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데릭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 ~ 1849)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로 피아노와 곧바로 동일시되는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프레데릭 프랑수아는 그가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원래 이름은 프리데릭 프란치셰크호핀(Fryderyk Franciszek Chopin)이지만,폴란드어 권에서도 프랑스 발음에 맞추어 성을‘쇼펜(Szopen)’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피아노 독주곡은 엄청난 대중성을 획득하여 오늘날까지 피아노 레퍼토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존 필드로부터 차용한<녹턴>을 세련된 살롱음악으로 승화시켰으며,작곡에 폴란드 민속음악을 의식적으로 차용하므로서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민족악파'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 일대기 ■ 성장기 1810년에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계인 아버지니콜라스 쇼팽과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태어나자 곧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의 프랑스어 교수가 되어 집안은 바르샤바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쇼팽은1817년(7세)부터 정식으로 즈브니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그 때 그의 최초의 작품인‘폴로네즈’가 출판되었다. 1818년(8세)에 바르샤바에서 자선연주회에 출연하였고, 1822년(12세)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창설자인J.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등의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피아노연주도 자주 했는데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중학교 재학 때인1825년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1세 어전에서 연주하여 다이아몬드반지를 받았다. ■ 청년시절 1828년에 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쇼팽은 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동물학자인 야록키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스포티니가 지휘하는 몇 몇 오페라와 연주회를 관람하고,멘델스존을 비롯한 저명한 작곡가들을 만났다.돌아오는 길에 포젠(Posen)대공국의 안토니 라트찌비트 공작의 초대를 받아,첼리스트인 공작과 자신의 피아노[실제 연주는 공작의 딸인 반다(Wanda)가 함]를 위한「화려한 폴로네즈(첼로를 위한),Op.3」를 작곡했다. 1829년에 바르샤바로 돌아와서 쇼팽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고,독일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훔멜을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이 해 8월에 바르샤바음악원을 졸업하자 3개월 후에 빈으로 가서 화려한 데뷔를 했으며,프라하와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1829년 가을에는 바르샤바에 돌아와 있었는데,가수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브스카에 대한 사랑에 영감을 받아「Db장조의 왈츠」를 썼으며,이 곡은 그의 사후에‘왈츠 제13번Op.70-3'으로 출판되었다.이 해 가을에는「연습곡집, Op.10」을 착수하고 있었다. 1830년 3월에는「피아노 협주곡 제2번f단조,Op.21」을,가을에는「피아노 협주곡 제1번e단조,Op.11」을 공개 연주했다.쇼팽은 연주자와 작곡가로 명성이 높아지자,이 해11월2일에 그의 친구들과 찬미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서유럽을 향해 직업 음악가의길을 떠났는데,그의 손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넣은 은컵이 들려 있었고 손가락에는 애인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브스카가 준 반지를 끼고 있었다.