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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초기 기독교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1) 박해를 받으며 시작된 기독교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면 늘 평안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늘 박해 가운데 살았다. 기독교는 지난 2,000년 역사 동안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으며 발전해 왔다.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구걸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기적을 행한다. 그리고는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 일로 사도행전 4장에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잡아 가둔다(4:1-3). 이처럼 교회는 그 시작부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이후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직분자가 선택되고, 그중 한 사람인 스데반이 사역을 시작하는데 역시 유대인들에게 잡힌다(행 6:12).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다(행 7:59-60).
이렇게 교회는 초기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는 예루살렘에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한 박해였는데, 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위의 도시로 흩어지는 계기를 만들었고(행 8:1), 여러 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다. 사도행전 9:2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것을 보면 이미 그곳까지 기독교 신자들이 도주하였음을 알 수 있고, 사도행전 9:32-43을 보면 룻다(Lydda), 사론(Sharon), 욥바(Joppa) 등 유대 지방에 흩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1:19에 의하면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해서 페니키아(베니게, Phoenicia), 키프로스(구브로, Cyprus), 안티오키아(안디옥)까지 흩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예루살렘에서 사두개인의 박해가 있었고(행 3-5장), 이어서 바리새인의 박해(행 8-9장), 헤롯당의 박해가 있었다(행 12장). 이러한 유대인의 박해는 이후 로마의 박해로 이어진다.
2)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
처음에 로마인은 기독교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유대교의 한 분파겠거니 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에 대해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아가야의 총독인 갈리오에게 데리고 가서 말한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행 18:13) 이 말을 들은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14)...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로마가 기독교인들에 대해 취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당시의 로마는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문제에 관여하기를 거부하였다. 다만 폭동이나 기타 난동이 생겨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일이 있을 때는 로마인들이 간섭하였다.
그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8:2에 언급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한 것이다.
사도행전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51년경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축출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기독교의 복음 전파가 유대인 사이에 너무나 많은 난동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년-130년 이후)가 쓴 책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restus)의 선동으로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가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크레스투스’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그리스도)의 다른 철자로 간주한다. 즉, 그 당시 로마에서 발생한 사건은 기독교 복음 전파가 유대인 사이에 많은 난동을 가져왔으므로 황제가 이들을 한꺼번에 축출해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이 칙령으로 인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했다(행 18:2).
하지만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로마인이 기독교인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인이 즐기는 생활을 따라 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겨 참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과 달리 로마 신전에 가거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아무리 재미있는 격투경기가 있어도 콜로세움에 가지 않았다.기독교인들은 폭력을 즐기는 것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경기를 싫어했다.
로마인들은 국가를 최고의 선(가치),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였으므로 국가는 모든 일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최고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평소에는 국가에 충성하지만 국가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신본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뒤엎고 개조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직업선택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제의 제복을 만드는 일, 이교도 의식에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일, 학생을 가르치려면 이방신의 신화가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 교사가 될 수도 없었고, 병원에 취직할 수도 없었으니 병원은 로마의 신의 보호를 받으며 운영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은 로마의 법과 문화에 상당히 부딪혔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대부분 타협하고 살지만,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3) 네로와 로마 대화재 (AD. 64년) 그리고 박해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로마의 5번째 황제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 AD 54-68년 통치)때 였다.
네로는 황제가 된 뒤 처음 5년 동안 가정교사였던 철학자 세네카(Senca)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령을 만들며 성공적인 통치를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위대한 꿈과 향락욕에 빠져 그를 사랑하던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증오를 받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형제, 어머니, 아내를 죽이고,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도 죽였다.
로마 대화재
네로가 통치하던 A.D. 64년 7월 18일에 로마시에 불이 났다. 대형 화재였다. 대부분이 목조건물이던 로마의 화재는 5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도시의 절반이 넘게 불탔다. 로마 시민은 분노가 폭발했다.
