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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곡 선생(冶谷先生) 조공(趙公)은 휘(諱)가 극선(克善)이요 자(字)가 유제(有諸)인데, 잠야(潛冶) 박 선생(朴先生, 박지계(朴知誡))과 포저(浦渚) 조 선생(趙先生, 조익(趙翼))의 문인(門人)이다. 공은 어러서부터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소학(小學)≫을 읽을 때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보고 개연히 마음속에 감동하여 분발함이 있었으며, 또 ≪가례(家禮)≫를 읽으면서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예(禮)를 익히지 않는다면 날마다 사용하는 사이에 있어 조처(措處)할 바를 모르게 되니, 불가불 먼저 예에 종사(從事)해야 한다.” 하였다.
처음에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공을 따라 배우면서 주자서(朱子書)를 보고 크게 탐독(耽讀)하며 즐거워하여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읽었다. 그리고 그가 평일에 만들었던 정문(程文, 과거볼 때 쓰는 작문 방식)을 모두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天地) 가운데에 서서 문득 제일 등급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 주고 달게 스스로 하류(下流)에 처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공(李公)이 두 분 선생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또 공을 위하여 소개하였는데, 두 분 선생은 우계(牛溪, 성혼(成渾))ㆍ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 이후에 태어나 도학(道學)으로 자임(自任)하는 처지였다. 잠야(潛冶)는 선현(先賢)을 독신(篤信)하고 있으며, 포저(浦渚)는 스스로 터득하는 데 많이 힘을 쓰고 있으나, 그 학문이 모두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삼고 실천[踐履]로써 주(主)를 삼으며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것으로 종(宗)을 삼으니, 학자(學者)들이 그리로 귀의하고 있다. 두 분 선생이 공을 보고 모두 다 애중히 여겼다.
잠야는 맨 먼저 ≪근사록(近思錄)≫을 가져다가 공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사서(四書)의 배움에 들어가는 계제(階梯)이다.” 하고, 마침내 연원(淵源)의 학문(學問)을 다 말해 주었고, 포저는 말하기를, “학자(學者)는 마땅히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로 법을 삼아야 하니, 힘을 다해 배우고서 이루지 못하는 자는 있지 않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땅과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절실한 효력이니, 모름지기 마땅히 스스로 속임이 없게 하는 것으로 선무(先務)를 삼아야 한다.” 하였는데, 공이 일체 그분들의 말에 의하여 높이어 믿고 복응해 익혀서 마침내 이것으로 덕을 이루었다.
인조(仁祖) 초엽에 학행(學行)이 있는 선비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천거되어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조용(調用)되자 일절 ≪소학≫의 도(道)로 여러 생도를 가르치되 몸소 먼저 실천하니, 옛날 스승과 제자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즐겁지 않은 뜻이 있어서 버리고 돌아왔다.
익위사 사어(翊衛寺司禦)ㆍ호조 정랑(戶曹正郞)ㆍ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하고 면천 군수(沔川郡守)가 되었는데,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이었다. 이때 조정(朝廷)에서 새로 청[虜]과 화친(和親)을 끊고 주현(州縣)에 영(令)을 내려 충의(忠義)의 인재를 소집하였는데, 공이 안찰사(按察使)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사력(死力)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재차 징수하는 세금을 감해 주고 관향(管餉)과 어염(魚鹽)의 피해를 혁파하여 민심을 기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병기(兵器)를 수련하고 계획을 빠짐없이 다하니, 병사(兵使) 송영(宋英)이 바라보고 탄복하기를, “정성은 만사(萬事)의 근원이란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는데, 공이 이때에 이미 군수(郡守)를 파하고 집에 있었으나 필마(匹馬)로 달려가 문안을 하려 하였으나, 천안(天安)에 이르자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돌아가 노친(老親)을 받들고 바다의 섬에서 병화를 피하였다. 청병(淸兵)에 항복하였다[城下之盟]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식음(食飮)을 전폐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곧 이어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고 복(服)을 마치자 그대로 자취를 감추고 나가지 않았는데, 연달아 순창 군수(淳昌郡守)ㆍ형조 정랑(刑曹正郞)ㆍ사어(司禦)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무자년(戊子年, 1648년 인조 26년)에 온양 군수(溫陽郡守)에 제수되자 포저(浦渚)가 나오기를 권하면서 말하기를, “고상하고 청결한 것이 참으로 훌륭하여 세상에서 지명(指名)하는 바이나 하위(下位)에 침체되었으니 등용하면 나가고 버리면 물러가 감추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자, 공이 곧 명(命)을 받았다.