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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좌찬성사천선생김공신도비명
(贈左贊成沙川先生金公神道碑銘)
관찰사인 김징(金澄)공이 나에게 그 아버님 참판공 휘 극형(諱克亨)의 신도비 명을 부탁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관찰사공이 돌아가고 10년이 지났으니, 매양 생각하면 슬픈 감회만 더하도다. 돌이켜 보건데 병들고 쇠잔한 몸이 앉아 있기도 지탱하지 못하니, 필연(筆硯,붓과 벼루)을 다스리기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지난번 그의 아들인 교리(敎理)로 있는 구(構)며 참봉(參奉)으로 있는 유(楺)등이 계속하여, 그의 뜻을 다스려 줄 것을 청함으로 내가 궐연히 일어나 이르기를 이는 나의 죄이다. 하며 마침내 붓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공의 휘는 극형(克亨)이고 자는 태숙(泰淑)이며,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니 고려 때 문하시중에 오른 대유(大猷)의 후손이시다. 마침내 조선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벼슬이 그치지 아니하였고, 증조에 이르러 휘 여광(汝光)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조부 휘 계(繼) 증직이 집의(執義)이며, 학행이 훌륭하고 정산(鼎山) 박주(朴州)의 행장을 보면 선인(善人)이라 하였다.
고(考)의 휘는 인백(仁伯)이고 증직은 좌승지(左承旨)인데, 법도 있는 스승의 소위를 지켰으므로 한때는 많은 명사들과 교유하니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만퇴(晩退) 신응구(申應榘)는 가장 친한 벗으로, 동좌할 때 만퇴(晩退)가 있다가 법도에 응대치 못하고 물러났다 하니, 그는 저명(著名)한 분이다.
어머님은 안동권씨이고, 추봉으로 숙부인에 이르렀고, 현령이신 증 이조판서 대훈(大勳)의 따님이시다.
공은 만력을사(萬曆乙巳1605선조38)년 11월 29일 기해년에 낳았는데, 공의 아버님을 고작 13살에 여의고, 둘째형 극부(克孚)가 당시(唐詩)를 가르치려고 하니 즐겨 배우려하지 않고, 바라는데 성현(聖賢)의 글을 배우고자 한다 하니 둘째형이 크게 기특히 여기었다 한다.
약관의 나이20세로 유학하기를 잠야(潜冶) 박지계(朴知誡)선생을 섬기며 그 문하에서 배우니, 학문이 크게 떨치므로 더욱 힘써 분발하니, 보고 해석함이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지라, 박선생이 그의 빠른 진도를 칭찬하였으며, 그 문하에 제공들이 다들 스스로 이르기를 자신들은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대부인이 명하심이 있어 간간히 과시에 나가던 중, 숭정경오(崇禎庚午1630인조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신 후로는 나가지 아니하며, 이때부터 진심으로 바른 학문에만 힘을 쓰시니 대부인도 다시는 강권치 아니 하셨다.
인조반정 초에 박 선생이 상소로 청하기를,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사당에 바른 예로 입묘(入廟)하게 하려하나, 조정에서 의논하는 무리들이 오래도록 다투기만 할 뿐으로, 결정하지 못하니 공이 또한, 그 사실에 관하여 부자간에 인륜대의를 의롭게 다스리지 아니함은, 옳지 않은 일임에도 스스로 버티고자 한다. 하며 벼슬도 하지 않은 진사의 신분으로 곡진히 주장하여, 이내 극논(極論)으로 상소를 올리니 바르게 되었다.
임신(1632인조10)년 어머님이 서울댁에서 돌아가심에, 운명하실 때로 부터 발인까지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며 통곡하여 마지않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는 3년상을 광주(현 의왕시 왕림) 옛집에서 지키는데, 조석으로 올리는 제수를 반드시 손수 살펴서 갖추어진 것을 확인하였고, 곡을 하며 눈물을 흘릴 때면 혼절할 것 같이 하였다. 삼년을 하루같이 하였는데 일주기인 소상까지는 고기, 과일, 야채 등을 먹지 않았고 삼복더위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날마다 성묘하여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 두지 않았기에, 피골이 상접하리만큼 수척하고 야위어서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갑술(1634)년 공이 30세에 상복을 벗었는데, 박 선생이 무고에 의한 혐의를 받아 앞으로 어떤 처벌을 받을지 예측할 수 없었을 때, 공은 상소 글을 조정에 올려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니 진상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박 선생이 돌아가심에 1년 상복을 입고 받들었으며, 병자(1636인조14)년 호란 때는 충청도 서산으로 피난 갔다가 황간 남전촌으로 옮겨 살았다.
