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봉(泰封) 궁예(弓裔)
궁예는 신라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라. 5월 5일에 출생한고로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갔다 버리라 하니 시비가 명을 듣고 높은 다락에 올라 투하(投下)할 새 유모가 있어 그 시간에 누하에 가서 투하하기를 기다려 이불을 펴고 아이를 받았다. 그릇하여 한 손이 아이의 눈에 부디쳐 눈이 상하여 한눈이 없었다. 집에 안고 와서 사람이 알까하여 숨겨가며 기르더니 점점 자람에 위인이 호방하여 규칙을 지키지 않고 사람을 함부로 치고 또 용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지라.
노구가 그 근본이탈로 될까 염려하여 가만히 이르되 왕자여 그리 마시오 왕자의 신분이 다르오 하고 그의 왕사를 잠간 이야기 하였다. 궁예 가만히 듣더니 노모에 안심하시오 하고 그 시로 곧 집을 나아가 어느 절에 몸을 부탁하고 있었다. 그 절에서도 규칙을 지키지 않고 중들을 함부로 때리며 그 호방한 기운을 누를 수 없었다. 중들이 모두 미워하고 용납지 않았다.
그때에 각처에서 도적이 일어나 큰 고을을 웅거하여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노략하되 나라에서 조금도 금할 능력이 없었다. 궁예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당당한 신라의 왕자로 이런 괄시를 당하여 나라를 회복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이 알아주는 자 없다하고 이에 북원(北原) 도적 양길(梁吉)에게 가니 양길이 궁예의 담약(담력?)을 알고 군사를 주어 동방의 여러 고을을 노략하여 공을 세웠다. 궁예사졸로 더불어 감고(勘考)를 같이하니 부하가 모두 즐겨 붙이다. 여러 고을을 공략하여 영원 평창 울진 인제 금화 금성 철원 등 각 고을 쳐 빼앗고 또 부하에 왕건(王建)이란 장수가 있어 그 아버지 왕융과 함께 각 고을 공략할 새 왕건으로 철원 태수를 삼아 양천 금토 강화 등 경기도의 여러 고을 점령하고 또 국원(國原=충주忠州) 등 30여 성을 취하니 궁예의 땅은 점점 넓어지고 무리가 붙이여 형세가 강성하였다.
이에 왕건으로 정기(精騎)대장을 삼아 지금 경성과 양주 광주 충주 남양 청주 아산 등지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을 다 점령하되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에 궁예 스스로 후구려왕(後句麗王)이라 칭하고 동 8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년호를 무태(武泰)라 하고 도읍을 철원에 정하니 평양 성주 유검필(庾黔弼)이 와서 항복하거늘 궁예 패강(浿江) 서쪽 30여성을 점령하고 북으로 강토가 점점 넓어졌다. 이에 남으로 신라를 멸도(滅都)라 칭하고 신라로부터 오는 사람을 다 죽이고 궁예 수성(水性)으로 신라 김성을 대신하여 연호를 고쳐 수덕(水德)만세라 하니 때는 기원 911년이더라. 또 나라 이름을 고쳐 태봉(泰封)이라 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