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포저가 정승이 되자 공의 경학(經學)을 천거하면서 마땅히 태학(太學)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니, 즉시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시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 순창(淳昌)ㆍ익산(益山)의 군수(郡守),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하니, 어떤 때는 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만두기도 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 7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다가 곧바로 또 장령(掌令)으로 부르자, 공이 임금의 부름이 재차 이르렀다고 하여 감히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도성에 들어가 사은(謝恩)을 하니, 임금이 즉시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여 맞으며 이르기를, “바란 지 오랬는데, 이제야 서로 만나보니, 매우 반갑고 기쁘다.”고 하면서 위로하여 묻기를 아주 지극하게 하였다. 물러나올 때에 미처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먹을 물건을 주게 하고 얼마 있다가 본직(本職)으로 경연 자리[經席]에 출입하라고 명하였다. 때마침 겨울 우레의 변이 있자, 공이 상소(上疏)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는 도리’를 극도로 말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공이 비록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힘써 한번 나왔으나 선비로 대우하는 예(禮)가 융숭하고 지극하자, 겸손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매양 임금의 앞자리에서 간곡히 진달하여 면하기를 빌었다. 얼마 안 되어 체직시켜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제수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공에게 이르기를, “또한 가려 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다행히 한가한 관직을 얻었으니 분수를 따라 버티면서 서서히 지나면 마땅히 처리할 때가 있을 것인데, 내가 어찌 불안스레 어제 체직되어 오늘 떠나겠는가? 오직 삼가 직분에 이바지할 뿐이다” 하였다. 세시(歲時)에 또 쌀ㆍ반찬ㆍ땔감ㆍ숯[米饌柴炭]을 하사하는 은전이 있자, 공이 상소(上疏)하여 사양하고 겸하여 잠규(箴規)를 올렸다.
이듬해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년) 정월에 다시 장령(掌令)에 제수하고 재차 패초(牌招)를 명하므로 부득이 나아가 숙배(肅拜)를 하였는데, 갑자기 대궐 아래서 풍질(風疾)을 맞자 대궐 안의 위사(衛士)에게 명하여 견여(肩輿)에 태워 저택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이틀을 지나 경진일(庚辰日)에 마침내 운명하자, 임금이 놀라 슬퍼하면서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산야(山野)의 사람을 억지로 대궐에 나오게 했으니, 나로 말미암아 죽은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매우 아프고 안타깝다.” 하였다. 대개 처음에 공이 병났다는 말을 듣고 즉시 입직(入直)한 어의(御醫)를 불러 정원(政院)으로 붙들고 들어가 구호(救護)하게 하는 한편, 특별히 털옷 한 벌을 하사하여 몸을 덮게 하고 내국 약물(內局藥物)을 사용하되 계하(啓下)를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관(官)에서 상(喪)을 치러줄 것을 명하여 의금(衣衾)과 관곽(棺槨) 등 여러 필요한 물건을 다 갖추게 하고 어필(御筆)로 문금(文錦)과 현훈(玄纁)을 특별히 하사하였으며, 또 연로(沿路) 관청에 명하여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고 묘(墓)를 만드는 역부(役夫)를 주게 하니, 이는 모두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아! 공의 영명(令名)이 일찍 나타났으나 평생 겸양함으로 자신을 지키다가 만년(晩年)에야 성군을 만나 인정한 대우가 한창 깊어갔는데, 갑자기 겨우 64세의 수(壽)로 세상을 떠 마침내 배운 학문과 경륜을 다 펼 수 없게 되니, 유식(有識)한 이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지행(至行)과 순성(純性)이 있어 부모를 섬기되 아이 때부터 이미 부모님의 뜻을 순히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무릇 이빨과 머리카락과 손톱ㆍ발톱을 모두 거두어 감춰두면서 말하기를, “부모가 남겨 주신 몸이다.” 하였다. 12세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겨울에 눈이 오면 문득 묘소에 가서 무덤의 눈을 깨끗이 쓸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또한 비를 맞으면서 묘의 주변을 살펴보곤 하였다. 매양 부모를 다 모시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면서 슬프게 여겼고, 매양 ≪맹자(孟子)≫를 읽다가 삼락장(三樂章)에 이르면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부친 적순공(迪順公, 적순 부위(迪順副尉) 조경진(趙景璡))을 섬기되 정성을 다하였고, 뜻과 물질[志物]을 함께 갖추어 봉양(奉養)하였다. 더러 경사(京師)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 사모하기를 어린아이와 같았고, 정월 설이나 동짓날을 만나면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태우며 고향을 바라보고 재배하여 부모를 생각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폈다.
