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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솔로몬성전은 케이블카 승강장>의 줄거리:
정부가 20년 넘게 고수한 ‘국립공원 케이블카 불허 방침’을 스스로 해제하고 조건부 승인한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을 계기로 지방자치단체들의 케이블카 사업 관심이 고조 되는 바람에 환경단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 나라에는 45개가, 강원도 보다 작은 스위스에는 2500개의 케이블카가 상용 되고 있다 합니다. 케이블카의 천국인 스위스에서처럼 선민들에게 요구 되는 필수사항이 바로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케이블카의 상용화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케이블카 승강장
(열왕기상 5:1~18)
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2.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3.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6.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솔로몬 성전은 케이블카 승강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케이블카 승강장’
이제 솔로몬의 성전건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케이블카 승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45개의 케이블카가 있다고 합니다. 최초의 케이블카는 1962년에 개통된 남산 케이블카입니다. 반세기가 넘어가는 이 시점에 케이블카를 탄 사람이 1,700만 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한 번에 탈 수 있는 정원은 31명이고 한 명의 안내원이 동승하게 되는데 1,700만 여명을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중턱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케이블카의 천국은 스위스입니다. 스위스는 강원도보다 작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케이블카가 2,500개나 설치되어 있어서 3,000m가 넘는 알프스의 고봉을 노약자나 장애인도 힘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체르마트(Zermatt) 마을 자체가 1,620m 고지에 있는데 5성급 리조트와 호텔이 있고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을 주인은 6,0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연간 13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스위스는 2,500개의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입니다.
비슷한 얘기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케이블카는 볼리비아에 있습니다. 2013년 5월에 볼리비아의 행정수도인 라파스(La Paz)와 엘 알토(El Alto) 지역을 잇는 케이블카가 해발 4,000m가 넘는 고지대에 개통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600억 원 정도가 들었고 한 번 타는데 40센트라고 합니다. 버스비 35센트에 비해 조금 비싸지만 버스로 30분이 걸릴 곳을 1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지하철이나 광역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볼리비아에서는 케이블카가 대신하고 있는 셈인데, 개통 1년 만에 이용자가 5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케이블카의 상용화입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관광지에서 비싼 돈을 내고 타지만 스위스나 볼리비아의 예를 보면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상용화하지 않으면 진전 될 수 없는 삶의 국면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민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날마다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케이블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에 최우선적인 임무는 천지 케이블카를 타고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도 똑같이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시는데, 내 비어진 마음으로 내려오셔서 당신의 소원을 지상에 펼쳐 나가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마음이 천지 케이블카를 타고 하늘로 가서 머물기 위하여 매 순간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마음이 땅으로 내려와 있으면 또 케이블카를 태워 올려 보냅니다. 이것이 선민이고 선민은 천지 케이블카를 상용화하는 자들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은 바로 이러한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지상의 승강장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헤롯대왕의 성전까지도 본래 그 목적과 의의는 바로 케이블카의 승강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본래 목적과 의의를 따라서 성전이 활성화된 적은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상 별로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깝고 개탄스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의 의미는 케이블카의 승강장이라고 했는데 이 비유가 뜻하는 바는, 앞서 우리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듣는 마음을 구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토록 기뻐하셨고, 솔로몬의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태평성대가 나타난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건축을 명령하신 것은 이러한 일천 번제와 듣는 마음을 구한 경험을 솔로몬 한 사람의 일로 국한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모든 선민들 각자의 경험이 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일천 번제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묶인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은 일천 번제 끝에 하나님을 최우선 대상으로서 만나게 됩니다. 이 일이 성전을 통하여 모든 개개인의 경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을 구한 것은 첫 번째 대상으로 만난 하나님이 삶의 현장에서도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곁에 계시면서 라이브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 대상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성전건축은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기뻐하셨던 솔로몬의 경험을 일반화 시키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3,000m 고봉을 노약자나 장애인이 즐기기 위해서는 케이블카가 필요합니다. 케이블카를 통해 일상적인 접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솔로몬이 4,478m의 마테호른을 오르는 등반전문가였다면,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2,571m까지 접근 할 수 있습니다. 마테호른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2,500m 지역에 있는 다섯 개의 소수를 연결하는 트래킹을 즐길 수도 있는데 케이블카의 효과이고 케이블카의 승강장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지상의 치열한 삶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고서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성전에는 무엇이 있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 3절과 5절을 보면 똑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라는 것입니다. 3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는 아버지 다윗에 대하여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얘기하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라는 말인데 5절에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이 바로 성전의 기능과 의미를 알게 해주는 단서가 됩니다.
