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상가2 / 장시백
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도 어둠이 등을 보이며 달아나야만 하는 새벽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밝은 세상에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거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몸뚱어리만 겨우 챙겨서 숨어드는, 세상의 또 다른 음지에서도 낮과 밤이 자리다툼을 하느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부도난 지하상가에 십여 개의 방을 만들어놓고 임대업을 하는 강 노인에게서 벗어난 일호와 춘란은 벚꽃이 만개한 성남시의 어느 작은 공원에서 하객도 없이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남한산성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강 노인은 지하상가의 남은 공간을 빽빽하게 채워 방을 만들어 세를 놓았다. 일호가 비워놓은 1호실엔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고물을 줍는 30대 청년 광철이 들어왔다. 광철은 부모가 남기고 간 유산으로 유통업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하여 알거지가 된 후,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중고트럭을 하나 장만했다. 고물 줍는 일은 공사판에서 일 할 때보다 수입은 적었으나, 체력이 약한 광철은 일이 고되지 않고 시간이 좀 더 자유로운 일을 찾았었다. 광철이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춘란이 살았던 2호실에는 7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는데, 삐쩍 마른 체구에 신장은 꺽다리처럼 크고 목소리는 괄괄했다. 그런데 광철의 방으로 그 노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는데 영어로 말하는 소리였다. 방 사이의 벽은 방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괄괄한 목소리에 광철은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봐, 젊은이! 담배 좀 밖에 나가서 피우면 안 되겠나? 담배냄새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옆방의 노인이 벽을 두드리며 소리치자 광철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이 방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이봐요, 영감님! 내가 원래 방에서는 담배를 안 피우는데, 영감님이 짜증 나게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입니까!”
“아니, 이 어린놈이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소리를 쳐!”
노인이 방에서 나와 광철의 멱살을 잡았고, 갑자기 지하상가가 시끄러워지자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모두 보고만 있었고, 뒤늦게 강 노인이 나타나서 서로 멱살을 잡고 엉겨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어허, 이 사람들이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왜 싸움질이여!”
강 노인은 두 사람을 방으로 들여보내며 말했다.
“들어가서 진정하고 있다가 한 시간 후에 내가 부르면 두 사람 다 창고 방으로 좀 와, 내가 화해시켜 줄 테니.”
한 시간이 지난 후에 광철과 2호실 노인은 강 노인의 창고로 갔다. 창고에는 진열대 위로 여러 가지 공구들이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 잡다한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는데 한쪽 구석 테이블 위에는 소주 몇 병과 방금 강 노인이 직접 요리한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들어있는 프라이팬이 놓여있었다.
“내가 오늘 안 그래도 새로 들어온 두 사람 불러서 한잔하려고 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싸움질이여!”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강 노인이 소주병을 들고 두 사람에게 술잔을 건넸다. 광철은 강 노인의 술잔을 받고 나서 벌떡 일어나 강 노인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방음도 안 되는데 밤이나 낮이나 통화하는 소리에 짜증나 죽겠습니다. 그런데 왜 전화할 때는 영어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미안하게 됐소. 주의하리다. 내가 필리핀에서 살다가 와서 국제전화를 많이 해서 그렇소.”
“저도 죄송합니다. 이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습니다.”
세 사람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 노인은 한때 잘나가던 주먹이었는데 다 늙어서 마누라한테 쫓겨나 수년간 집에 못 들어가고 지하상가에서 숙식한다고 했고, 광철은 사는 게 바빠서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해봤다고 했다. 2호실 김 노인은 젊어서 대기업에 근무할 때 필리핀으로 국외출장이 잦았는데, 그때 필리핀 여자와 사귀게 되어 딸을 하나 낳았고, 그 사실이 들통 나 이혼하고 나서, 위자료 등으로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필리핀에서 살다 왔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한국에 다시 오셨어요?”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져가서 사업했는데 다 털어먹었어. 여기서 돈을 좀 벌어서 또 가려고.”
