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혈액은행사건 4288.6월 21일(1955년)
근일에 소위 혈액은행이 생겼으니 이것은 사람의 피를 채취하여 다시 약을 만들어 피 없는 사람을 살리려 함이니 진실로 자선사업이라 할 수 있으나 한편 생각하면 진실로 불인(不忍)한 사업이다.
혈(血)은 사람의 생명이다. 피를 파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팔아 물질의 위험을 면하려는 것이니 피를 파는 사람에 대하여 여간 동정심이 나지 않는다.
근일에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전기과 3년생 신영균은 6월 19일 자기 아버지 기일 제수비(祭需費)와 학비를 충용하려고 동 17일 상오 12시에 서울 을지로에 있는 중앙혈액원에 가니 380그람의 피를 채취하였는데 마침 은행에서는 병원 직원이 외출한 고로 피 값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군은 이날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굶은 채 은행을 갔던 것인데 신군의 친구를 만나 말하고 있었다. 은행에서는 마땅히 채혈자에게 주어야할 포도당 주사를 주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피 값도 받지 못하고 다니노라니 다리가 허정거리는 몸으로 겨우 거처하는 영등포구 영등포동 234번지에 돌아갔고 신군은 기진맥진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날 4시경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웃에 사는 친구 김영희(22)군은 급히 의원에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주사를 맞으려 하여도 수중에 금전이 없고 피값 4천원이상도 받지 못하여 그대로 참고 회생하기만 기다렸다. 그러다 18일 새벽 2시부터 신군은 더욱 위험하였다. 다시 을지로 중앙은행에 사람을 보내었으나 은행에는 사람이 없고 해서 다시 영등포에 돌아와 경찰서에 위급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차를 빌려 주기를 바랬으나 차가 없고 신군은 숨소리가 점점 가뻐 하였다. 이 급한 사정을 들은 미제 728 헌병대에서 보낸 찝차를 타고 김영희 군이 혈액은행에 피를 도로 찾아 다시 신군에게 수혈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저녁 6시경에 신군은 운명되었다.
슬프다 신군은 전라남도 영암군 예진면 송배리에 본적을 두고 청운의 뜻을 품과 단신 상경하여 영등포공업학교에 입학한 후 오늘까지 가진 고생을 참아가며 고학을 하였던 것이다. 먹는 때보다 굶는 때가 더 많았다. 신군의 원사(冤死)에 대하여 서울 지방검찰청에서는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김명조검사(檢事)는 신군의 사체해부까지 하여 채혈 담당의사를 구속하고 업무상 과실을 신문(訊問)중이다.
경찰당국에서는 지난 20일에 김검사 입회로 영등포 신군의 하숙집 근처에 국립과학 조사연구소장외 2명 의학직원에 의한 시체해부를 시하는 한편 21에는 아침부터 김검사 직접지휘로 신군의 채혈을 혈액을 담당한 원종덕 의사에 대한 채혈 전후경과의 상세한 경과와 아울러 현재 서울에서 혈액은행을 가지고 있는 백병원과 수도육군병원에 대한 채혈의 전문적인 방법 등을 해부한 결과 채혈의 전후 조치에 관한 약과(藥果)로 인한 과실 *의(*疑)을 발견케 되었다.
채혈의사(採血醫師)의 과실은 차차 밝혀지겠지만 의사로서는 돈은 중하지만 먼저 생명의 귀중을 생각하고 채혈 의뢰자의 신체조사에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검사해 보고 신체의 허약한 점이 있으면 당자의 강청이 있어도 이것을 허락이지 말아야 할 것이오. 채혈한 후에도 아무리 염려가 없다 해도 의사로서는 고자(苦者)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채혈의 보충을 위하여 포도당 같은 주사를 주는 것은 의례 있을 것 아닌가. 돈만 생각하고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의사심장(醫師心臟)도 마비상태가 아닌가 의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