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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4장 1-9절
모세에게 주신 이적과 믿음
하나님께서 80세 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40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반응했습니다. 40년 전에는 소명을 따르긴 했지만 하나님의 때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열정으로만 앞서 행동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나 80세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고 계시지만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한 없이 작아져버린 탓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모세가 소명을 따를 수 없다고 했을 때 성경이 드러내고자 한 것은 모세 자신의 부족함, 그리고 그의 무능함을 그 스스로가 알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출애굽기 3장 11절에서 ‘내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이런 면에서 미디안 40년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볼 때 그로 하여금 그렇게 낮추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모세는 이스라엘의 반응도 생각했습니다. 40년 전에는 분명 소명을 따라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3-25)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하실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동족끼리 싸우는 걸 말릴 때 이스라엘은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할 뿐이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2:14)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어떤 변명까지 했느냐? 출애굽기 3장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이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반복적으로, 그리고 덧붙여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여전히 변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1절을 보시면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믿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처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은 어느 인간에게나 과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에 대해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다면 나만을 보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상황을 보는 것은 이제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며,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지음 받은 모든 존재가 바로 스스로 계신 분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럼 창조만 하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해 섭리하십니다. 친히 보존하시고, 친히 다스리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다면 나를 보는 것, 그리고 내 상황을 보는 것은 내려놓아야합니다. 오히려 하나님만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대로만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3장 7절과 8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 들었다. 그들의 근심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건져내는 정도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모세를 통해 구원하시되,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증거도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핑계 삼아 되물었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알리셨고,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마치 미리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그 구원의 계획에 대해 펼쳐 보이시듯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애굽 왕이 너희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이적으로 애굽을 친 후에야 출애굽하게 될 것이라는 것, 심지어 출애굽하게 될 때 많은 물품을 취하여서 나오게 될 것까지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떤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출애굽기 3장 18절에서는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라”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불변한 말씀도 마치 부정하다시피 변명에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모세의 모습인 겁니다. 때문에 “모세에게 믿음이 있었는가?” 했을 때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칼빈의 표현을 따르자면 거의 질식할 정도로 대단히 연약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서 말한 것처럼 믿음이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히브리서에 의하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히11:1).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걸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실상으로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나를 보거나 내 상황, 내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보다는 자꾸 지금 보이는 현실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는 어떻게 말하느냐? 변명에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지금 모세가 정확하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모세만 그런가?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하나님만을 주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얼마나 많은 부분 나를 바라보고, 내 상황, 내 환경을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단순히 나를 바라보고, 내 상황, 내 환경을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혹 주일에 더 많은 물질을 보장받는다 할지라도 우리 삶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삶에 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정신으로서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예 없다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 관계와 맞물리게 되면 주일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입시를 앞두고 있는 부모라면 거의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학교 선생의 말을 더 듣고 있는 것이 현실로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학교 나와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면 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사의 자녀, 그리고 장로의 자녀, 심지어 목사의 자녀들조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명하는 것이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때만큼은 마치 믿음을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오늘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디모데후서에서 말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딤후3:5). 왜냐하면 앞에 있는 말씀처럼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여전히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딤후3:2).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것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진단할 때 혹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할 우리가 말씀보다 내 상황을 보거나 내 환경을 보면서 말씀을 폐하는 자로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떨어졌다는 증거와도 같다는 걸 인식할 줄 아셔야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우리는 대부분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걸 인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말씀도 바라볼 때가 있지만 말씀이 내 이익관계와 맞물리게 되면 항상 말씀대신 내가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는 핑계는 대는 데 익숙한 자들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신앙이 무색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자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느냐? 