그러나 이 여행은 두 번 다시 조국을 볼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폴란드의 저명한 음악 역사학자인 야히멕키(Jachimecki)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into the wide world, with no very clearly defined aim, forever." 그는 친구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와 함께 드레스덴,프라하를 거쳐 빈에 도착하자,그들은 고국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터진 폭동의 불안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그러자 친구 보이치에호프스키는 군에 입대하기 위해 즉시 폴란드로 돌아가 버리자 쇼팽은 빈에 혼자 남았는데,그간의 삶은 불안으로 점철된 불행한 나날이었다. □ 11월 폭동(November Uprising)또는 사관생도의 봉기(Cadet Uprising) 러시아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배에 항거하여1830년11월29일 바르샤바에서 일단의 젊은‘제국러시아 육군사관학교’생도들이Piotr Wysocki생도의 주동으로 봉기하자 폴란드의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호응하여‘러시아-폴란드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으나,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러시아 군대에 의해1831년10월에 진압 당한다. 1831년 4월에 한 번 가진 공개 연주회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으나,이 시기에 쓴 것이「스케르초 제1번b단조Op.20」인데 조용한 중간부에 폴란드의 옛 성가를 쓴 것은 그의 고국에 대한 애착을 표출한 것으로 자못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7월에 빈을 떠나 파리로 가는 도중인9월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러시아군에 의한 바르샤바 함락 소식을 듣자 그는 평생 동안 비밀리에 간직했던 작은 일지에“신성을 더럽힌 모독”이라고 폴란드어로 퍼붓고 있다. 이러한 고뇌에 가득 찬 심정이『스케르초b단조,Op.20』과『연습곡c단조,Op.10 no.12 <혁명>』에 음악적 표현으로 잘 표출되어 있다.만약 그가 망명하지 않고 자진해서 조국으로 돌아갔거나,자유로이 조국에 왕래를 했더라면 그의 애국심은 그처럼강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음악은 차츰 우울해졌으며,정열적으로 변해 갔다.피아노 협주곡의 우아한 아름다움은b단조 스케르초의 무서운 강렬함으로 바뀌었다. ▲ 파리 생활 1831년 9월 하순에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이곳에서 안정된 생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당시 파리의 음악 사교계에서 쉽게발을 들여 놓기 위해 저명한 독일 출신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프리드리히 칼크브렌너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그 해 12월에슈만이 모차르트의 오페라<돈 조반니>에 나오는 『<두 사람은 거기서 맺어지리Laci darem la mano>에 의한 변주곡,Op.2』를 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친애하는 신사 여러분,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시하기 바랍니다. 여기 천재가 등장했읍니다.“ 1832년 2월에 가진 공개연주회는 다방면으로 찬사를 불러 모았다.여기서 쇼팽은 그의 ‘가벼운 건반 터치기법’은 대규모의 공연장에는 적합지 못함을 실감했다.그래서 그는 콘서트홀보다 귀족들과 에술가들의 사교 모임인 사롱이나 자신의 아파트 친구들 앞에서 칠 때가 더 좋았으며,후년에는 차츰 공개연주를 꺼리게 되었다. 파리 생활에서 쇼팽은 여러 예술가들과 저명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그의 재질을 보여주어 명성을 얻을 되었으며,오래지 않아 유럽 전역으로부터 모여든 수많은 제자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그가 사귀게 된 명사들로는 헥터르 베를리오즈,프란츠 리스트,빈센초 벨리니,페르디난트 힐러,펠릭스 멘델스존,하이니히 하이네,외젠 들라크루아 등이다.베를리오즈,멘델스존 그리고 리스트의 음악에는 모두 공감이 가지지 않았다.그는 리스트의 허세에는 차츰 싫증이 나서 후년에는 멀어지고 말았으나,베를리오즈와는 친하게 교제를 계속했다. 그는 항상 폴란드의 악센트가 있는 프랑스어를 섰고,자기나라 사람과 같이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는데,폴란드 출신의 델피나 포토카 백작부인과의 우정은 각별하였다. 