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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매국노와 매신노의 공통점>의 줄거리:
72주년 광복절의 대통령 연설 속에서 듣게 된 어처구니없고 마음 아픈 말이 뇌리에 남아 뱅뱅 돕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모두의 자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십자가의 생활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다만 신기하게도 이완용의 매국(賣國)이 비유적으로 보면 우리의 매신(賣神) 행위와 너무 같아 놀랄 뿐입니다. 양자 모두 넓게 팔아 좁게 갖습니다.
매국노와 매신노의 공통점
(시편 4:1~8)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매국노와 매신노의 공통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매국노와 매신노의 공통점’
매국노(賣國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매신노(賣神奴)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어제는 72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14일부터 문 대통령의 활동이 계속해서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면서 친일파나 광복절에 얽혀있는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 대통령의 연설 속에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궁핍해져버린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을 기자들이 취재하였고,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매국노로 불리는 이완용의 자손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도 나왔습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대가로 땅을 엄청나게 받았는데 현재 여의도의 7.7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땅을 때마다 일부씩 팔아넘기면서 그 후손들이 잘 살아왔고 지금도 용인에 있는 땅은 이완용의 증손자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옛날 용인과 지금 용인의 땅값은 상상만 해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뉴스에서는 이완용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고 지금 용인 땅의 주인인 증손자의 이름만 동그라미로 가려져서 나왔습니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여유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내에서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서 시편 4편을 보기로 합니다.
시편 4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확 잡아당기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들어달라고 했는데 그 다음 구절에 기도가 나오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경고성 선언이 나오다가 7절에 가서야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지금 이 시는 앞의 시편 3편과 마찬가지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충신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섰고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서 피난을 나와서 이 시를 썼습니다.
이러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노래가 과거형으로 된 것을 보면 현재 곤란을 겪고 있지만, 이전에도 이런 식의 곤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하셨으니 다시 이전처럼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나를 구원하셨사오니’라고 번역을 했는데, 구원하셨음이 틀렸다고 는 할 수 없지만 이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오늘 우리가 본 표현대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고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번역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어를 찾아보았더니 ‘나를 넓게 하셨사오니’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왕으로서의 입지가 극단적으로 좁아진 상태입니다. 왕궁에서는 쫓겨났고 아들 압살롬에게 죽을까 피난을 나온 상태입니다. 이처럼 왕으로서의 입지가 극히 좁아진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넓게 해주셨던 것을 생각하며, 이번에도 자신의 입지를 넓혀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넓게 해주시는 것이 곧 은혜와 구원을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곤란을 일을 당할 때에 이 시편 4편을 따르면 ‘나를 넓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넓게 해주신다.’라는 것이 단순히 왕권을 회복하거나 좁아진 입지를 견고히 하고 되찾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마지막의 7~8절을 보면 다윗은 현재 상황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압제하는 반역무리들이 곡식과 포도나무 열매가 풍성할 때에 기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으로 인해 더 기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넓게 해주신다는 것이 곧 왕권을 회복함을 뜻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이미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과 만족은 자신을 몰아낸 반역자들이 누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기 때문에 8절에서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라고 합니다. 다윗의 안전함은 왕궁을 굳건히 지키고 왕권을 견고하게 할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반역자의 싹을 자름으로 안전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돈이 많아서 재산의 풍족함으로 안전함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안전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시편 4편의 키워드는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히르하베타 리’라는 말은 ‘내가 마음을 넓게 갖도록 만들어 주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곤란함 속에서 내 마음을 넓혀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또한 이것이 우리가 곤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시사되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삼각구도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이 있고 세상이 있으며 하나님이 계십니다. 시편의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몸 가족 직장 재산 건강 등)과 하나님이 계신 삼각관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비어있는 채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채우려는 에너지가 욕망으로서 작동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려 하느냐 하나님으로 채우려 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본래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이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대신에 하나님을 팔아버리고 이 세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완용이 대한민국을 팔아버리고 여의도의 7.7배나 되는 땅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우리 마음에 하나님 대신 이 세상 것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이즈로 되어있는 마음은 세상 크기에 맞춰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쪼그라들어야 마음에 담은 세상 것을 접촉하며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매국노와 같은 매신노의 행동입니다.