여전히 긍휼로 대하십니다. 물론 오늘 본문 이후에도 모세가 자신의 말 못함으로 인하여 핑계를 대고,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노를 발하기도 하십니다(출4:14).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긍휼의 긍휼로서 대하신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여전히 이스라엘을 두고 핑계를 댈 때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표적을 보여주시면서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첫 번째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두 번째는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다시금 회복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은 나일 강 물을 떠서 땅에 부을 때 그것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이 표적들 중 일부는 나중에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행하게 되지만(출7장), 지금 이 표적의 일차적인 대상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데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모세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2절에서 5절을 보시면 첫 번째 표적에 대해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그런데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이 표적은 애굽 왕 바로 앞에서도 행하게 될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을 모세만 행하는 자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모세가 이 기적을 바로 앞에 보였을 때 바로의 수중에 있던 현인들, 그리고 마술사들도 동일하게 행하게 됩니다(출7:11-12). 마술사라고 하니까 오늘날처럼 단순히 속이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마술사들은 실제로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들로 있었을 것이라는 게 보편적인 해석으로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귀를 통해 그런 능력을 받아 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그럼 모세도 기적을 행하고, 애굽의 술사들도 이런 기적을 행한다면 “과연 기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이냐?”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모세에게 보여주고 계신 표적, 소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기적들은 다 무엇을 위해서냐 하면 모세로 하여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5절에 있는 것처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술사들조차 그런 기적을 행한다면 “기적 자체가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는 것이냐?” 이 문제부터 풀어놓고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누가복음 16장으로 가시면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내용에서 이런 말씀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먼저 요약하자면 한 부자가 호화로이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고픔을 달래려고 하는 거지 나사로 역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의 경우 아브라함 품으로 가게 되고, 한 부자의 경우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부자의 경우 지옥에서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등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러자 부자가 어떤 요청을 하느냐 하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아버지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는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로 하여금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살아나 복음을 증거하면 반드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말씀으로 답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6장 29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9-31) 쉽게 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기적은 곧 믿음이라는 생각이 이 부자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하느냐? 기적이 곧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선지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복음 사역자들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들의 증거를 통해 믿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기적이 믿음의 동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적적인 일을 대할 때 일차적으로 가져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기적 자체가 믿음의 동인, 기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란 걸 반드시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그럼 기적을 주시는 이유는 뭐냐?
일단 기적이란 무엇인가 할 때 어거스틴이 가진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일상적인 과정을 자연적인 것이라고 부른다면, 어떤 교훈을 가르칠 목적으로, 같은 결과가 비상한 변화로 생겨날 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삼위일체론 3권 6). 그러니까 기적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냐? 어떤 교훈을 가르칠 목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비상적인 방식으로 교훈하기 위한 것, 이걸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세 가지 기적을 보이십니다. 그 중 두 가지를 애굽의 바로 앞에서도 행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만 해도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 기적을 누구도 하느냐 하면 애굽의 술사들도 행한다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고, 첫 번째 재앙인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기적을 애굽의 술사들도 행하더라. 그러나 성경을 더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실 때 세 번째 재앙인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재앙에서는 어떤 말씀이 있느냐 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8장 18절입니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그리고 19절에서는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그러니까 한 부분만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보면 애굽의 술사들조차 하나님의 능력에 비교해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하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한 분이라면, 애굽의 술사들은 그래봤자 제한된 인간이라는 걸 드러내십니다. 아니 마귀에게 힘을 빌려오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 역시 피조물이고, 피조물이기 때문에 전능한 존재가 아닌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전능하신 분으로서, 못하실 일이 전혀 없다는 걸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기적은 교훈을 위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 지식을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할 때 기적을 행하실 때가 많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기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은 “이것도 행하시는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못하실 일이 없구나!” 이걸 드러내고자 하신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나님 지식에 있어 매우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거의 질식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던 모세보다 더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랫동안 보아 왔던 게 애굽의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잘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질문을 할 것이라는 것도 알아 그것으로 변명을 대기도 했습니다.