1835년 여름에는 휴가로 칼스바트(체코의 서부 보헤미아에 있는 온천 휴양지)에 요양 차 와 있던 양친을 찾아갔었고(이것이 최후의 만남이 된다),파리로 돌아오던 길에 드레스덴에들려 바르샤바에서 친하게 지냈던보진스카집안사람들과 옛정을 되 살렸다.그들의 딸마리아는 5년 전까지 쇼팽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이젠16살의 아름답고 지적인 여인이 되어 있었고,쇼팽은 그녀와 사랑에 빠져 들었다. 9월에 칼스바트 근처에 있는 마리엔바트에서 보진스카 가족들과 휴양하고 드레스덴으로 돌아오자 쇼팽은 마리아에게 청혼하고,그녀와 어머니 보진스카 백작부인의 동의를 얻어 약혼했지만,보진스카 부인의 희망으로 약혼은 비밀에 붙이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쇼팽은 건강하지 않아서 고향인 바르샤바에서는 사망설까지 나도는 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혼은 무한정 연기되기에 이르렀고,결국 마리아의 부모는 결혼에 동의하지 않기에 이른 것 같다.마음에 큰 타격을 입은 쇼팽은 마리아와 그녀 어머니로부터 받은 모든 편지를 커다란 봉투에 넣어 봉하고 그 위에 폴란드어로“Mojabieda(나의 슬픔)"이라고 적어 두었다. 쇼팽은9월에 드레스덴을 떠나던 아침에 마리아에 대한 감정을 담은『A단조 왈츠, Op.69-1 <이별의 왈츠>』를 작곡했고,파리로 돌아온 후에는『연습곡f단조, Op.25-2』와 폴란드의 낭만주의 시인 세 사람의 시에 곡을 붙인7곡의 가곡을 자곡하여,이 모두를 마리아에게 보냈다.마리아와의 결혼 계획이 무산되자,쇼팽 앞에는 일생 동안에 함께 예술을 논하고 로맨스를 나눌 폴란드출신의 델피나 포토카 백작부인이 홀연히 나타난다.쇼팽은 그녀를 위해『Db장조 왈츠, Op. 64-1 <Minute Waltz(강아지 왈츠)>』를 작곡했다. ■ 후반생 1836년 가을에 다구 후작부인(리스트의 연인)집에서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04~1876)를 리스트(Listz)에게서 소개 받았다.상드는 작가 오로르의필명이며,그녀는16세 때 수녀원을 졸업하자 곧 지방의 뒤드방 남작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은 후 26세에 이혼하고,두 아들을데리고 파리로 올라와 남장을 한 괴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남자를 편력하다가 쇼팽을 만나기 전에는 연하의 시인 알프레드뮈세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진 후였다. 쇼팽은 상드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해 만나지 않고 있다가1837년 최초의 런던 연주를 다녀와서 다시 만나면서 1838년에는 이들의 연애는 세상에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 되기에 이르렀다. 1838년11월에 두 연인은 상드의 두 아들을 데리고 점차 악화되어 가는 쇼팽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스페인령의 마요르카섬으로갔다. 마요르카섬에의 여행은 처음에는 행복했으나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신앙심이 깊은 주민들의 홀대로 숙소를구하기가 어렵게 되자,부득이 전망은 좋은 언덕에 있는 발데모사수도원 뒤에 옛날에 수사들이 쓰다 방치한 눅눅하고 차가운 집으로 이사했는데,바람이 많아 쇼팽은 ‘바람의 집’이라 불렀다. 섬에 도착한 후에 쇼팽은 흔들흔들하는 낡은 피아노를 빌려 썼으나,파리에 두고 온 자신의 플레엘 피아노(Pleyel : 1757~1837,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가 필요해서 붙여 왔는데, 12월20일에 섬에 도착한 후 세관 통관(세금300프랑 지불)을 거쳐서 39년 1월 5일에야 찾아올 수 있었다(이 피아노는 현재 발데모사박물관에 있는 쇼팽룸에 전시되어 있다).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지내게 되면서,쇼팽의 건강은 아주 악화하여 상드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간호를 받았다.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지나면서 상드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간호를 받았지만 쇼팽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1839년2월13일에 섬을 떠나기까지의5주 동안에 쇼팽은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대표적인 작품으로는『전주곡Op.28-15 <빗방울 전주곡>』을 포함한<24곡의 전주곡집Op.28>, <발라드 제2번,Op.38>의 수정, <2개의 폴로네즈,Op.40>, <스케르초 제3번, Op.39>, <마주르카Op.41>등이다. 그들은 바르셀로나와 마르세이유를 거치면서 몇 개월에 걸쳐 건강을 회복하면서 파리에 도착하자 여름동안의 휴양을 위해 곧바로1839년5월에 노앙에 있는 상드의 별장으로 갔다.