대한민국의 땅이 내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자면 백두산 꼭대기에서부터 한라산 꼭대기까지 한반도는 내 땅처럼 여겨지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저희 아이가 방학을 이용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동아리 활동으로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울릉도에서 출발한 배가 독도에 가까워지면서 시야에 들어오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전율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독도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우기므로 화가 나서 죽겠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도를 보자 전율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의도의 7.7배라는 땅은 크지만 이 한반도라는 영토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땅을 얻기 위해 한반도를 팔아버렸던 마음이 하나님을 팔아버리는 마음과 같습니다. 자녀가 너무 예뻐서 모든 학업을 엘리트 과정을 밟게 하고 졸업해서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결혼할 때에는 최고의 배우자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로 매신노입니다. 마음에서 무한한 크기의 하나님을 팔아버리고 마음을 쪼그라뜨려서 자녀에게 달라붙은 것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의 만족은 짧으면 삼일, 길어도 일 년을 갈 수 없는 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돈에 쪼그라진 마음이 10억이라는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으면 바람이 들어가서 조금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허세이고 꿈입니다. 그러나 이 꿈대로 10억을 모은다 해도 그 기쁨이 삼일이나 한 달도 가지를 못합니다. 10억은 큰돈이지만 하나님 사이즈의 내 마음이 쪼그라들어 10억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힘듦을 느끼는 것입니다. 10억에 만족하기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100억을 모아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이건희 씨나 이재용 씨의 재산이 십 몇 조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만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크기는 본래 하나님의 크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나라를 빼앗길 위기이며 왕궁은 이미 빼앗겼고 자신의 첩들이 아들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치욕적인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곤란함으로 다가왔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을 넓히셨다는 것입니다.
한때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울 때에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단순히 마음을 빈 상태로 놔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마음이 빈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채로 놔두는 것은 존재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지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어있는 마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할 때에 고민과 걱정 근심이 생깁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마음을 조금 넓히는 행위인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려하고 장관이 되려합니다. 그러나 그 직위가 아무리 크더라도 무한하신 하나님보다 클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확장되었다 할지라도 쪼그라들어 수축되는 상태임은 여전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수축된 상태는 무척 힘든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무엇을 얻더라도 기쁨이 없습니다.
다윗이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라고 노래할 때에 다윗은 가진 것을 다 잃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이러한 곤란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지키심으로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것들을 붙잡음으로서 두렵고 곤란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다 보니 그것들이 다 떠나가고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서 마음이 넓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수축 없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수축하면 힘이 듭니다. 바짝 긴장함이 계속 되면 몸살이 날 수밖에 없고 기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넓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마음이 본래 크기대로 확 펴지게 됨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자 다윗은 2~6절까지 피난민답지 않게 대적들에 대해 경고를 하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무서워서 피난을 왔던 다윗이었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마음이 넓어지자 지금 자신을 감싸는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기쁨과 만족의 이유는 곡식과 포도열매의 풍성함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돈이 많아지는 것이고 명예와 건강 등이 풍성해지는 풍요와 다산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아무리 많아도 마음을 넓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넓어진다고 해봐야 하나님만큼 클 수가 없기 때문에 수축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돈 10억을 벌었을 때의 마음과 10조를 벌었을 때의 마음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자면 경미한 차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얻어서 지구를 다 가질지라도 이 지구는 하나님보다 클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은 수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넓어질 방법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자 다윗은 피난 중에도 안전하게 평강을 누리며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대적 압살롬의 무리는 우리에게 돈 문제나 건강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나라 걱정이나 자녀 걱정일 수도 있으며 인간관계나 사업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마음이 넓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에만 넓어질 수 있고, 그럴 때에만 진정한 평강과 기쁨과 만족과 구원은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넓어지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경건한 자들입니다.
경건은 기쁨과 만족도 모르며 엄숙하고 경직된 종교적 윤리성으로 충만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 경건한 사람입니다. 매신노 됨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완용과 그의 후손을 욕할 입장이 아닌 것은 우리는 나라를 팔아버린 매국노 정도가 아니라 나라보다도 무한대로 크신 하나님을 날마다 순간마다 팔아먹는 매신노이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한반도를 팔아서 여의도의 7.7배의 땅을 얻었지만,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팔아서 돈 문제 해결하려고 하고 자식의 형통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 매신노의 체질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붙기 때문에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팔아서 세상 것으로 기뻐하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매국노적 매신노의 행동을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 인정할 때에 마음을 넓혀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에서 매신노 된 체질을 죽은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심으로서 어떤 문제도 깃털처럼 가볍게 해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라는 말씀대로 목동으로 있던 자기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기 위하여 매신노 된 체질을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경건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들어서 쓰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돈 때문에 매신노 되지 않기 위해서 돈에 대해서 죽을 때에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면서 넓어질 것이고 돈 문제는 깃털처럼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오히려 돈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자녀문제 건강문제 직장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펼쳐가시게 될 것입니다. 매신노 됨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서 내 마음이 넓어지는 참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힘으로는 매신노의 체질을 이길 수 없기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사오니, 주님의 십자가에 내 마음을 걸게 하셔서 하나님으로 마음이 넓어지는 참 구원의 감격이 오늘 하루 매 순간 체감될 수 있도록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