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019. 10. 5. (토) 윤혜선 작가를 모시고 ‘당신을 기억하는 밥’ 발제
올해는 윤혜선 작가를 모시기로 합니다. 라떼 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참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각자 한 가지 음식을 해오기로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서로에게 기억되어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닭을 삶아내면서 라떼 쌤은 찌들고 구겨진 마음도 이렇게 팔팔 끓는 물에 데쳐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찌든 마음이 말갛게 소독되어 양념에 재운 닭처럼 향과 맛이 들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고기 사줄 착하고 바른 아들이 있어 그 맛으로 살아도 좋을 듯 합니다.
란주 쌤은 초탕 재탕 삼탕을 섞어 한 그릇 만들어지는 곰국을 끓입니다. 뜨거운 햇살아래 익은 콩을 갈고 끓여 식혀 두부를 만듭니다. 곰국을 좋아하는 아이도 어제 오늘 내일 매 순간 다른 꿈을 꾸고 다른 모양이 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쌤은 아이의 꿈을 응원합니다
미옥 쌤은 책을 읽으며 작가에 대한 호감이 생깁니다. 같은 노래를 좋아하고 아이와의 경험도 대동소이합니다. 외할머니의 된장찌개와 잉걸불에 구운 생선, 색색이 고운 약과. 누구든 그를 기억하는 매개가 밥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비소년을 품에 들인 영란 쌤은 여전히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새 같은 친정어머니를 바라봅니다. 가장 정직한 것이 밥이고 그 밥에 새긴 사랑이 애틋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커서 품을 떠날 때도 여전히 나를 품어주는 어머니가 계셔서 든든합니다. 그래도 허전한 내 품에 애착인형 우비소년을 품은 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외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소고기 뭇국 하나 뿐인 언수 쌤은 그 국 한 그릇으로라도 외가를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 합니다. 어떤 일 이든 그 상황을 상쇄할 것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언 쌤과 영미 쌤은 어떤 음식을 맛깔스럽게 직접 해주는 것도 좋지만, 비록 파는 음식일지라도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뭘 해줬다는 기억 말고 함께 뭘 먹었다는 기억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행복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도 자주 밥을 같이 먹어야겠습니다. ^^
윤혜선 작가는 편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만남의 약속을 지키느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었고,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 책 이야기를 나누고, 통영 그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잠깐의 휴식을 취했을 그녀입니다. 후기 모두에 적은 것처럼, 이 첫만남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인연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작가가 우리와의 만남 이후 페이스북에 후기로 이렇게 적었답니다. 허락은 없었으나 옮겨봅니다.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괴로왔다. 치료도 충분하지 못하고 휴식도 충분하지 못하고 지능도 충분하지 못하고 생각도 이해도 애착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괴로왔다.
어느 밤에는 애착인형을 검색했다. 오가닉 애착인형을 하나 카트에 담아두고 내 상태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이사를 하기로 한 날 링링이 왔다. 이사는 미뤄졌고, 미뤄진 이삿날 새벽부터 휘가 토하기 시작했다. 눈이 빠질것 처럼 아프다고 했다. 두통이 너무 심하다고했다. 열에 들뜬 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헛소리를 했다. 병원까지 가는데 스무 번을 토했다. 뇌수막염이었다. 세 군데의 병원에서 튕긴 후 동생 소개로 간 아동병원은 빈 입원실이 없었다. 수액실에서 아이와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 8인실에 자리가 하나 나서 그리 입원을 했고 밤새 울고 비명지르는 돌쟁이들 틈에서 우리 둘다 고통을 겪었다. 내가 병원에서 자는 동안 민은 혼자 집에서 잠을 자고 혼자 학교에 가야했다. 학교에서 아이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연락을 받고 집으로 튀어 가면 폰이 꺼진지도 모르는채 한밤중이었다. 녀석은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어찌 저리 태평일까. 망했다고 봐야겠지. 속타는 마음으로 액셀을 밟아 학교에 내려 주곤 했다.
입원 이틀 후엔 장남 퇴소식이 있었다. 강원도 화천까지 올라 갔다. 다섯시에 출발했다. 올라가는 길엔 아부지가 운전하시고, 내려오는 길엔 내가 운전했다. 민 등하교 때문에 운전을 하기 시작했고, 장남 때문에 고속도로 운전을 처음 해 보았다. 아직 구미는 멀었는데, 휘가 병원에서, "엄마 언제와요?" 하는 전화를 했다. 난생 처음 160을 밟았다.
일주일 지나 퇴원 후 돌아 온 집은 엉망이었다. 책은 바닥에 그냥 뒤섞여 쌓여 있었다. 세탁기 연결 부위에선 그 오랜 기간동안 물이 새고 있었다. 이삿짐 센터에 오래 노엽기엔 시간이 없었다. 이사 온 집과 이사 나온 집을 다 청소하느라 다리에 알이 박히고 손목이 욱신 거렸다. 휘 간병하느라, 장남 퇴소식 가느라, 못한 수업 보강하느라, 시간씀씀이 촘촘해 지고 목이 아팠다. 누우면 골아 떨어졌다. 내가 두 명이었으면 싶었다. 이제는 집안 물건들이 제 자리를 잡아 가는구나. 하는 순간, 다래끼가 솟고 안구 출혈이 시작됐다. 안과에 갔어야 하는데, 집에 굴러다니는 항생제 한봉 털어 넣고 통영으로 향했다.
나는 지언샘을 보고 웃고, 그녀는 나를 잘 찍어주려고 정성을 들이고, 그런 우리를 미옥샘이 또 프레임에 담아주셨다.
통영 미녀들의 책모임. <책갈피>. 책갈피언 그녀들. 내 책 <당신을 기억하는 밥>을 읽고 나를 초대해 주셨다. 요리 한 가지씩 해 온, 아니 음식 한가지씩 지어 온, 그녀들의 손길과 눈빛과 담백한 글들. 자신의 리뷰를 읽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다 나는 결국 울고 말았다.
지언샘은 나를 찍고, 그런 지언샘과 나를 찍는 미옥샘. 그게 통영사는 여자들의 모습이다. 그녀들의 충분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