로마 시민들은 네로가 로마에 불을 붙였다고 의심했다. 평소 네로의 행동이 워낙 괴팍했기 때문이다. 네로가 자신이 생각한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렀고,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음악을 연주하며 시를 읊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도시가 불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침통한 마음을 표현한 시를 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이 이야기도 일부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면 자신의 보물들, 수집품들은 지켜야 했을텐데, 이 화재로 인해 자신이 수집했던 물건들 대부분이 다 타버렸고,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네로가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는 점 때문이다. 비록 예술에 빠져 살기는 했지만, 네로가 그 정도로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네로는 긴급하게 소방대를 조직해서 불을 끄도록 했고, 이재민이 된 수천 명의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개방했다. 최대한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자의 이야기가 화재의 불길이 번지듯, 퍼져나갔고 그 분노를 모조리 네로를 향해 쏟아붓게 된다.
네로는 갈수록 퍼져가는 자신을 향한 의혹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네로 자신의 평가를 더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네로에 대한 불리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갔다. 네로는 시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로마를 다시 재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네로가 로마를 불태웠다는 사람들의 의심을 없앨 수는 없었다.
결국 네로는 꾀를 내었다. 로마에 불을 낸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이 세상은 곧 불타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네로의 꾀는 그럴 듯 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희생양이 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여 자신의 궁궐 정원에 나무를 세워 매달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불태워 죽였다.동물의 가죽을 입혀서 개들이 물어뜯게 하기도 했다.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으며, 네로의 궁정에서 야외파티를 할 때 산 채로 매달아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네로의 이러한 누명을 사람들이 믿었던 건, 평소 기독교인에 대한 소문도 한몫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많았다.
기독교인들이 성찬식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을 가지고는 기독교인들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거짓 소문이 돌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도 오해의 소지가 되었다. 근친상간한다는 오해가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런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나누는 식사를 가리켜 ‘아가페’(agape, 사랑의 연회)라고 했는데, (우리말로는 애찬(愛餐)이라고 한다) 그 말도 성적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로마서 16:16(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에 근거한 ‘거룩한 입맞춤’이 예배 중에 행해짐으로 인해, 역시 문란한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게 만들었다. 예배에 참석해 보지 못한 로마인들에겐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소문이었다. 이러한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은 로마 시민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더 문제는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는데,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교도의 풍습이 가득한 로마 사회에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시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네로의 박해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로마시 밖에서의 박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이 박해는 극도로 잔인했지만, 제국의 수도에 국한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전 재산을 잃은 시민들의 분노와 네로의 광기가 맞아떨어져 시민들도 처음엔 열광했다. 하지만 차츰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네로의 광기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로는 68년 로마 상원의 지원을 받은 반란에 의해 퇴위되어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년-117년)의 기록에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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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 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 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 필라티우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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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박해는 이후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시대에 평화를 누리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 다시 계속되고, 이른바 10대 박해가 계속된다. 그 중에 핵심되는 박해만 몇 가지를 살펴보자.
4)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의 박해
티투스(Titus)의 뒤를 이어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도미티안, 51년-96년)가 황제가 되자(81년) 상황이 바뀐다. 그는 로마 제국의 11번째 황제다.
그는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는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로 박해했다.
도미티아누스도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관심하였다. 황제가 된 뒤 로마 전통의 신들을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들이 죽고 나면 신으로 대접받지만 자기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신으로 존경받기를 원한다며,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른바 황제숭배 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로마 전 지역에 황제를 모시는 신전이 건축되었으며 금은(金銀)으로 된 자신의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국가 질서를 깨뜨리는 반역죄로 낙인찍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이런 정책은 당연히 유대교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을 하며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을 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하도록 하여 핍박을 가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도 이때 밧모(Patmos, 파트모스)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일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외로이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다 장래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을 받아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로와 같이 결국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원로원은 60대에 접어든 원로원 의원 네르바(Nerva) 를 황제(96~98년)로 선출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뒤 5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시대를 맞아 1세기 동안은 평화로운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①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 AD 96-98) ②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117) ③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AD 117-138) ④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AD 138-161) 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180)등 이다.
