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숨겨진 사연들♡
▶언젠가 6·25전쟁중 숨겨진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저술하고 싶은 마음에서 자료를 모으신 분이 계셨는데,
그 중에서 일부를 공개.
◈625를 맞이하여 6.25에 있었던 일화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Episode #1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죽음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과
미국 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시려고 짚차로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 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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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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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 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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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월튼 H 워커 대장(중장으로 전사, 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멋진 미 육군 정장에 네 개의 별이반짝이는
바나나 모자를 쓴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S 워커 미 육군 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 전, TBC-TV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나는 도쿄의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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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는
의전 부대에 맡기십시오.
각하의 휘하에는 반드시 의전 부대가 있습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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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사령관이 뒤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 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때 맥아더 장군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는 합니다.
사랑하는 부하와 그 아들을 한 전선에서 한꺼번에 죽이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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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결코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 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大將이며 미 육군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유망한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월튼 워커 대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얼마 전 미군이 탱크 훈련 중 미선과 효순 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워커힐 호텔은 바로 이런 워커 장군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며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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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짚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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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와 문산 간의 같은 길에서 난 교통사고! 1951년 미8군 사령관을 죽게 한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 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워커 사령관의 에피소드를 알았다면 어떠 했을까....
★Episode #2
워커 중장과 딘 소장
1950년 7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촉으로 경무장한 보병만을 급히 일본에서 오산 전투에 급파한
도쿄의 맥아더 장군은 후속 병력으로 딘 소장 휘하의 24 보병사단을 투입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도취감이 채 사라지지 않은 미군 병사들이 한국전쟁에서 치루게 될 처참한 상황들이 첫 전투인 오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푹푹 찌는 둣한 1950년 8월 어느날 ,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적을
보병만으로도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까지 혼전 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미 24사단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일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사로 잡히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후일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트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3년 동안의 포로생활 중 보여준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적의 포로로 사로잡힌 행위는 결코 훈장을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 하였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은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러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 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딘 장군의 포로생활의 자초지종은
북괴군이 그를 심문할 때 통역을 맡았던 민간인 이규현이 탈출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은 후에 중앙일보 사장과
문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만약 외국에 파견한 한국군 사단장이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 Episode#3
이승만 대통령과 밴프리트 장군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