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과 몽고(蒙古)의 침경(侵境)
금인(金人)이 만주(滿洲)를 차지한 뒤로 백여년(百餘年) 간은 국경(國境)에 일이 없더니 및 금(金)이 점점 쇠약(衰弱)하여지매 예전 요(遼)의 유종(遺種)인 금산(金山) 금시(金始) 등이 일어나 만주(滿洲)를 요란(搖亂)케 하거늘 이때 몽고(蒙古)에서 새로 일어난 성길사한(成吉思汗)이 동여진(東女眞)과 연합(聯合)하여 금산(金山) 금시(金始)를 치니 금산(金山) 금시(金始) 등이 쫓겨 반도(半島)에 들어옴으로 몽진군(蒙眞軍)이 또한 따라 반도(半島)에 들어와 려군(麗軍)과 합력(合力)하여 금산(金山) 등을 쳐 멸(滅)하였느니라. 이후(以後)로 여몽(麗蒙)의 국교(國交)가 빈번(頻繁)하더니 및 몽고(蒙古)가 금(金)을 멸(滅)하고 만주(滿洲)를 점령(占領)한 뒤에 또 고려(高麗)를 병합(倂合)코저 하여 고종(高宗) 18년에 몽장(蒙將) 철예탑(撤禮塔)이 입구(入寇)함으로부터 24년간에 해마다 몽구(蒙寇)의 침입(侵入)이 끈이지 않은지라. 고려(高麗)에서도 혹(或) 싸우기도 하고 혹(或) 화친(和親)하기도 하며 도읍을 옮겨 화(禍)를 피하기도 하다가 마침내 그에게 귀순(歸順)하기로 약정(約定)하였더니 및 세조(世祖) 홀필열(忽必列)이 임금이 됨에 나라 이름을 고쳐 원(元)이라 하고 더욱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여 임금을 폐립(廢立)하는 것과 국내(國內) 행정(行政)을 모두 간예(干預)하였고 더구나 충열(忠列)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 등 역대(歷代)의 임금이 모두 방탕(放蕩)하여 부흥(復興)의 뜻이 없고 또 원실(元室)의 여자(女子)와 서로 결혼(結婚)하여 후비(后妃)의 국정(國政) 간섭(干涉)이 심(甚)하였고 또 소인(小人)들이 원(元)에 내응(內應)이 되어 전횡(專橫)이 우심(尤甚)하였느니라.
- 한글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려(高麗)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인(金人)이 만주를 차지한 이후 백여 년 동안 국경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금(金) 왕조가 점점 쇠락하면서, 금산(金山)과 금시(金始) 등 요(遼)의 후예들이 만주를 어지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몽골 제국의 성립(成吉思汗)과 동여진이 연합하여 금산과 금시를 격파하자, 그들은 고려 반도로 피신해 왔고, 몽골군도 따라 고려에 들어와 고려군과 합세하여 금산 등을 토벌하였습니다.
이후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긴밀해졌고, 몽골이 금을 멸망시키고 만주를 점령한 뒤에는 고려를 병합하고자 하였습니다. 고종 18년에 몽골 장수 철예탑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24년간 끊이지 않는 침략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때로는 몽골군과 싸웠고, 때로는 화친을 맺어 피해를 피하기도 하다가, 마침내 몽골에 귀순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후 원나라 세조 홀필열이 고려의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여 임금을 폐립하고 국내 행정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고려의 역대 임금들도 방탕하여 부흥의 뜻이 없었고, 원실의 여자들과 결혼하여 후비들의 국정 간섭도 심했습니다. 또한 소인배들의 원나라에 대한 내응으로 전횡이 극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