그러자 강 노인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니, 다 늙어서 무슨 일로 돈을 벌어?”
“글쎄, 뭐라도 해야지. 필리핀에 있는 딸이 대학을 다니니 뭐라도 해서 학비를 보내줘야 해.”
“한국에는 자식들이 없는가?”
“왜 없겠어. 아들, 딸 다 있는데 날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아.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게지. 그래도 날 아버지라고 따르는 놈이 하나 있으니, 내가 그놈 때문에 살지.”
날씨가 더워지며 지어진 지 오래된 지하상가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여기저기 빗물도 새고, 벽에는 곰팡이가 유적지의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처럼 피어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밝은 세상을 향한 어둠의 도전은 눈물겹다.
7호실에는 중년 부부가 새로 들어왔다. 대형식당을 운영하다가 망해서 많은 빚을 지고 채권자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하는데, 부부가 함께 새벽에 트럭을 타고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데, 트럭 짐칸에 여러 가지 공구와 청소도구들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건설현장을 다니며 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주변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그 중년 부부를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쩌다가 저런 지경까지 되게 했느냐고 하며 남자를 향하여 한심하다는 투로 혀를 끌끌 찼다.
중국에서 왔다는 5호실 아줌마는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고, 그 옆방에는 50대 중반의 친구 사이라는 두 명의 아저씨가 함께 살았는데 매일 새벽에 인력사무소에 나갔다가 일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광철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트럭을 몰고 다니며 폐지와 빈 병, 그리고 고철을 주웠다. 고철값이 많이 내려간 후로 오랫동안 오르지 않아 부지런히 다니지 않으면 일당을 벌기가 어려웠다. 김 노인은 강 노인의 소개로 마트에서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작은 승합차로 배송을 원하는 손님들의 물건을 배달했는데 승강기가 없는 오래된 저층 아파트의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었지만 70대 노인으로서는 꽤 괜찮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강 노인은 빗물이 새는 곳을 찾아서 수리해 보지만 임시방편으로 땜질을 하는 정도였고, 악취를 해결해 달라는 입주자들의 요구에 환풍기를 달랑 하나 사다가 달아놓은 게 전부였다.
“이봐, 광철이라고 했나?”
김 노인이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광철을 불러 세웠다.
“네, 어르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좀 들어 주겠나?”
“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필리핀에 있는 딸이 방학 동안에 한국에 와서 지내기로 해서 내일 온다는데, 내가 마트에 얘기했지만, 휴무를 내지 못했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나 대신에 공항에 나가 내 딸을 좀 데려와 줄 수 없겠나?”
“네, 그러시군요. 당연히 제가 도와 드려야죠. 내일 몇 시에 도착하죠? 공항에서 만날 장소 알려주시고 사진도 있으면 좀 주세요.”
“고맙네. 쪽지에 적어서 사진과 함께 줄 테니 잘 좀 부탁하네. 딸이 한국말을 배워서 의사소통은 될 게야.”
김 노인은 딸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 비행기 도착시각, 만날 장소를 적은 쪽지를 광철에게 건넸고, 광철은 다음날 일찍 시간에 맞추어 공항을 향해 트럭을 몰고 나갔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간간이 차가 밀려 광철의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조금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고, 김 노인의 딸과 만나기로 한 공항의 고객안내데스크 앞에서 사진을 보며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색이 거무스레한 외국인이 광철의 앞에 나타났다. 긴 생머리에 입술이 약간 튀어나왔지만 밉지 않은 얼굴이었고 마른 체형을 가진 여자였다.
“마리엘?”
“Yes, I’m Mariel.”
“안녕하세요. 저는 김흥수 씨가 보낸 고광철입니다.”
“반갑습니다.”
