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 김용화바오로 신부님 인터넷 검색하다
굳뉴스 자유게시판에서 퍼온글 입니다.
장대익 루도비꼬 신부님을 떠나보내면서
장기항 [vinchen10]
2008-05-15
그리스도의향기
화창한 봄날,
잠원동 본당 야외미사가 열리는 고수부지에서
장대익 루도비꼬 신부님의 선종소식을 듣다니....
섭섭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선종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팔순을 중반이나 넘긴 노신부님께서
암 투병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평생을 당신을 위해 일하신 노신부님을
주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두어 가신 게 아닐까.
주님께 오히려 감사를 드리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루도비꼬 신부님과
인연을 맺은지 어언 이십여 년을 헤아리다니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게 되네.
제가 잠원동에 온 게 85년 겨울이었으니.
그때는 이기헌 주교님이 본당을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주보에 한동안 성전신축헌금 집계가 나오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적벽돌 성전과 인연이 시작되면서 한 걸음 한걸음,
주님께로 나아가는 서툰 걸음마가 시작되었지.
큰 아이가 세살때였고 지금의 막내는 그 다음 해에 가졌으니
잠원동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87년에 장대익신부님께서 오신 걸로 기억한다.
노신부님을 뵙는 순간,
온화해 보였지만
흡사 노가다판의 십장으로 오인할 정도로
털털했지만 터프한 모습이셨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작달막한 키에 씩 웃으시면
얼굴이 온통 녹아내릴 것같이 만면에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해 레지오 연차총친목회 때였나.
지금이야 남성레지오가
모든 성인들의 모후 산하에 십여개가 넘는 대형 꾸리아지만
당시 여성꾸리아 산하에 딱 하나뿐인 남성레지오,
조촐한 살림었다가 87년에는 다섯개까지 늘었지 싶다.
지하 성당에서 친목회를 가졌는데,
음~ 지금의 영상실 자리겠지.
주임신부님 차례에 무대에 서신
루도비꼬 신부님이 부른 노래는
이북출신의 실향민의 노래였다.
"두마~안강 푸으른 무우레 노 젓는 사고오옹~...“
구성지게 뽑는 신부님의 노래에 취하나 했더니
웬걸 "좋나좋나“
어안이 벙벙해지는데
어느 눈치 빠른 형제가
"좋다좋다“
추임새를 넣자,
다시"그럼 가볼까 하시더니 노래가 이어지는 게 아닌가.
계속 이어지는 노래는
이따금씩 신부님의 "좋나좋나" 라는 물음에
"좋다좋다" 라는 우리의 추임새가 오고가면서 뜨거워졌다.
사뭇 흥을 돋우던 뱃사공과
루도비꼬 신부님의 데뷔무대,
그날을 어찌 잊어버릴까.
이북 출신이신 신부님은 두만강을 부르며 두고온 고향을,
그리고 정들었던 사람들 하나하나 떠올리셨을지 모른다.
정말 신부님은 세련된 분위기가 아니라
구수한 토장국 냄새 나는 노가다판 십장님같이 소탈하셨고
정이 여간 많은게 아니었다.
기마이가 대단했었다.
오늘 신부님의 장례미사에서
추기경님이 밝힌 이야기를 토대로
장대익 루도비꼬 신부님의 약력을 일별해볼까 한다.
신부님들 사이에서도
루도비꼬 신부님의 소탈한 성격은 소문이 났나보다.
추기경님의 표현에 의하면
어느한 곳에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자유인이라 칭하셨다.
그래 맞는 말씀이지 추기경님이 얼마나 예리하게 보셨는가.
자유분방해서 교우들과 격식을 차리기 보다는
솔직담백하면서도 해야할 자리에는 분명하게 주장을 밝혔다 한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정도로
상대방의 입장을 너그러이 헤아려 줄줄 아는 분이셔서
후배 신부들의 인기가 남달랐다지.
추기경님이 계속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의 일생은 우리나라의 근대사라고.
1923년 평북 함원면 감초리에서 태어나신 신부님은
일제시대에 덕원신학교를 졸업하셨다.
덕원신학교가 지금의 가톨릭대학이라네.
한 해 위의 선배로 윤공희 대주교님이신데
오늘 장례미사의 고별식을 주재하셨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두 분은 일제 학도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납방으로 가면
미군에 투항하고
북으로 가면 탈출하여
광복군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다.
폭격에 목숨을 구한 이야기며
추기경님의 구수한 입담에 시간 가는 줄모르고
장대익 신부님의 일생을 들었다.
천신만고끝에 대동아전쟁이 끝났나 했더니
고향은 공산화가 되었고
이남에 내려와서 전쟁중에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한다.
그리고 초임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다.
그때 감화를 받은 이북 포로 중에 몇몇 분이
신부님께 감화를 받아 사제가 되었다 하네요.
논산,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쳐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재빨리 평양에 가신 신부님은 진남포로 발령이 났지만
공산군이 점령한 터라 멀리서 바라보다가
부임도 못하시고 돌아오셨다 한다.