공은 전에도 몇 번 수재로서 추천된바 있더니, 이내 창능참봉(昌能參奉)에 임명 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다시 강원도와 경상도 몇 곳에서 집안 무리들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거처하다 광주 백운산 아래 향리로 돌아와서, 집 한 채 짓고 몇몇 학생들과 학문탐구를 하였는데, 다시금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명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얼마 안 있어 계사(1635효종4)년에 세자를 보위하는 익위사(翊衛司) 부솔(副率)에 명을 받고 나아갔으니, 그 무렵에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과도기에 나라 안팎으로, 변동이 많을 때 여러 선비들이 명나라주의라서,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벼슬길이 현실정치와 순수한 도덕탐구는 다른 것인데, 저들은 도덕의 철학적 탐구는 하지 않고, 현실정치에만 종사한 사람들이 일선에서 물러나 버리면, 현실정치와 도학을 함께 폐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래서 출사를 한 것이다. 곧 익위사(翊衛司) 품직인 정랑(正郎)이 되셨고 전라도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나아갔다.
이때가 효종10년 공이 55세로 부임하고는 몹시 개탄하며, 백성의 살림을 향상시키고 교육에 전력할 것을 결심하였으니, 손수 향리의 규범을 만들어서 백성을 가르치고 학사규칙으로서 선비들을 양성하니, 조목마다 일관하여 간단하고 정연하였다. 시간이 있는 날에는 학사에 자주 들려서, 더욱 열심히 할 것을 타일러서 알아듣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 기풍에 감동하였다.
화순현(和順縣)에는 전부터 필목으로 세금을 내는 장인이 있었는데, 과중하게 부과하여 일정액 세금을 거둔 나머지를 갖고, 병조에서 사욕을 채운 자가 있어 공은 안 된다고 하며, 정액대로만 납부하게 하였다. 곰곰이 살펴서 각종 과잉세금을 탕감하여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 아전 중에는 범죄자가 있었는데, 법으로 사형처분까진 되지 않는 것을 전라감사(全羅監司)가 고집하여 죽이려고만 하자, 공은 끝까지 다투다가 사표를 내고 떠나려 한즉 드디어 사형집행론을 거두게 되었다.
마침 흉년이 크게 든 해 길에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함에 공은 진정, 측은한 마음으로 각방 아전에게 조치하여 관청봉급을 털어서 구조하니,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다. 현감직(縣監職)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려할 즈음에 갑자기 병이 들더니, 계묘(1663현종4)년2월8일 화순(和順) 임소에서 졸(卒)하시니 향년 59세이고, 백운산 아래 선영인 동남에서 서북을 향한 자리에 장례를 치렀으며, 경태용경좌지원(庚兌龍庚坐之原)이고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贈職) 되셨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贈職)되셨고, 현재 묘소는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무추산에 있다.
공은 스스로 호(號)를 사천(沙川) 또는 운촌(雲村)이라 하였는데, 기량과 포부가 장중하고 성품이 정직하여서 저 만치서 만나면 의연하여 범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가까이 접촉하면 어질고 너그러운 것이 비길 데 없었다. 그 학식이 다방면에 달통하여서 선명하였고 실행이 정연하고 마음 두고 처신하기를 한결같이 의리를 기준 삼았고, 이로움과 해로움, 명예와 헐뜯음에 관하여 판단이 분명하여서 그러한 것들로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자존하는 마음을 굽히는 일이 없었으니 스스로 수양하여 터득한 것이 그 만큼 깊었던 것이다. 평소에 학문할 때는 온종일 단정히 앉아서 독서를 하였는데 매양 소학과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자(朱子)의 어록을 담은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은 번갈아 읽으며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치를 끝까지 다함에는 청소하고 손님 응대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음양과 성명(性命)의 근원이며 고금 흥망과 득실까지 철저히 연구하고 검토하였으며 간혹, 투철히 못한 것이 있으며 밥상도 잊고 새벽이 되도록 눈을 붙이지 않았다. 친우와 더불어 산사에서 학문을 토론하기를 여러 날에도 끝나지 않으니 지나가던 소년도 그 말소리가 귀에 익어서 곧잘 이리저리 하더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운 이치를 고수하는 태도는 아니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공과 성선설(性善說) 및 전체대용설(全體大用設)에 관하여 왕복 수천마디로 변론하였는데 만년에는 자기의 주장이 부족한 것을 크게 깨닫고 개정하려고 벌렸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당에 참배하고 어른 앞에서 여쭐 때면 공손한 얼굴빛을 잊지 않았다. 제사를 맞이하면 미리 집안사람들에게 일러서 세수하며 머리 빗질을 청결히 하고 제기와 어육등속은 각각 담당한 사람이 있었으며 제사를 지내고나면 정성껏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벌주었다.
부인과 상대하기를 서로 귀빈을 마주하는 듯이 하여서 출입할 때는 “다녀오리다.” “다녀왔소.” 인사말을 하면서 예를 갖추어 공경하였다. 아들들을 교육하기는 심히 엄격하였고 조그만 잘못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공정한 사람으로 키웠다. 둘째형님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하여 무심히 한 틈이 없었고 종친과 친구를 만나면 더욱 은혜와 의리를 베풀었다.
