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성계의 굴기(崛起)
이성계의 선조는 전주인(全州人)이다. 그 아버지 환조(桓祖)가 전주에 있어 죄를 얻고 용납지 못하여 북으로 들어가 원에 벼슬하다가 공민왕 4년에 비로소 왕을 와 보이거늘 왕이 북방의 개척하는 일을 맡겨 유인우(柳仁雨)와 상응하여 원의 총관부를 쳐 함락하 왕이 환조로 삭방도(朔方道 萬戶)와 명마사를 시켜 동북성을 개척하니 그해 4월에 병으로 죽고 성계는 환조의 제2자로 부의직을 대산하여 만호가 되니 나이 22세라.
또한 고려에 벼슬하여 동북면 만호가 되어 여러 번 공을 세우고 원의 납답출(納答出)과 여진 삼선삼개(三善三介) 등을 파하고 공민왕 19년에 기철의 아들 새인첩옥아 원의 유중을 모아가지고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하여 명국을 항거하거늘 이성계 이것을 격파하고 또 황초령을 넘어 압록강을 건어 나산성(羅山城)을 쳐 빼앗고 8월에 다시 동령부를 쳐 점령하고
우왕 3년에 다시 왜구를 쳐서 지리산에서 크게 이기고 도 6년 8월에 양광 전라 경상 3도 순찰사가 되어 해구를 쳐 물리치고 8년 7월에 다시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었고 9년 8월에 여진의 호발도를 길주에서 쳐서 대파하고 이에 안변 4책을 베풀어 우왕에게 올려 시행하고 14년 정월 임견(任堅) 염흥방(廉興邦)을 쳐 멀한 공으로 나아가 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같이 정방에 앉게 되었다.
이후로부터 내외 위권이 이시중에게 있음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때 철영위 문제로 인하여 이성계는 친명파로 지목되어 배명파와 대립이 되었다. 배명파를 항상 누르고 또 위화도 회군한 뒤로 모든 권세가 다 이시중에게 집중되었고 또 이성계를 반대하던 정몽주와 최영은 다 죽고 그 나머지는 혹 원지로 귀양 보내고 아무 이의가 없었다.
성계의 아들 방원이 남언(南*)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조인복(趙仁伏) 등과 의논하고 공양왕을 폐하고 장영 50여인의 추대로 이성계로 왕위에 오르게 하고 공양은 원주에 내치고 송도(松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고려라 칭하다가 다시 조선이라 칭하다. 이에 고려가 없어지니 역세가 34왕이요 역년이 475년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