윤대주교님도
이북에 발령이 난 본당을 부임도 하지 못하셨다지.
추기경님이 윤대주교님께 어디냐고 물어보셨는데
윤대주교님의 사목본당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유감이다.
그래서였나. 몇해 전 우리본당에서 팔순 잔치가 열렸을 때
김 추기경님과 윤공희 대주교님이 함께 오셨군.
전쟁이 끝나고 카나다로 유학을 가셔서
신용협동조합운동 과정을 공부를 하시고 돌아오셔서
우리나라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펼치신
협동조합의 개척자라 불리셨다.
그리고 후암동 본당 사목을 하시자
기다렸다는 듯 브라질 이민이 시작되어
이민사목을 맟으며 브라질에서 7년간 계셨다 한다.
돌아와서 대방동, 상도동, 종로를 거쳐 우리본당에 오셨지.
추기경님 말씀이 본당 하나를 지으면 연옥 단련없이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본당을 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시면서
루도비꼬 신부님은 여섯개 본당을 지었으니
지금 어디로 가셨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씀하셨다.
돈이야 신자들이 내지만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신부들한테 얼마나 마음 고생이 큰가를 설명하시면서
서울교구에는 신자들이 잘 해주셔서 고생이 덜한 편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셔서 우리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다.
미국생활에다 브라질에서도 오랜 세월을 보내신 신부님은
당시 골프를 무척 좋아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폼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운동을 썩 잘 하셨다지.
담배는 골초수준이었고.
작년에 본당 설립 60주년 행사에 오신 신부님이 담배를 꺼내자
누군가 잽싸게 불을 붙여드렸고
박정우 신부님이 어느새 자판기 종이컵을 들고서 따라 다녔다.
이동식 재떨이라고.
루도비꼬 신부님이 계시던 당시
박정우 후고신부님이 본당에서 초임 보좌신부님이셨거든.
루도비꼬신부님의 보좌신부님 사랑이 별났다 하지.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를 할까요.
신부님은 아이들을 유달리 좋아하셨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면
으례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꼬마들과 하는데
승부에 관계없이
주머니에서 한웅큼 사탕을 꺼내서 주시기를 좋아하셨지
아마. 그런데 못된 교우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할까.
만만치 않은 사탕 살 돈을
본당 치과의사들이 대준다는 악소문이 한동안 회자되었다.
설마, 아이들 사탕 줘서 충치 생기게 해놓고
치과의사들 돈벌게 하셨을까.
후후 다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
오늘 추기경님께서 확인시켜주셨으니
전설이 역사로 판명되었다 하겠다.
어느날,
우리 아들녀석이 싱글벙글거리며
집에 들어오면서 소리치는 게 아닌가.
"엄마, 나 복사했다" 하고.
그놈이 일곱이나 되었을 때인가.
복사는 어림도 없고 첫 영성체도 하지 않을 때였는데 말이다.
옆집의 형하고.
성당에서 놀다가 신부님 눈에 띄어서 별안간 출세한 터이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이
어찌 했을까만 생각만 해도 신기하다.
미사 중에 종칠 때가 신이 났던지
한동안 흥분해서 설쳤는데
다음에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신이나서 주일학교에 열씸이 나가던 놈이
이제는 냉담 중이라 할말이 없다.
신부님 영전에 무어라 아뢰어야 할까.
이놈이 글쎄 성당에서 신부님을 보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신부님, 하고 가위바위보하자고 조르지를 않는가.
하기사 그 당시 아이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제 친구들까지
사탕 준다고 데리고 왔으니까
성전이 왁자지껄해서
기도하는데 방해가 안되었을른지...
저와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았다.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생활 땜에
겨우 레지오 주회에 나오는 게 고작인 촛짜 신자였으니까.
참, 한남동 꼰벤뚜알에서 레지오 1차 기사교육을 갔을 때
하필이면 신부님 칠순잔치가 열렸다.
먹자판에 빠진 우리가 조마조마해서 끝나자
달려왔더니만 잔치끝물의 수박 두어조각하고
돼지 몇 저름 얻어먹기는 해서 위안이 되었다.
그날 대단했다지.
김수환추기경께서 왕림하셨으니....
신부님 말씀에 의하면
신학교는 선배라던가 나이는 당신이 한 살 적다고 들었는데
내 기억이 틀리는지 모르지.
학교 다닐 때 주먹께나 날렸다고
큰 소리치셨는데 알 수 없지.
주먹자랑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주먹 쓰는 사람 없대잖아.
하지만 신부님 인상 보면 한가락 하셨을 것도 같고.
신부님 팔순 때도
우리 본당에서 잔치를 했는데 추기경님이 오셨고
광주교구의 윤공희 대주교님,
인천의 나굴리에모 주교님이지.
교회의 거물께서 전부 왕림하셔서 축하해주셨다.