송나라의 여대균(呂大勻)이 실시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자치규약(自治規約)을 시행하여 오랫동안 향민들이 신뢰하며 복종하였으며 풍속이 일변하였다. 그 후 남쪽 고을에서도 이 규약을 시행하였으니 원래 발상지는 이 곳이다.
살림은 늘 가난하여 죽이나 미음도 끊어질 때가 종종 있었으나 자신의 분수로써 마음 편안하였고 또 정당한 것은 삼가 받았다. 비록 친구가 보낸 선사품도 값이 많이 나가는 것 따위는 사절하였고 관직에 있는 동안은 옛 친구가 보낸 선사품도 값이 많이 나가는 것 따위는 사절하였고 관직에 있는 동안은 옛 친구나 벼슬자리 높은 사람에게는 예물을 일절 보내지 아니하였기로 사람들이 그것은 인정을 외면한 삭막한 일이라고 넌지시 권고 하였으나 여전히 변함이 없고 아들들에 일렀다. “훗날 집에 돌아갈 때에는 만일 물건하나라도 늘린 것이 있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랴” 끝끝내 이 말과 같았다.
공은 두 번 장가갔는데 초취부인은 증 정경부인 광주정씨(贈貞敬夫人光州鄭氏)이며, 갑진(甲辰1604선조37)년 10월 20일에 태여 나셨고, 신미(辛未1631인조9)년 5월 11일에 졸하시니 향년 28세이시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묘는 부좌이다. 친부는 선비(士人) 호(護)이고, 조부는 감사(監司)를 지낸 사위(士偉)이고, 증조부는 증직이 참판인 질(耋)이고, 외조부는 온양방씨(溫陽方氏) 준경(俊慶)이다. 또한 부인은 아들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이 아들이 곧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징(澄)인데 한때의 횡액으로 말미암아 그 재능을 펴지 못하니 군자들이 애석이 여겼다. 딸은 임천조씨(林川趙氏) 세달(世達)이고, 부친은 오(石奧)이고, 4남3녀를 두었으며, 아들 홍상(鴻詳)은 생원이며, 홍빈(鴻賓)과 홍경(鴻慶)과 홍필(鴻弼)이며, 여식은 문화유씨(文化柳氏)유원(柳王爰)과, 함양박씨(咸陽朴氏)여필(汝弼), 안동권씨(安東權氏)유(濡)이다.
후취부인은 증 정경부인 청송심씨(贈貞敬夫人靑松沈氏)이며 계축(癸丑1613광해군5)년 2월 13일 낳으셨고, 신미(辛未1691숙종17)년 11월 2일 졸(卒)하시니 향년 79세이시고, 4남2녀를 두셨다. 친부는 호군(護軍)을 지낸 대해(大氵韰)이고, 조부는 엄(山奄)이고, 증조부는 별좌(別坐)를 지낸 의달(義達)이고, 외조는 생원(生員)인 한양조씨(漢陽趙氏) 해구(海龜)이시다. 또한 부인은 4남2녀를 낳으니 담(澹)과 혼(混)과 순(洵)과 견(涀)이다.
아들 담(澹)은 생원이고, 아들이 없다.
아들 혼(混)은 장수현감을 지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고 후손들은 단양에서 세거 지를 형성하였다.
아들 순(洵)은 진사(進士)와 오위장(五衛將)을 거처 해주목사(海州牧使)와 이천부사(利川府使)를 지냈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아들 견(涀)은 증직이 이조참판(吏曹參判)이고 호는 심암(心菴)이고, 유고집이 있으며, 후손들은 사천(沙川왕림)에 산다.
둘째사위인 군수(郡守)를 지낸 함양박씨(咸陽朴氏)상일(尙一)이고, 부친은 현감(縣監)을 지낸 내창(乃昌)이고, 아들은 수익(受益)과 도익(道益)이다.
셋째사위는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司諫)인 풍천임씨(豊川任氏)원구(元耈)이고, 부친은 군수(郡守)를 지낸 준(濬)이고, 아들은 경(璟)이며 첨정(僉正)으로 있으며 사위는 덕수이씨(德水李氏)문석(文錫)이고 진사(進士)이다. 나의 장인 원두추(元斗樞)공은 공과 동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과 아드님 징(澄) 부자분과 교분이 있는 터인데 공이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있을 때 글월을 보내어 시국을 의논하기에 공이 돌아오면 서로 격려하여 협력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건만 거꾸로 부고를 받았으니, 슬프도다! 비명(碑銘)에 그의 덕망을 알려서 백세에 전하리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찬(撰)
영의정(領議政) 신완(申琓) 전자(篆字)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