적순공이 70세에 풍질에 걸려 앉고 눕기를 사람의 부축으로 한 지가 5년이었는데, 공이 근심어린 얼굴로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여 침을 맞을 땐 반드시 먼저 시험삼아 맞았고 대소변으로 더럽혀진 것은 공이 직접 세탁하였으며, 일찍이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지면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떨어뜨리어 소생하게 하였다. 적순공이 병중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회(膾)를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몸소 고기를 잡거나 낚시질을 하여 이바지해서 일찍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는데, 운명하기에 미쳐 다시는 회를 먹지 않았다.
거상(居喪) 중에 슬픔이 예(禮)에 넘쳐 이미 졸곡(卒哭)이 지났는데도 거친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채소나 장(醬)을 먹지 않았다. 제사를 행할 때는 밤새 자지 않고 제사를 지낸 뒤에도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인하여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제사가 겨우 지났는데 문득 스스로 태만히 하는 것은 매우 여경(餘敬)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만약 연고가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행사(行事)하기를 기다려서 반드시 의복을 갖추고 갓을 쓰고 앉아 있었고 비록 잠시 자리를 옮기더라도 신주를 받들어 옮겨 봉안하여 하루도 사당 곁에 사람이 없게 하지 않았다.
서모(庶母)를 섬기는 데도 또한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다. 자매(姊妹)의 남편을 대우함에도 동기간(同氣間)과 다름없이 하였다. 여동생이 과부가 되고 가난했는데, 그 자녀를 교육하여 장가들이고 시집보내기를 제때에 하게 하였고, 아들을 가르치되 엄하고 바르게 하여 반드시 부지런하고 삼가게 하였으며,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에 성실하고 신의 있게 대하여 소원하고 천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았다. 경사에 축하하고 상사에 조문하며 어려운 이를 돕고 궁한 이를 돌봄에 모두 그 정의를 다하였다. 시골에 사는 어떤 사람이 형제간에 싸우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그 마을에 우거하자 홀연히 변하여 화평해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에게 감화되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와 두 분 선생(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와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상사(喪事)에 모두 기년(朞年)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고, 부인(夫人)의 기신(忌辰)에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뒤에 또 상소(上疏)하여 이공(李公, 이명준)의 청백(淸白)을 아뢰어서 포장하여 기록됨을 받게 하였고, 나라의 기일[國忌]에는 원근(遠近)을 따질 것 없이 가식(家食)에서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승하(昇遐)하자 공이 그때 온양(溫陽)에 있었는데 죽을 마시고 점석(苫席)에서 자면서 조석으로 곡하기를 친상(親喪)과 같이 하니, 온 고을이 그를 위하여 시장에는 술을 팔지 않고 들판에서는 농가(農歌)를 부르는 자가 없었다. 매양 임금의 은사(恩賜)가 있으면 문득 절하고 받는 예(禮)를 행하고 임금께 올리는 데 관계된 물건이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大門)밖에 나가 지송(祗送)하였다. 도성에 들어가서는 감히 길 한가운데로 다니지 않고 임금이 다니는 길[輦路]을 피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종일토록 게으른 형용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되 실천할 것을 생각해 자제(自制)하여 혼자만 알고 있는 곳에서 더욱 조심을 하였으며, 가난함에서 편안히 여겨 일찍이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더러 선물이 들어오는 일이 있을 경우 털끝만큼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장차 몸이 더러워질 듯이 하였다. 벼슬살이할 때에는 간결하고 박하게 하여 일찍이 ≪맹자(孟子)≫의 뜻을 얻어도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장인[外舅] 최공(崔公)은 가업(家業)이 조금 넉넉했는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가 먼저 죽어 후사가 없게 되자 뒷일을 공의 아들에게 부탁하려 하였는데, 공이 굳게 거절하고 일가의 자제를 취하여 후사를 삼기를 권하였다. 본래 노래와 여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소시(少時)에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10여 년간 홀로 살았고 상배(喪配)를 함에 미쳐서도 다시 첩을 얻지 않았다.
