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개괄(2023)
예레미야 애가 1~5장
(애 3:20-23, 개역)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찬양중에 하나가 예레미야 애가의 노래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선지자이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120년이 지났다.
흔히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와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앗수르의 혼혈이주정책으로 북이스라엘은 이미 민족의 정체성 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당시 남유다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백성 유다가 그들이 욕하던 북이스라엘과 똑같이 이방족속에게 짓밟히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앗수르의 멸망이후 남유다왕 요시아는 애굽의 편에 서야할지 신생 바벨론의 편에 서야할지 선택의 귀로에 서게 되었다.
요시아는 다윗이후 가장 인정받는 정직하고 선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벨론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가는 애굽의 바로 느고의 길을 막아서다 므깃도에서 죽고 말았다.
이때로부터 유다는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애굽이 세운 요시아의 둘째아들 여호아하스를 패위시키고 요시아의 첫째아들 여호아김을 왕위에 앉혔다.
이후에도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몇차례나 발버둥치던 유다는
결국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성전은 완전히 훼파되고 시드기야는 자식들이 눈앞에서 모두 죽임당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인 비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예레미야도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BC 586년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던 유다가 500년만에 멸망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선지자들은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멸망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더러운 이방민족에게 짓밟힐수가 있단 말인가?
현실의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단 말인가?
이방인들의 조롱하는 말처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처참하고 참혹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거룩한 왕 요시야의 죽음이후 열국의 틈바구니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유다의 패망은 조선말기 우리의 멸망사와 너무나 닮아있다.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죽은 후에 유다가 완전히 멸망까지는 20여년의 세월이 흐른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동안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통과 하나님 백성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부끄러움과 수치 그리고 마음의 혼란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른다.
각 시대마다 각 사람마다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우리 앞 세대만 해도 세계대전과 식민지 그리고 보릿고개의 굶주림과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었다.
팬더믹 시대이후 또 한번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 또한 만만치 않은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 우리 선조들이 겪은 그 고통에 비할수 있으랴
저마다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떠올리며 눈물흘리며 애가를 부르는 예레미야와 하나님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바램과 믿음과는 달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느 누구도 고통과 어려움을 피할수 없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환란의 시대를 살아가던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의 깊은 고민이 거기에 있었다.
학생이 학기가 마치면 배운 것을 시험받듯이 우리의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시험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고통속에 낙망하여 믿음을 떠나게 된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시험을 피할수 없다.
우리는 시험을 위해 고통받게 될 것이다. (You must suffer! - John Piper)
그러나 예레미야 애가는 단순히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역설적인 소망을 노래한다. (3:21)
나라는 망하고 자식들은 내 눈앞에서 다 죽임당하고 눈이 뽑히고 사슬에 매여 끌려가는 마당에 무슨 소망이 있다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라~ (3:22)
완전히 멸망하여 모두가 다 죽어야 하는데 그래도 다 죽이지 않으시고 남은 자들이 있지 않냐?
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40대 맞을 걸 한대 감해 줘서 39대 때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란 말일까?
아니면 지금은 하나님이 이렇게 치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시켜 주실거라는 말일까?
그래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실지도 모르겠다.
예레미야는 70년의 기간을 예언했지만 그 말씀을 두고 기도하던 다니엘에게는 70년이 아닌 70이레 즉 490년을 더 참고 기다려야 함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2,000년이 지나도록 나라를 되찾지 못했고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소망하던 다윗의 영광은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눈을 떠서 일어나 또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현실..
차라리 깨어나지 말았으면 이 고통을 피할수 있을텐데...
그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아침에 예례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노래한다.(3:22~23)
현실의 고통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볼수 있는 눈을 비로소 가지게 된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있게 되고 (요 18:36)
현실의 시험을 통해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살후 1:5)
구원은 우리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무너짐으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우리가운데 이루어진다.
그제서야 눈에 보이는 세상에 고정되어있던 어리석은 우리의 눈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있게 되어진다.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시기 위해서는 땅에 속한 요시야의 나라는 망해야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소망은 고통스러운 이 현실이 바뀔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임을 노래하는 것이다.
믿음은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는 우리의 눈이 바뀌는 것이다.
상황을 보는 눈이 바뀌고 나서야 이 시험과 고통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고 (3:33)
하나님을 원망하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킬수 있게 된다. (3:40)
시험과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원수로부터 오는 것이다. (3:52)
예레미야 애가의 이 반전을 볼수 있기를 바란다.
야고보 장로는 시험을 만날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약 1:2)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함을 이룰수 있기 때문이다. (약 1:3)
또 시험을 받을때 이 시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지 말라라고 한다. (약 1:13)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시지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약 1:17)
속지 말아야 한다. (약 1:16)
생각해보라.
아무리 큰 잘못을 저릴렀다고 한들 자식을 죽일 부모가 있겠는가?
사람은 그렇게 할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한다. (사 49:15)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사도요한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또 말씀한다. (요 3:16~17, 요 12:47)
예레미야 애가에는 욥기의 구절이 많이 인용되어지고 있다.
완전한 의인이요 믿음의 사람이었던 욥도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시험받았다.
욥기는 죄가 없는 자도 고통받을수 있슴을 보여준다.
의인 욥도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생을 저주하였다.
아무 죄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욥기의 주제는 욥의 인내가 아니다.
욥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고통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고통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수 있었겠는가?
욥은 엘리후의 책망을 통해 이 모든 고통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게에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심판하여 모두다 죽일 것을 조금 남겨두시는 자비가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멸절시킬려는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을 통해 비록 눈에 보이는 유다는 멸망하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새로운 소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멸망해야지만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할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 극적인 반전이 있을때도 있다.
그러나 핍박당하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그들 앞에 그런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그들이 목베임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사자에게 던져지며 검투사의 칼에 찔려 죽는 비극적인 상황앞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눈에 보이는 지금의 이 현실이 지나가고 나서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소망이 있슴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험은 이론이 아니다.
비록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의 피를 흘리는 그런 고통은 우리에게 없다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우리 각 세대가 겪어야할 많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누가 그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수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잘 못으로 인한 것이든 정세의 흐름속에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우리를 참소하여 고통을 주는 원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편이시다.
비록 우리가 죄를 저질렀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는 없어질수 없고 그의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구원이시다.
그러니.... 아무리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낙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 편이 되시니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남아있다.
포기하지 말라.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라도 그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신다.
거기서부터 믿음의 반전은 시작되어지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더 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진다.
예레미야 애가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소망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