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3회》
3. 김창룡은 어떻게 간첩 잡는 베테랑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하게 되었는가?
김창룡은 만주 신경역 역무원으로 근무하다 1940년 관동군에 징집되어 헌병부에 보직되었으며, 여기서 특수교육을 받고 내몽골과 쏘련 사이의 국경도시 <하이라루>에 배치되어 간첩잡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 때 김창룡이 3년동안 감시ㆍ 추적하여 잡은 간첩이 중국공산당 소속 <왕근례>와 그 일당 50명이었다.
왕근례 일당을 체포하여 전향시킨 후, 김창룡은 시노무추진대(市勞務推進隊)라고 하는 철도노동자 조직의 감독으로 위장취업하여 그 조직 속에 섞여 있는 간첩을 잡아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2년 동안에도 50건의 간첩조직을 적발하는 전공을 세웠다.
김창룡은 "하이라루"에서 5년 동안 간첩 잡는 일에 전념하다보니, 자연히 간첩의 생리를 잘 알게 되었고 잡는 방법도 최고 수준의 베테랑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랄한 자들인지도 알게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김창룡은 외사촌 동생인 지방 빨갱이의 고발로 전력(前歷)이 탄로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잡혀 모진 매를 맞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여 월남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창룡은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라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김창룡의 메모에서)
4. 초대 군감사령관 이병주 소령의 체포
김창룡은 1946년 5월 월남하여 용산역 광장에서 거지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우연히 옛날 친구 박기병 중위(육군소장 예편)를 만나 전주 3연대로 따라가 사병으로 입대하였다가 이듬해 1월 17일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하여 4월 17일 소위로 임관, 태릉 제1연대 정보과에 보직되었다.
김창룡은 그때부터 간첩 잡는 일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김창룡이 정보과에 보직되자 마자 맨처음 걸려든 사람이 경비대 총사령부 군감사령관(지금의 감찰감과 헌병감) 이병주 소령이었다.
*그 당시는 창설 초기여서 헌병이나 감찰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정보과에서 감찰/헌병 임무를 모두 수행하였다.
경비대 총사령부의 군감사령관도 말만 사령관이지 부하병력이 1~2명밖에 없어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1연대 정보과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래서 이병주 소령의 부정행위를 김창룡 소위가 수사하게 된 것이다.
이병주 소령의 행위는 말이 부정행위이지 실제로는 이적행위였다.
이병주 소령의 부정과 비리란 경비사령부의 공금을 빼돌려 좌익세포 조직 확산에 이용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킬 준비로 문산, 연천 등지에 무기를 숨겨놓은 죄과였다.
이런 간첩행위를 포착하고 확인까지 하였으나, 육군 소위가 상급자인 소령을 검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병주는 최고사령부인 경비대 총사령부의 군감사령관이 아닌가!
그러나 김창룡은 공산주의자는 절대 살려둘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연대장 이성가 소령과 통위부(현, 국방부 전신)의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게 보고하여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해 놓고 수사를 추진하였다.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검거에 들어갔다. 이유는 송호성 장군 자체가 남로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병주는 자신의 지시로 숨겨둔 무기와 탄약이 김창룡 정보팀에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푸락치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고민하다 송호성 총사령관에게 보고하였는데, 송호성은 이병주 소령을 청주 7연대장으로 발령을 내고 당분간 피해 있으라고 했다.
이를 알게된 김창룡은 정보팀을 청주로 급파하여 이병주 소령을 체포하였다.
압송된 이병주는 김창룡 소위가 조사를 마친뒤 군정청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재판 중 김창룡은 군 선배들인 영관급 장교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협박을 당하고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으로 부터는 강제 전역을 시킨다는 협박까지 받았으나, 이병주의 죄상이 명백했고 미군 재판장과 백선엽 중령 등의 적극적인 보호로 무사하였다.
미 군정청 재판정에서 5년형을 선고 받은 이병주 소령은 부평 감옥에서 복역하다 6.25전쟁 초기에 탈옥하여 빨치산이 되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이병주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다.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은 1948년 초에 남파간첩 성시백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에 성시백의 입에서 송호성 장군과 오랫동안 접촉하고 있었다는 진술이 나옴으로써 파면되었다.
그 당시 김창룡의 계급은 새카만 중위에 불과했지만, 군에서 유일한 장군(준장)인 경비대 총사령관을 조사하여 파면시키는 엄청난 일을 해낸것이다.
그당시에는 간첩행위를 한 공안사범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김창룡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엄청난 일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