평생 일찍이 화복(禍福)과 득상(得喪)으로 기뻐하고 슬퍼함에 두지 않고 모두 만나는 것에 따라 순리로 받아들였다. 일찍이 범 문정(范文正,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상(名相) 범중엄(范仲淹))의 ‘먼저 걱정을 하고 나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을 외우면서 말하기를, “그의 마음씀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라 하겠는가? 구구하게 한 몸의 득실로 걱정하고 즐거워하는 자야말로 누추하도다.” 하였다.
음양(陰陽)ㆍ복축(卜祝)ㆍ방술(方術)의 종류에 이르러서는 일체 말과 의논에서 끊어 버리고 오직 집에 혹시라도 재이(災異)가 있으면 문득 그에 대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을 하며 옷을 폄하고 밥을 감하면서 말하기를,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잘못됨을 고하는 것인데, 이치상 마땅히 두렵게 여겨 수신하고 반성해야 한다. 어찌 가정과 나라가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군(郡)을 다스리되 평이(平易)하게 하여 백성에 가까이하고 아랫사람들의 심정에 통하도록 하기에 힘을 썼으며, 고식적(姑息的)인 방법으로 백성들의 칭찬을 요구하지 않았고, 어지럽게 법을 고쳐서 뒷날에 폐단을 끼치지 않았다. 문묘(文廟)의 석채(釋菜)와 사직단(社稷壇)과 성황당(城隍堂) 등의 제사에 재계하고 청결을 다하는 것을 반드시 직접 행하였으며, 횡사(黌舍)를 수리하여 서적을 갖춰 두고 제생(諸生)들을 나오게 하여 몸소 가르쳤다. 일을 만나 재단하여 처리하되 권세(權勢)와 이해(利害) 때문에 억지로 부합하려고 힘쓰는 바가 있지 않았고, 부세(賦稅)를 거두는 데는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두곡(斗斛)을 잡게 하였다.
관장(官長)을 섬기되 공경으로써 하였고 이서(吏胥)들을 부리되 노복(奴僕)처럼 하였으며, 동료 관리끼리 교대하여 인계를 받을 때는 모두 다 은혜로운 뜻이 있었으므로 있는 곳마다 어진 마음이 나타나게 소문이 나서 오랠수록 더욱 추억하고 생각을 했으니, 이는 대개 공의 기질(氣質)의 품수(稟受)에 양덕(陽德)이 많았으므로 효제(孝悌)의 행실은 가정(家庭)에서 시작되었고 목인(睦婣)의 실상은 친당(親黨)에서 믿게 되었다.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촉함에 있어서는 온화하게 항상 자애(慈愛)와 측달(惻怛)의 마음이 있었으며,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부터 임금을 섬기는 마음으로 삼았고 집에 거처하는 행실로부터 벼슬살이하는 행실로 삼은 것이 모두 이 마음을 말미암은 것이고 억지로 힘쓴 것이 없었다. 타고난 성품에서 얻은 것이 이미 이와 같았는데, 사우(師友)로써 차츰 나아가고 학문(學問)으로써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겉과 속이 한결같았고 숨겨져 있거나 나타남에 있어 두 마음을 갖지 않았기에 한번 말하고 한번 행한 것이 모두 후생(後生)들의 법식(法式)으로 삼을 만하여서 지금 다 글로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에서 보면 또한 공은 독학(督學)하고 역행(力行)한 군자(君子)였음을 알 수가 있다.