5) 트라이아누스 혹은 트라얀 황제의 박해와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트라이아누스(Traianus, 98-117년 통치, 트라얀) 황제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 황제의 통치 말엽까지 기독교는 위협 아래 있었지만, 소아시아 비두니아(Bithynia, 비티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 2세(Pliny the Younger, A.D. 61-113)와 트라이아누스황제 사이에 오갔던 서신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 색출은 금지되었다.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은 행정력 낭비라고 보았다.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 동안은 박해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여 처벌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하는 자들, 둘째,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 셋째,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트라이아누스황제는 플리니 2세에게 보낸 회답에서 적어도 분명한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셋째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대표적인 속사도 중의 한 사람인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트라이아누스황제 치하에 순교했다. 이그나티우스의 나이는 아마도 70세가 훌쩍 넘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180)의 박해와 폴리캅의 순교
A.D 161년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180)는 그 시대 계몽사상의 지성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황제와 같이 허영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텐트 생활을 하며 국정을 수행하였으며 명상록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으나 점차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고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바다 조개 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짐승의 밥으로 던져 졌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폴리캅과 순교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폴리캅은 서머나(스미르나, Σμύρνη, 현재의 터키 이즈미르) 교회감독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이그나티우스 친구였으며 후일 이레네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폴리캅(Polycarp)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180) 황제가 통치하던 155년에 서머나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 한 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바울 서신들과 베드로서, 요한일서 등이 인용되어 있다.
서머나교회의 목회자 폴리캅(Polycarp)이 순교시에 했던 말은 유명하다. 당시의 재판관이 폴리캅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폴리캅은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한 나의 왕 그리스도를 저주할 수 있겠소?”
결국 그는 155년 화형을 당해 순교당했다. 이때 재판관이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길은 꺼지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화형을 기다리면서 폴리캅은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내가 이러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아멘.”
펠리카타스와 7명의 아들의 순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사람 중에 유명한 사건으로 과부 펠리키타스(Felicitas)와 그녀의 일곱 아들들의 순교가 있다. 펠리키타스(Felicitas)는 귀족으로 세례를 받은 부인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로는 과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으며, 자선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이 열심한 부인 때문에 귀족 집안이던 그녀의 집안에 있던 우상들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이교도의 사제들이 그녀를 고발하였다.
로마 총독이 회유와 협박으로 신앙을 부인하라고 하자, 펠리키타스는 “나를 위협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 해도 죽음을 통하여 더욱 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외쳤다.이에 심문관이 그럼 죄 없는 자녀들마저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만일 그들이 신자라면 영원히 살도록 힘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을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그들을 각기 다른 형벌로 죽임으로써 모두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성녀 펠리치타(Felicity)로 불린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저스틴 마터)
유스티누스 (Justinus, 100~165년), 영어표기에 의해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라고도 부른다.
100~110년경 팔레스타인의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던 변증가였다.
유스티누스는 165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핍박 때 참수당해 죽었다.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순교자들의 의연한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유스티누스는 그 역시 순교를 당했으며 이후에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라고 불렀다.
7) 박해 가운데 신앙과 거룩을 지킨 초대교회
교회가 박해 받는 상황이었기에 살아남기도 급급한 처지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가운데도 신앙을 지켰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하고 확대되고 강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 보다는 고난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박해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결과 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구주이심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세례에 있어서도 엄중한 심사를 요구했다. 우상숭배자, 포주, 검투사, 점성술사, 마술사의 입교는 강하게 거부했다.교육기간이 끝난 뒤 세례 대상자를 선발할 때는 교육기간 동안 생활 전반에서 전향적인 발전이 있었는지를 심사했다.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과거의 삶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것, 삶의 방식, 사사로운 습관, 세상을 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신앙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그리스도교를 말살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순교자들의 신앙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결과만 빚어냈다.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믿고 이겨냈다. 박해가 커지고 고통의 강도가 더해갈수록 기독인들의 기도는 더 깊어졌고,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더 강하게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보다는 고난 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초대교회는 핍박과 박해에도 꾸준히 로마사회에서 퍼지고 성장했다. 로마인들 중에는 기독교의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평등을 가르쳤고, 당시 로마 사회에 비해 여성에 대한 권위가 있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소외되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았기에 이방인 개종자가 점점 많아졌다.