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3:13) 심지어 출애굽 이후에는 어떤 사건까지 있게 되느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더디 내려온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게 되는데, 그 금송아지 신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출32장).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지식에 있어 부족하고 얕은 자들로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걸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애굽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애굽이 섬기던 신들에 대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섬기는 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하나님이란 사실을 드러내실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처럼 기적은 기적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교훈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통해 보자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더욱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걸 알게 하고, 그 말씀이 참이라는 걸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 기적은 믿음의 원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많은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위하여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3절입니다. “두 사도가(원문에는 사도라는 말 없이 인칭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들이)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러니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이유는 말씀을 섬기기 위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롬10:17) 믿음은 곧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앞서 누가복음 16장에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야지만 믿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거하지 않더라도 이미 복음 사역자들이 있기 때문에 전혀 부족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들의 말씀 전파를 통해서도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물론 이것은 한시적이긴 하지만, 한시적이라는 의미에서 뭘 주시느냐 하면 기적을 더하여 주실 때가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의 배경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 지식에 있어 너무 부족할 때 그렇게 행하시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셔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기적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믿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5절을 보시면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이 있느냐 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6절 이하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한번의 기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두 번째 표적도 통해서도 믿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말씀하시는 게 9절입니다.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면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것이라고 하여 이적을 보여주지만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장난하시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을 위해 이적을 베푸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기 위해 이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적 자체가 믿음의 원인은 아닌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 이적의 용도에 대해 이렇게 주석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때로는 믿음을 위한 준비를 도와주며 때로는 믿음을 확증해 주는 구실을 한다.” 기적이 믿음 자체의 원인은 아니지만 믿음을 위해 준비시키고, 때로는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길게 드리느냐? 오늘날 성경에 나타난 이적들이 필요한가 했을 때 더 이상 우리는 필요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7).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 당시에는 기록의 형태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 시대에는 기적이 있기도 했지만, 기록된 성경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게 뭐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항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며, 육체의 부패와 사단이나 세상의 사악함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욱 확고하게 세우고, 위로하기 위하여서, 바로 그 진리를 다 기록하게 하셨다(잠22:19-21, 눅1:3, 롬15:4, 마4:4,7,10, 사8:19,20). 이것이 성경을 필요케 하신 가장 큰 이유이다(딤후3:15, 벧후1:19).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그의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던 예전의 방법들은 이제 중단되었다(히1:1,2).” 때문에 성경에서 기적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성경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던 예전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방식이 아닌 겁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기적이 필요로 할 정도로 성경의 기록이 부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충분합니다. 이 신구약의 말씀으로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모든 뜻을 다 밝혀 놓으셨고, 또한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오늘날 복음 사역자를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기적을 동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혹 여러분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처럼 기적을 보게 되면 예수를 더 잘 믿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속히 그것을 성경 앞에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결단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기적이 계속해서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경우들도 있는데, 여기에 속지 마셔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술객들에게 이 능력을 주신 것과 같이, 속이는 자들을 속이시기 위해서 능력을 주시는 때가 있다. 그들은 악령들을 달래서 마술을 행함으로써 훌륭한 체 했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정죄를 받게 마련이었다.”(삼위일체론 3권 7) 애굽의 술객들도 기적을 행하는 자들로 있었지만, 그것은 속이는 자들을 속이기 위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적과 믿음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성경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신명기 29장 2절에서 4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뜻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적과 믿음으로 말하자면 이적을 보여준다고 해서 다 믿게 되는 건 아니란 것입니다. 이적이 믿음을 위한 준비도, 믿음을 위한 확증도 안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보면 이적을 보였는데, 이적에 대한 반응이 어떠냐 하면 예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님을 배척하기까지 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으로 하자면 이적이 바로에게는 더욱 하나님께 대하여 강퍅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이냐? 신명기 말씀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셔야 됩니다. 이적이 믿음을 위한 준비라면 그렇게 준비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주셔야 가능한 일이고, 이적이 믿음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주셔야 가능한 일인 겁니다. 이적을 본다고 해서 다 강화되고, 이적을 본다고 해서 다 준비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적이 베풀어질 때 그때도 궁극적으로는 믿음을 누가 쥐고 계시냐?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고 할 때도 역시 말씀을 듣는 것 자체도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가까운 원인에 속할 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야지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엡2:8).