그 후에 쇼팽은 상드의 집으로 들어가4명이 함께1839년10월부터1842년11월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그 후에 서로 인접된 집으로 따로 이사하였고, 1845년까지는 행복한 관계는 계속되었다.이기간에 쇼팽은 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대표적인 것은『폴로네즈Ab장조,Op.58<영웅>』이다. 이무렵 그녀의 아들들은 성인이 되었고,큰아들 모리스는 쇼팽을 싫어하고 그의 존재를 비난했고,쇼팽도 차츰 꾀까다로와지고 신경질이 되어 갔다. 1847년에 상드는「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라는 소설을 썼는데,작중 인물의 한사람인 부유하지만 병약한 카롤공은 분명히 실물보다 나쁘게 그려진 쇼팽의 모습 이였다.그녀의 아들들은“엄마는 그 책에서 당신에 관해서 썼다”고 악의 있는 말로 쇼팽을 자극했고,쇼팽은 원고의 교정을 요구했으나 상드는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거절했다.또 이해에 상드의 둘째 아들 솔랑즈가 조각가인 클레생지에와결혼했는데,이것이 말썽이 되어 솔랑즈가 상드로부터 쫒겨나게 되자 솔랑즈가 쇼팽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쇼팽이 상드에게 화해를 권했다.이것이 상드를 격노시켜 둘은 마침내1837년 이래10년간의 관계를 절교하고 만다. ▲ 마지막 해 1848년에 그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리사이틀을 가졌다.그러자2월 혁명이 터져 더 이상의 레슨이나 연주활동이 어렵게 되자,제자인 제인 스털링과 그 언니 어스킨 부인(미망인)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회와 개인적 모임 등에서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였다.여름에는 그녀들과 함께 스코틀란드의 그녀들의 저택에서 지냈다.그는“스코트란드의 귀부인”인 어스킨 부인의 친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는 것을 편지에서 토로할 만큼 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제자였던 스털링 양의 청혼을 받고도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괴로워 하며 거절하게 된다. 1848년11월16일에 런던 길드홀에서 열린 자선연주회에서 고국 폴란드에 대한 최후의 애국심의 발로로 폴란드 난민을 위해 연주한것이 그의 마지막 공개 연주회가 되었다.이 연주로 더욱 건강이 악화 된 쇼팽은11월 말에 파리로 돌아와서 부단히 병마에 시달리면서도작곡에는 열중하면서 겨울을 넘겼다.그러나 레슨을 할 수 없어 치료비를 마련키 위해 고급가구와 값나가는 소유물들을팔아야만 했다. 가족이 그리워진 쇼팽의 요청으로 1849년 6월에 어린 시절에 그에게 최초로 피아노를 가르쳤던 누나 루드비카(LudwikaJędrzejewicz)가 파리로 와서 아름답고 햇빛이 잘 드는 아파트를 얻어 간호했지만, 1849년 10월 17일 새벽 2시경에 사망했다.
▣ 기념사업 1909년에 쇼팽 탄생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리야프노프는<Zhelazova Vola, Op. 37>이라는“쇼팽을 기념하기 위한 교향시”를 작곡하였다. 1926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바젠스키공원에 바츠라프 시마노프스키가 조각한 청동 동상이 건립되었다.애초에는 이동상을 쇼팽 탄생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1910년에 건립할 계획이였으나,디자인 문제로 늦어지다가 세계1차 대전이 발발하여 지연된 것이다.이동상은 세계2차 대전 중에1940년5월31일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가1958년에 재건립 되었으며,이동상 밑에서 매년 여름 일요일 오후에 쇼팽 작품이 연주되고 있다.쇼팽 위의 버드나무 형상의 조각은 피아니스트의 손과 손가락을 상징하고 있다. 2007년까지는 이것이 쇼팽의 동상으로는 가장 큰 것이었다. 이동상과 똑 같은 크기로 복제한 동상이 바르샤바의 자매 도시인 일본 하마마쑤시에 있으며,탄생200주년에는 시카고의 쇼팽공원 호안에도 동상 건립이 계획되어 있다.세계 곳곳에 많은 동상이 세워져 있고,가장 최근에는2007년3월3일에 루핀이 조각한 동상이 중국 상하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27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공 음악 경연대회인<국제 프리데릭 쇼팽 피아노 경연대회>가 설립되어, 5년 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고 있다. 또 정기적으로 두드러진 녹음이나 재녹음 음반에 대한<쇼팽 그랑프리 음반>상이 수여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는 가장 큰 폴란드 음악원인“프리데릭 쇼팽 음악아카데미”와“바르샤바 쇼팽공항”및“소행성3784쇼팽”등이 있다.
