 鬚髮이 皓白하였다.
左手에 三椀을 가지고 右手에 一古鏡을 가졌으니 方이 一尺許이다. 昌瑾에게 謂曰 能히 我鏡을 買하려는가. 昌瑾이 二斗米를 주고 샀더니 鏡主가 米를 沿路 乞児에게 흩어 주고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昌瑾이 그 鏡을 市壁에 걸어 두었더니 日光이 斜暎함에 은은히 細字가 있어 可히 読하였다. 其 文에 왈 上帝 降不於辰馬라 하고 또 말하되 巳年中에 二竜이 見하니 一則藏身青木中하고 一則 現影黑金東이라 하였고 또 말하되 先操籍後搏鴨이라 하였다.
昌瑾이 非常히 여겨 弓裔에게 드리니 裔가 昌瑾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物色하여 求하니 弥月토록 得치 못하더니 東州勃颯寺 如来像 前에 塡星 古像이 있어 其 人의 状과 같고 또한 左右에 椀鏡을 가졌는데 昌瑾이 갖추어 裔에게 살았는데 裔 탄식하고 이상이 여겨 文人 宋含弘과 白卓과 許原等으로 하여금 鏡文을 解하라 하니 弘等이 曰 辰馬는 辰韓이고 青木은 松이니 松岳을 말함이고 黒金은 鉄이니 이제 鉄円을 잃음이다.
今王이 처음 此에 盛하였다가 마침내 此에서 滅하겠다 하고 先操鶏後搏鴨은 먼저 鷄林을 得하고 後에 鴨緑을 한다는 뜻이다. 三人이 서로 일러 가로되 王이 猜忌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実로써 告하면 吾輩가 害를 免치못하리라 하고 이에 詭辞로서 告하였다.
設弧는 昨日을 紀念하는 宴席이니 古者에 子를 生함에 蓬弧로서 四方 射하니 男子가 志在 四方하라는 뜻이다. 端陽은 五月 五日이니 三国史에 弓裔가 五月 五日에 生하여 齒가 有하였다.
康王이 미워하여 使者로 하여금 襁褓에 싸서 楼下에 投하여 죽이라 하니 乳婢가 가만히 楼下에 기다려 받다가 手가 目에 부딪혀 한 눈이 멀었다.
薛公은 옛 斉의 公子 田交이니 田文이 五月 五日에 生하였는데 其 父가 가로되 五月 五日 生한 者는 戸보다 더 크다 하니 不詳이라 葉하라 命하니 其 妻가 曰 請하건데 戶를 높이자 하니 父가 옳게 여겨 길렀더니 차차 자람에 薛公이 되고 亡国 時代에 一偉人이 되었다.
- 한글
태봉은 지금의 철원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 헌강왕의 서자였는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호를 선종이라 했다.
기개가 있었는데 신라 말기에 군도들이 봉기하자 선종이 북원적 양길의 군중에 있었다. 양길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 지역을 노략할 때 드디어 저족, 생천, 부여, 금성, 철원 등의 성을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마진이라 했고 연호는 무태라 했다.
청주의 1천 호를 옮겨 철원성을 京이라 칭하고 무태를 수덕원세라 고쳤다가 다시 성책이라 했고, 국호는 태봉이라 했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촉을 썼으며, 몸에는 방포를 입었다. 장자는 청광보살이라 했고 차자는 신광보살이라 했는데, 나올 때는 흰 말을 타고 채색으로 갈기를 꾸몄으며 童男女로 하여금 범가와 향화를 받들게 했다.
앞서는 이끌었고 또 비구 200여 명을 명해 범송을 뒤에서 따르게 했다. 輿지승람에 따르면 풍천원은 궁예의 도읍지였는데 철원 북쪽 20리에 있었으며 궁전 터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까치 날아가는 곳에서 옛 궁궐임을 알겠고
쓸쓸한 패업은 황금 같던 것이 동이 되었구나.
활시위를 당길 때에야 단오절을 기억하노니
계림에서는 늙은 셜공이 되지 못했구나.
까치는 정송강철의 관동별곡에서 궁왕 옛 궁터에 까치가 지저귀는 뜻을 썼다.
황금동은 철원을 가리킨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의 객상 왕창겸이 시중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더라.
왼손에 세 그릇을 들고 오른손에 한 낡은 거울을 들었는데 그 크기가 1자 정도였다. 왕창겸에게 "내 거울을 사고 싶은가?"라고 물으니 왕창겸이 2두 쌀을 주고 샀더니, 그 거울 주인이 쌀을 길가의 걸인에게 흩뿌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왕창겸이 그 거울을 가게 벽에 걸어두었더니 햇살이 비쳐 은은한 작은 글씨가 있어 읽을 수 있었다. 그 글에 이르길 "상제께서 진마에게 내리셨다"라고 하고, 또 "기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숨기고 하나는 흑금동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라고 했으며, 또 "먼저 닭을 잡고 나중에 오리를 친다"라고 했다.
왕창겸이 이상히 여겨 궁예에게 주니 궁예가 왕창겸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수색하여 구하게 했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 얻지 못했다. 동주 복사사 여래상 앞에 오래된 불상이 있어 그 사람의 모습과 같고 또한 좌우에 그릇과 거울을 갖추고 있었는데, 왕창겸이 갖추어 궁예에게 보였다. 궁예가 탄식하며 이상히 여겨 문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에게 거울 글자를 해석하라 했다.
함홍 등이 "진마는 진한이고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을 말함이며, 흑금은 철이니 지금 철원을 잃었음이다. 임금께서 처음에는 여기에서 흥했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망하겠구나"라고 하고, "먼저 닭을 잡고 나중에 오리를 친다"는 말은 먼저 계림을 얻고 후에 와록을 얻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세 사람이 서로 "임금께서 의심이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시니 만약 실로를 말하면 우리가 해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이에 꾸며낸 말로 고했다.
현궁은 어제를 기념하는 연회로, 옛날에 아들을 낳으면 활시위를 펴고 사방을 쏘며 '남자는 사방을 지향하라'는 뜻이다. 단오는 5월 5일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가 5월 5일에 태어나 이가 있었다.
헌강왕이 미워하여 사자로 하여금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누각 아래로 내려 죽이라 했는데, 유모가 가만히 누각 아래에서 기다려 받다가 손이 눈에 부딪혀 한쪽 눈이 멀었다.
셜공은 옛 제나라 공자 전교인데, 전문이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5월 5일에 난 자는 사립문보다 크다"라며 버리라 명했다. 그의 아내가 "문을 높여 기르자"고 하자 아버지가 옳게 여겨 길렀더니 점점 자라 셜공이 되어 망국 시대에 위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