현종(顯宗) 때 도신(道臣)이 공의 효행(孝行)을 위에 알리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향중(鄕中)의 선비[章甫]들이 또한 상소를 올려 공의 학문과 천리(踐履)의 실상과 효우(孝友)하고 청백(淸白)한 행실에 대해 진달하니,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어렸을 때에 스스로 일록(日錄)을 만들어 무릇 날마다 하는 일을 모두 글로 써서 스스로 반성하였는데, 과오가 있으면 문득 문을 닫고 스스로 매를 쳤으며, 책의 첫머리에는 ‘사친효 사군충 사사경(事親孝事君忠事師敬)’ 아홉 글자를 써 놓았다. 두 분 선생을 찾아뵘에 미쳐서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어서 그 뜻을 구하고 또 경전(經傳) 속에서 수신(修身)하고 존심(存心)하는 법(法) 수백 조목을 가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이름을 ≪폄기요결(砭己要訣)≫이라 하고 소매 속에 항시 넣고 다녔다.
또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의 생각에서 얻은 것을 간단하게 기록하여 삼관기(三官記)라 하여 궁리(窮理)하고 격치(格致)한 것을 징험해 보고 매양 옛사람의 훌륭한 언행(言行)을 보면 반드시 마음으로 사모하고 손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상목편(常目編)이라 하고, 더러 뜻과 맞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인조(仁祖) 때 계운궁(啓運宮, 인조의 사친(私親)인 인원 왕후(仁元王后) 구씨(具氏)를 가리킴)의 상사(喪事)에 군신(群臣)들의 복제(服制)에 대한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는데, 사계(沙溪) 김 문원공(金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마땅히 남의 후사(後嗣) 된 예(例)에 의하여 백숙부모(伯叔父母)로 칭하고 복(服)은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입어야 한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임금의 어머니는 부인(夫人)이 아니다’라는 문구(文句)에 따라 시마복(緦麻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중(重)한 대종(大宗)을 가진 자는 마땅히 그 소종(小宗)을 강등하되 칭호(稱號)는 마땅히 부모(父母)로 하고 복은 마땅히 부장기복(不杖朞服)을 따라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두들 다 “군신(群臣)들은 복이 없다.”고 하였는데, 잠야 선생(潛冶先生, 박지계(朴知誡))만은 홀로 이르기를, “마땅히 ‘할아버지에게 나라를 받은 자는 그 아버지를 위하여 참최(斬衰)를 한다’는 예(禮)를 써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하고 군신(群臣)은 종복(從服)으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공의 견해가 잠야 선생의 뜻과 합치되어 이에 설(說)을 지어 변명(辨明)을 하였다. 또 잡기(雜記) 두 권과 유문(遺文) 약간권(若干卷)이 있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선대(先代)는 한양인(漢陽人)이다. 8대조 조온(趙溫)은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 세 가지 공훈에 책록(策錄)되어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고조(高祖)는 조경양(趙敬良)이며, 증조(曾祖)는 조곤(趙鵾)이고, 조부(祖父)는 조흥무(趙興武)이며, 선고(先考)는 조경진(趙景璡)으로 모두 벼슬하지 않고 가문의 공로로 한산(閑散)한 품계(品階)에 가자(加資)되었다. 적순공(迪順公, 조경진)은 학문에 힘썼으나 불우하여 향리(鄕吏)에서 제생(諸生)들을 교수하였는데 거인장자(巨人長者)라고 추대하였고 포저 선생(浦渚先生, 조익(趙翼))이 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선비(先妣)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진사(進士) 이치림(李致霖)의 딸이다. 인자하고 양순하고 효성 있고 공경스러워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배위(配位)는 강화 최씨(江華崔氏)로 첨지(僉知) 최찬(崔贊)의 딸인데, 증(贈) 숙부인(淑夫人)이다. 