◘ 음악 쇼팽의 전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 음악에 집중되어 있다.물론 폴란드시를 텍스트한20여편의 리트,피아노로 반주되는 첼로와 플루트 작품,피아노3중주 등이 있긴 하지만,쇼팽의 재능이 특별히 발휘된 장르는 피아노 독주 분야였다.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 중에서 협주곡2곡,소나타3곡 이외에는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스케르초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작품의 특징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單旋律]한 구성에 있으며,선율의 움직임에 자유스러움을 주기 위하여,반주 쪽을 화음적 패턴으로 함으로써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리듬이나 프레이징에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구조를 쓰고 있으며,또 화음에서도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구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쇼팽은 아이랜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존 필드(John Field,1782~183 7)로부터 차용한 녹턴(Nocturne야상곡)을 깊고 세련된 살롱음악 승화시켰으며,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그는 최초로 발라드(Ballad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담시)와 스케르초(Scherzo)를 별개의 소품으로 작곡하였는데,이들은 쇼팽의 매우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작품이다.발라드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극적이며,시적 표현이 잘 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스케르초는 그 명칭이 암시하는 익살맞은 내용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전주곡의 기념비적 문헌인 바흐의『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 수록된24개의 장〮·단조로 된<전주곡과 푸가>를 그 자신의 <전주곡>의 한 장르로 바꾸었다. * 24개 전주곡의 조성적 배열에서,바흐가 같은 으뜸음조에 의한 장·단조의 작품들을 반음계적으로 상행하는 방식으로 배열한 반면,쇼팽은 관계조에 의한 장〮·단조의 작품들을5도권으로 상행하는 방식으로 배열했다(1번C장조, 2번A단조, 3번G장조, 4번E단조, 5번D장조). <연습곡(étude(에튀드)>은 기존의 피아노 연습곡의 차원을예술적인 차원으로 승격시켰으며,총24곡(Op.10:12곡,Op.25:12곡)으로 구성된 이 일련의 곡들은 피아니스트들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쇼팽은 그의 전 작품 중에서 최초로 인기를 얻은19곡의 왈츠와16곡의 폴로네즈가 있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그 중에는《혁명 연습곡》과《강아지 왈츠》이 있다.《장송행진곡》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즉흥 환상곡》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사육제Op.9》를 쇼팽에게 헌정했다.프란츠 리스트는 그의<시와 종교의 조화>가운데 한 악장인〈장례식(Funérailles)〉을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1849년10월이었다.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폴로네즈53번‘영웅’>의 옥타브 트리오가 연상되는데,그러나 리스트는 이 곡이 같은 달에 죽은3명의 헝가리 동포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라고 말했다. 브람스를 비롯한 젊은 러시아 작곡가들도 쇼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그의<전주곡, Op.28>과<연습곡, Op.10, Op.25)는 급격히 하나의 표준이 되여 리스트의<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교향적 연습곡>및 러시아 스크리아빈의<24개의 전주곡, Op.11>등이 작곡되기에 이르렀으며,후세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계승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쇼팽의 업적은 자신의 작곡에서 의식적으로 차용한 폴란드의 민요적 요소가 후기의 작곡가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켜,체코의 스메타나와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의 이른 바‘민족악파’의 탄생을 촉진하는 역할을한 것이다.
쇼팽의Best 5및Amazone.com_Best 13 * Best 5『박준용<세상의 모든 클래식>,pp.141-142에서』 1. 이별의 곡(Etude No.3 'Tristessé, Op.10) 2. 빗방울 전주곡(Prelude Op.28-15 'Raindrop') 3. 영웅 폴로네즈(Polonaise 'Heroic', Op.53) 4. 즉흥 환상곡(Fantasie Impromptu, Op.66) 5.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 N0.1e단조, Op.11 & No.2 f단조, Op.21
Amazone.com_Best 13 1. Ballade No. 3 in A flat major, Op. 47 2. Mazurka No. 23 in D major, Op. 33, No. 2 3. Piano Concerto No. 2 in F minor, Op. 21 4. Waltz No. 9 in A flat major, Op. 69, No. 1, "L'adieu(Farewell)" 5. Nocturne No. 2 in E flat major, Op. 9, No. 2 6. Berceuse(자장가), Op. 57 7. Fantasy-Impromptu in C sharp minor, Op. 66 8. Etude No. 3 in E major, Op. 10, No. 3 'Tristessé 9. Waltz No. 6 in D flat major, Op. 64, No. 1, "Minute" 10. Polonaise No. 6 in A flat major, Op. 53, "Heroic" 11. 24 Preludes, Op. 28: Prelude No. 15 in D flat major, Op. 28, No.15, "Raindrop" 12. Scherzo No. 2 in D flat major, Op. 31 13. Piano Sonata No. 2 in B flat minor, Op. 35, "Funeral Mar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