이 외에도 성전에 대한 예언을 신12:5절, 11절, 14절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머무는 장소입니다. 성전이 건축되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의 성전에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는 하늘에 계시는데 이 상황이 선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알아보았듯이 이름과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하느냐? 이름은 존재를 가리키고 이름과 존재 사이에는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미꽃, 사과, 돈, 대통령 자리나 장관자리’라고 하는 이름이 있으면 동사나 형용사를 섞어서 말하고 있는 동안에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들의 그림이 우리 생각의 스크린에 비춰지면서 대화가 진행됩니다. 돈은 파란 색의 만 원짜리를 생각하든지 노란색의 오만 원짜리를 생각하든지 돈 뭉치를 생각하든지 자기앞수표를 생각하면서 대화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마음의 스크린에 떠올리면서 대화를 하는데 그렇게 지나가지 못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름들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 사이의 케이블에 케이블카를 설치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는 내 마음이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만 존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마는 장미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향해서는 케이블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생일대의 과제로 삼는 이름과 존재가 있습니다. 돈은 내 마음이 돈이 가리키는 존재로 가서 그것을 쥐어서 마음의 공백을 채워야 된다고 믿는 이름과 존재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반드시 케이블카가 설치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성전에 두었다’는 얘기는 일단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렸으면 그 이름은 생각의 스크린에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의 묘사를 떠올려서 지나가는 이름이 아니라 존재와 연결된 케이블에 케이블카를 설치해서 우리 마음이 케이블카를 타고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있는 하늘로 가야 됨을 뜻합니다.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에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이 향한 케이블카는 돈이었습니다. 돈으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율법이라는 케이블카를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가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번제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화목제단이나 속죄제단이나 속건제단으로 하지 않고 번제단으로 한 이유는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과 연결된 존재를 향해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내 마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잇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통해서 만났던 하나님을 일상적으로 허락하시기 위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은 축복일까요, 짐이고 부담이었던 것일까요?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우면 기뻐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다 번제로 죽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잇는 케이블카를 타고 마음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기쁩니까? 아니면 부담스럽습니까? 부담스럽고 싫기 때문에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부터 하늘까지 케이블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이신 동선이 케이블이 되었고 예수님 자신이 케이블카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이 내가 죽은 것이라고 여기며 케이블카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라탔다가 케이블카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가 다 사함 받았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붙잡습니다. 돈 권력 성공 건강 형통 등을 마구잡이로 붙잡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존재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하는데 이런 자들은 교회도 아니고 교인이 아닙니다.
부담스러움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늘까지 깔아놓은 케이블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른 케이블카를 타고 살아갑니다.
참 교회란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에 마음을 태운 자들입니다. 선민과 이방사람들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자녀양육 등 삶의 방면을 공통적으로 살아가지만, 선민은 성전의 의미와 번제의 의미가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으므로 십자가 승강장에서 하늘을 목적지로 하는 케이블카에 마음을 담고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자녀교육 등 모든 삶의 방면에 투입되어 사는데 그 삶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삶의 각 방면에서 활동과 성과의 결과물로 인해서 기뻐합니다.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완성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하늘로 이어지는 존재와 이름의 관계로부터 시작 됩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붙잡으려는 마음을 죽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해서, 예수님이라는 케이블카를 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까지 우리 마음이 간 뒤에, 우리의 마음이 부재인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업무삼아 내려오셔서 소원을 이루어 가시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늘과 땅을 잇는 케이블카를 상용화하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마음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습니다. 이제 그 이름과 연결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향하여 내 마음이 가게 하시고, 그리하여 이 땅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일상적 업무가 진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