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숙소에 차를 놓고 트래킹 차림으로 삼학도로 길을 나섰다
주차할 곳이 힘들 것 같고 군데군데 걸을 만 해서 차를 놓고 왔더니 어제 무등산 등반으로 다리가 아픈지 처는 계속 달갑지 않은 눈치를 보낸다
그것도 그런 것이 목포역을 거쳐 삼학도까지 거리는 예상과 달리 비교적 걷기에 멀었고 주차장은 곳곳 아주 넉넉하였다
그런데다 날도 찌뿌리며 안개인지 황사인지 온통 뿌옇다
그래서그런지 삼학도에 대한 첫인상도 별로 시덥잖게 와 닿았다
그나마 이난영 공원과 둘레길이 있어 산책할 만 하였다
이난영은 본명은 이옥례(玉禮)로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 뒤〈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으로,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목포를 알리는데 이 노래만한 게 없다
삼학도는 섬의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에는 무사와 그를 사랑했던 세 처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 처녀가 그를 기다리다 학이 되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무사가 쏜 화살을 맞아 모두 죽게 되었고,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나 삼학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섬은 부산 동백섬처럼 바다가에 잘 위치해 있는데 부산만큼 시설에 돈을 쓰지 못해서인지 주변 경관을 살리지 못했다 근처 조선수리소인지 시끄러운 소리만 계속되고 깔끔하지 못한 경관에 공원이외 구조물도 없어 영 아쉬웠다
다만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등이 있는데 정치적인 인물에 대한 것인지라 영 마음에 끌리지 않아 들르지 않았다
삼학도는 연륙(連陸) 및 간척공사(1968∼1973)의 완공으로 현재는 내륙과 이어져 영해동의 일부가 되었다. 대삼학도·중삼학도·소삼학도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연결되었다. 지질은 백악기의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삼학도에서 나오는 길은 항만쪽 길을 선택하니 그나마 관광하는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하늘의 먹구름도 점점 풀려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목포종합수산시장에 들러 만두와 찐빵을 사 거리를 걸으며 야금야금했다
목포항은 지리적으로 국토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1897년 10월에 개항되어 개항 100주년이 지난 유서깊은 항만이다. 시장안에 옛모습들이 아직 곳곳에 있어 근대모습들이 색다르게 와 닿았다
목포 항동시장 사이에 목포역사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오르면 목포항 전망대가 나타난다
철선이 공중에
늘어져 우렛소리 웅웅대니 / 금성의 서쪽으로 빠른 길이 열렸네
배마다 해산물이 영산포에 이르고 / 말마다 모직물이 목포에서
오네
鐵線橫空吼暗雷 錦城西去快程開 船船魚藿靈山至 馬馬氈絨木浦來
구한말 격동기 지식인이요 순국지사였던 광양출신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910)이 1902년(광무6), 그의 나이 48세 되던 때에 함평천과 영산강을 경유하여 목포진 일대를 들려 풍경을 읊은 시에서 근대화가 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코 앞에 노적봉과 유달산이 보인다
전라우수영 목포진 객사에서 내려와 유달초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나타난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근대역사관)은 1920년 6월에 건립되었다. 근세 서양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한국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인데 처음에 정보를 못 봐 2컷 찍었다
이곳은 수탈의 본거지 척식주식회사 금고 안인데 일제의 수탈 역사의 본보기 중 하나인 육지면 면직에 대한 부분이 있다
그외 실내에는 2층으로 일제강점기 모습의 사진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또 강점기 당시 일제의 잔악한 행위들을 증명하는 사진이 있어 임산부 등에게는 관람을 삼가하라는 문구가 곳곳에 있었다
이런 처참한 일제강점기를 현대인 중 반 정도는 근대화를 일으킨 공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참 한심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판친다 이는 일제치하 해방 후 대한민국 50여 년이 넘게 친일파들을 청산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국가를 주도한 데에서 비롯되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근대 한국사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에 반 하는 나쁜 행위들을 많이 한 반성해야 할 종교이다
그 기독교 근대교회 흔적이 역사1관으로 오는데 있어 찍었다
유달산으로 오르다보면 역사관 1관이 나타난다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7년 10월 16일 대한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의 각국 사이에 체결된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따라 같은 해 10월 26일 개항장인 목포에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목포의 일본영사관은 목포 이사청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고,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10월 1일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무안부는 목포부로 개칭되었으며, 이사청사는 목포부청사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7년부터는 목포시청, 1974년부터 시립도서관, 1990년 1월부터 2009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2014년부터는 목포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체험현장인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관 아래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해 있다
구일본영사관은 목포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경사지에 영사관을 짓기 위해 일본식 축댓돌[犬齒石] 쌓기로 대지를 조성하였다. 건물은 중앙의 목조현관과 삼각형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성을 가진 간략한 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흰색과 붉은 벽돌을 교대로 사용한 창문의 아치는 같은 시기 서양 건물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내부는 나무 바닥과 천장의 장식 그리고 벽난로 등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일왕의 사진이나 말을 보관하던 봉안전(奉安殿) 터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건설한 방공호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