무엇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자들의 의연한 태도에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핍박과 그것을 사랑과 진리와 무저항으로 이겨낸 성도들 간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유명해지게 만들고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특히 사도들과 교부들의 순교는 기독교가 생명있는 그 무엇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가에 융합되지 않으려 한 교회의 태도는 훗날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가 서로 뒤섞일 수 없으며 반드시 구분되어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명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이와 같은 고대교회를 가리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대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8) 카타콤(catacomb) 혹은 카타콤베(catacombe) 시대 (AD 60~100년)
네로가 죽은 후 1년간 로마는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다가 암살당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통치하던 때에 기독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후 기독교는 오랫 동안 핍박과 박해를 받는다.
로마의 핍박이 심해지자 그리스도인은 마침내 카타콤(catacomb)으로 숨어 들어갔다.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묘지들이 발견되면서 모든 지하 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카타콤은 로마인이 무덤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카타콤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처음 사용된 것은 3세기 후반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유해를 산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하면서부터다. 이후 이 용어는 의미가 확대되어 모든 지하묘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었다가 그뒤 다시 또 의미가 확대되어 모든 지하 시설물들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카타콤(Catacomb)은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 묘지이다.
카타콤은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터널형 통로를 사방으로 뚫었고, 계단을 만들어 2~5층 정도의 여러 층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 벽에는 모두 약 600만 명에 이르는 성도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갑바도기아에서 발견된 카타콤은 2천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로마 근처에는 60여 개의 카타콤이 있으며, 그 안에서 약 960㎞의 통로가 발견되었다. 로마 근교에 있는 카타콤은 지하 통로의 길이가 500㎞ 이상 된다. 로마의 카타콤 중 칼리스토 카타콤은 묘역(墓域)만도 4만 5천 평에 달한다. 그물처럼 얽혀져 있는 통로들은 여러 층으로 파여 있으며, 깊이 들어간 곳은 지하 20m가 넘을 정도이다. 그곳에 묻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대략 10만여 명이나 된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인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교회였고,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지하 묘지의 통로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고, 각 층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지하 묘지는 대부분 4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좁은 통로와 계단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은 그 통로의 벽에 구멍을 뚫고 안치했다.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이교도들도 죽은 자를 카타콤에 장사하였다.
카타콤은 통로를 좁게, 그리고 미로처럼 만들어서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출구를 찾거나 되돌아갈 수 없었다. 카타콤의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어둠 앞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카타콤은 깊은 흑암과 밝은 하늘의 소망이 교차되는 곳이었다. 카타콤에서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끊임없이 연락하고 접촉하면서 소식을 듣고 양식을 공급받았는데, 이러한 일들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다.
아주 어두운 곳이었기에 그곳에서 나올 때는 거의 시각장애인이 되어 나올 정도였고, 약 10평 정도의 작은 넓이의 땅에서 400명이 찬송을 하였고, 전염병이 돌면 1/3이 죽었다고 한다.
이크쑤스(그리스어: ἰχθύς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라는 암호를 썼는데,이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또한 동시에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물고기 문양은 초대 교회 시절 로마제국의 박해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은밀한 암호이자 표식이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땅에 물고기 형태의 곡선을 그리면 맞은편 사람이 나머지 곡선을 그려 물고기 문양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서로 신분을 확인하였다.
8) 기독교 역사 가운데 계속된 박해와 핍박
기독교의 박해는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 있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순교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네로 치하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치하의 박해 등 초기 로마 황제 치하의 박해가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박해는 없었다가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에 교황에 의한 박해가 있었다. 이때는 참된 신앙으로 인한 박해였다.
1900년대 일제 강점기의 한국교회가 박해를 받았고, 현재 북한 교회가 북한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이 어렵지 않다. 그러니 감사하자.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 복음으로 인해 박해 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혹여나 우리에게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이겨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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