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듣는 것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정리를 하자면, 일단 하나님께서 이적을 통해 믿게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실 때는 이스라엘을 믿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모세도 제외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적이 믿음 자체의 원인이냐 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고는 어떤 이적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의 말대로 믿음을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길 원하셨던 겁니다. 첫 번째 이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알리시고, 두 번째 이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알리시되 더욱 강화하여 그것을 알리시고, 또한 세 번째 역시 그런 목적으로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만큼 하나님 지식에 있어 무와 같은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지식이 거짓된 신앙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애굽의 신과는 다른 분이라는 걸 드러내고자 하셨던 겁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말씀 앞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확인하고, 또한 그런 능력이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시는 데 역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런 이적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란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편에서는 이적을 베푸시든, 아니면 이적이 아닌 일상적인 과정을 통해 역사하시든 동일하게 그 모든 일의 주관자로 계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적의 방법, 그리고 일상적인 방법이 다르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적은 경우 우리가 볼 때는 좀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일상적인 것은 더디게 이루지는 것 같습니다. 이적의 경우 힘이 있어 보입니다. 반면 일상적인 것은 나약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날 성경이 말하는 이적은 없어졌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어떨 때는 실제로 이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일들도 행하십니다. 이때 분별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일이 성경 계시로서의 이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계시로서의 이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성경 기록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이 기록된 성경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는 더욱 믿음을 강화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된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칼빈은 이 이적들 안에는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신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첫 번째 이적에서 지팡이는 목자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만 들고 누구 앞에 서야 하는가 하면 바로 앞에 서야 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런 힘도 없는 지팡이만 들고 매우 큰 권세를 가진 금홀을 대적하는 자로 서야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팡이와 같은 모세를 세우셔서 바로를 두렵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특히 칼빈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격렬하게 휘저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팡이가 뱀이 되어 바로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세가 다시금 뱀을 잡았을 때 뱀이 지팡이가 된 것은 바로에게는 위협이 되고 해로운 것이 되지만, 모세에게는 그 지팡이가 안전케 해 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경우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뱀의 경우 애굽의 왕권을 상징하는데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다시금 지팡이가 될 때 모세가 뱀을 붙잡아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게 되면 뱀을 상징하는 애굽 왕도 한낱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두 번째 이적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극히 왕성하던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단번에 시들게 되고, 또 메말랐던 것이 이처럼 회복하게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어떤 자냐? 궁중에서 미디안으로 쫓겨나 거친 들판에서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비유적으로 하자면 일종의 나병환자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렇게 마치 죽은 자처럼 지내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셔서 부르십니다. 어떤 면에 있어선 나병이 나을 때 그런 회복의 메시지를 더하여 주신 것과 같은 겁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보자면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박윤선). 즉 지금은 애굽의 종으로 마치 나병을 앓고 있는 자처럼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즉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란 걸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적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주신 이적이라면 세 번째 이적은 애굽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에 대한 이적으로 해석합니다. 나일강의 경우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일강을 통해 애굽이라는 나라는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물이라는 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나일강을 통해 많은 상품들을 수출입하기까지 했다고 칼빈은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강물이 피가 된다는 것은 매우 끔직한 저주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애굽은 뱀도 신으로 섬기고, 나일강에도 신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한 것은 그들이 섬기던 신에 대한 심판의 성격도 있는 겁니다. 결국 이 세 번째 이적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며, 저주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지금 모세로 하여금 용기를 주고 계시는 겁니다.
이처럼 세 가지 이적은 다 무엇과 관련 있느냐?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결코 애굽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을 반드시 회복하실 것이라는 것, 반면 애굽에 대해서는 저주와 심판을 행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이적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고 계시다면 믿고 따라야 하는 게 모세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놀라운 이적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사실 앞에서도 모세는 거절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말씀하고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믿음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닌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과 또한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완악함을 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지 믿음으로는 살고자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보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모세를 설득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 없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하고 또 말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만들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하신 겁니다. 부디 이런 말씀 앞에 여러분이 빨리 항복하시고, 더욱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