공보다 1년 뒤에 태어나고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떴는데, 성품이 어질고 검소했으며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제사(祭祀)를 받드는 데 성의와 공경이 갖추어 지극하였고, 몸을 부지런히 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재산을 키우는 데 방도가 있었다. 공이 서제(庶弟)와 동거(同居)를 하였는데, 부인(夫人)이 아우의 아내 보기를 한 형제처럼 하였으며, 인척간(姻戚間)에 화목하고 이웃을 돕는 데 있어 일절 공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았다. 최 부군(崔府君)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삭망(朔望) 때마다 신위를 설치하고 곡하기를 해를 넘겨 하다가 마침내 슬픔에 몸이 수척하여 죽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다오.” 하였다. 덕산현(德山縣)의 대성산(臺城山) 신좌 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이 죽자 마침내 봉분은 같되 광중은 다르게 합폄(合窆)을 하였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조창한(趙昌漢)과 둘째아들 조성한(趙晟漢)은 모두 현감(縣監)이고, 막내는 조정한(趙晸漢)이다. 장녀는 참봉(參奉) 이광윤(李光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舍人) 이은(李垠)에게 시집갔다. 맏아들 조창한은 1남 조백(趙栢)과 1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신순(申洵)이고, 둘째아들 조성한은 7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장(趙棖)ㆍ조총(趙楤)ㆍ조강(趙棡)ㆍ조방(趙枋)ㆍ조광(趙桄)이고 그 나머지와 딸 하나는 아직 어리다. 막내 조정한은 1남 조근(趙根)과 3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다. 공의 맏사위 이광윤은 6남 1녀를 두었는데, 이홍의(李弘毅)는 도사(都事)이고, 이홍저(李弘著)는 현감(縣監)이며, 다음은 이홍서(李弘緖)ㆍ이홍조(李弘祖)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작은사위 이은은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이신석(李信錫)ㆍ이휴석(李休錫)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나 윤증이 소싯적에 탄옹(炭翁) 권공(權公, 권시(權諰))의 문하(門下)에서 놀았는데, 옹(翁)도 또한 잠야(潛冶)의 문인(門人)이었다. 매양 공의 덕행(德行)을 칭찬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는데, 그 뒤에 선군자(先君子)께서 공을 한번 만나보고 옛날에 사귄 벗과 같이 여기시어 거듭된 서찰[札翰]의 왕래로 그 의리가 참으로 얕지 않았다. 다만 나 윤증은 병들어 칩거하는 못난이라서 마침내 제자가 되고 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평생(平生)의 한으로 여기고 있다.
현감(縣監) 형제가 모르고 묘갈명(墓碣銘)을 서로 부탁하였다. 거듭 생각해봐도 나는 학문(學問)이 고루(孤陋)하고 문장(文章) 또한 졸렬(拙劣)하여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나, 오직 이름이 빗돌 끝에 새겨지는 것을 다행히 여겨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대강을 모아 서술하고 명(銘)으로 이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라 하는 말은 다만 천리를 따를 뿐으로, 알고 행하는 것 오직 이것일 따름이다. 혹이라도 그렇지 않고 명예와 이익을 위하면, 큰 근본을 이미 잃어버려서 비록 선이라도 또한 거짓이다. 공은 아름다운 기질이 있어 일찍이 스스로 뜻을 세웠네. 의지하여 돌아갈 곳을 얻음에 미쳐서는 이 핵심의 뜻을 연구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몸소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말미암고 밖으로 통함이 모두가 내가 해야 할 일, 이것으로 몸을 마칠 뿐 다른 할 것이 없네. 이름이 실상에 맞지 않았고 벼슬이 덕만큼 차질 못했으나, 오직 그 실지의 마음만은 후학(後學)에게 전할 만하네. 내가 공의 말을 외워서 묘 빗돌에 새기노니, 참람됨은 두렵지만 거의 부끄러움은 없네.
[네이버 지식백과] 조극선 [趙克善]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