제가 그때 안내를 해드렸는데
추기경님과 윤대주교님은 오실 때나 가실 때나 화장실을 먼저 찾았다오. 그
래서 왠 화장실을 그리 좋아하시나고 여쭈었더니.
"젊은 형제, 나이 들어봐 다 알지. 화장실 출입이 왜 잦은지"
교육관 3층 화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 모습이 다시금 생각나네 그려.
이제 내 나이도 녹녹치 않지만 화장실 출입이...글세다.
다정하게 화장실도 동무하시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윤공희 대주교님의 따스한 모습이 추억이되었나보다.
이제는 추기경님도 병석에 계신다니....
이제 저하고 얽힌 이야기를 할까 한다.
작년이지 아마, 사무실이 여의도인지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환자들 상대로 쪼그만 봉사를 하느라 자주 들렸다.
어느날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신부님을 만났다.
최익철신부님하고 문병 오신 길이었다고 하셨다.
그때 병원에는 김옥균주교님과
당신이 우리본당에서 보좌신부로 데리고 있었던
김용화 바오로 신부님 문병 오신 터였다.
인사를 드렸더니
기억하셨을까만 잠원동이라고 하였더니 알은체 하셨다.
그래 무슨 일로 왔냐고 하시길래
쬐그만 봉사활동 하는 거 있다고 했더니
최익철신부님께 소개하면서 얼마나 자랑하시는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연신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격려를 해주시던 당신이 떠나고 없는 세상,
누구한테서 격려 받지요.
(장신부님 말씀...니네 본당 주임신부한테 받아라)
부축을 받아야
겨우 몇걸음씩 떼어놓으시던
불편한 몸의 최익철신부님과 동기라하셨다.
중풍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신 우표신부님
(우표를 주제로 성경 이야기를 여러권 내셨길래
우표신부님 하는 게 쉬울 것같아서)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면서 당신은 팔팔하다면서
뽀빠이처럼 두팔의 알통을 들어내어
자랑하다가 펄쩍펄쩍 뛰기도 하면서
당신 건강을 자랑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개구장이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병실에 누워서
의식을 찾지 못하는
젊디젊은 김용화신부를 문병하느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우수깡스러운 몸짓으로 달래려 한 게 아니었을까.
당신이 사목했던 본당 출신의 어리버리 신자 하나가
나이 들어 제법 봉사도 한다고 기특해 하고
동기 신부한테 자랑자랑하던 그 모습을
어디에 가서 뵈올까요 신부님.....
참 이본수 요셉 형님이 전한 말을 옮겨볼까요.
당시 인천 쪽의 변두리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맏고 있던 요셉형님이
서울본당에서 물건 팔아서 신축기금을 모으려고
잠원동본당에서 양말하고 생필품을 팔려고 왔던 적이 있었답니다.
주일 저녁미사가 끝나고
인천본당 봉사자들이 물건을 정리하고 돈도 챙기는데
멀찍이서 보고계시던 주임신부님(장대익)이 오시더니
얼마나 팔았느냐고 묻더래요.
그것가지고 무슨 본당을 짓겠냐고
사무실에 들어가시더니 돈을 한웅큼 쥐고 나오셔서
'엣다 성당 잘 지어라' 하고는 돈을 주고는 가시더래요.
아마 주일헌금을 집계하는 자리에서 얼만지도 모르고
한웅큼 덥섭 쥐고 나오신게 아닐까요.
이처럼 계산도 없으시고
기마이는 대단한 분이 장대익 루도비꼬 신부님인가.
오늘, 명동성당 성가대가 부르는 고별 찬미는
가슴을 찌르는 듯 날카롭고도 애절했다.
그러나 푸른풀밭에
이몸 뉘어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가사가 아닌가.
이 세상 떠날 때 시편 50을 들으면서
주님곁에 돌아간다면 아쉬울 것 없겠다.
이어지는 고별의 노래는 장중했다.
파이프 오르간의 두터운 소리와
애절한 소프라노가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폭풍우를 동반한 고성부에는
온 몸으로 전율이 흐른다.
테너가 조심스레 받쳐주는 고별의 노래는
언제나 주님곁으로 떠나는 영혼을 보내는 침통한 레퀴엠,
주여, 이 영혼 받아 주시옵소서.
한평생 당신의 종이었던
장대익 루도비꼬를 부르신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겠지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겸손하게 들을 뿐입니다.
루도비꼬 신부님,
당신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당신 이름 가만히 불러봅니다.
장.대.익. 루.도.비.꼬,
당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넉넉한 믿음을 가르쳐 주셨고
쫌생이같이 살지 말고 크게 웃으라고 채근하며
" 나, 이제 간다. 그래도 좋나 좋나"
우리가 울먹이며 추임새를 넣는 걸 아십니까.
"좋다 좋다"
예! 당신이 그리 좋다 하시면
하늘나라로 고이 보내드리지요.
잘 가세요, 그
먼길, 훌훌 날아가세요.
걱정 시름 다 털어버리시고....
신부님, 우리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