마리엘은 한국말로 대답하며 밝은 미소로 광철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광철은 마리엘의 손에서 커다란 여행 가방을 가로채서 끌고 가며 트럭을 주차해 놓은 장소로 마리엘을 안내했다.
“청소를 못 해 차가 좀 지저분합니다. 방향제는 뿌렸지만, 담배냄새가 좀 날 겁니다.”
“지저분?”
“아, 좀 더럽다는 뜻입니다.”
광철과 마리엘은 트럭을 타고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리엘은 서울의 모습에 놀라는 듯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탄성을 연발했다.
“한국은 처음이죠?”
“네, 파파의 나라에 꼭 와보고 싶었어요. 창문을 좀 열어주시겠어요? 한국의 바람을 맞고 싶어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자 뜨거운 바람이 세차게 들어와 마리엘의 머릿결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향수 냄새가 광철의 코를 자극했다.
지하상가에 도착하자 강 노인이 마리엘을 반겼다.
“필리핀에서 온다고 하던 김 씨 딸이구먼. 듣던 대로 이뿌게도 생겼네. 김 씨가 얼마나 딸 자랑을 하던지.”
“안녕하세요.”
“김 씨가 얘기해서 내가 빈방을 청소해 놨으니 여기 이 방을 써요. 여기서 젤 크고 좋은 방이여.”
“감사합니다.”
“김 씨가 오늘 저녁에 밥을 산다니까 광철이 자네 일찍 들어오게.”
“네, 어르신.”
마리엘은 강 노인의 안내에 따라 11호 방에 짐을 풀었고, 광철은 창고에 있던 선풍기를 꺼내 깨끗이 닦아서 마리엘에게 갖다 주며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하고 일하러 나갔다.
저녁시간이 되자 김 노인이 다른 날보다 일찍 마트에서 퇴근했다.
“마리엘, 내 딸!”
“파파!”
김 노인과 마리엘이 부둥켜안았다.
“마마는 잘 있지?”
“네, 파파를 보고 싶어 해요.”
“그래, 이 파파가 돈 많이 벌어서 빨리 마마한테 가야지. 우리 마리엘, 배고프지? 얼른 밥 먹으러 가야겠구나! 강 사장, 밥 먹으러 가요! 광철이는 아직 안 들어왔나?”
광철이 좀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기다리던 일행은 강 노인이 안내하는 근처 정육식당으로 가서 돼지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했다. 마리엘은 삼겹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광철이 강 노인과 김 노인의 술잔에 소주를 따르고 나서 마리엘에게도 권했는데, 마리엘은 소주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하며 맥주를 먹고 싶다고 했다. 광철은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여 마리엘에게 따라주었다. 마리엘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밥과 함께 고기가 익기가 무섭게 집어먹었다. 김 노인과 강 노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고 광철은 마리엘의 모습이 무척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광철?”
“네, 제 이름이 광철입니다.”
“광철 아저씨, 친절해요! 감사합니다.”
광철과 마리엘의 대화에 강 노인이 끼어들었다.
“광철이 이 사람이 젊은 사람치고는 부지런히 일도 열심히 하고, 정도 많은 사람이었구먼! 얼굴도 잘생겼고 맘에 쏙 드는 친구여.”
강 노인의 말에 김 노인도 거들었다.
“처음엔 담배냄새 때문에 오해했는데 사람은 두고 봐야 안다니께. 젊은 사람이 사업하다가 잘못돼서 이 고생이니 안 됐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여기 강 사장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네는 아직 젊고 부지런하니까 잘 될 거야. 힘을 내게.”
“어르신들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같이 한잔하시죠.”
광철이 건배를 제안하자 모두 술잔을 부딪치고 나서 단숨에 잔을 비웠다. 마리엘도 맥주 한 컵을 한 번에 마셨다. 마리엘의 발그레해진 얼굴을 보고 김 노인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고, 술에 취한 듯 힘이 풀린 광철의 눈에는 마리엘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광철? 아저씨? 오빠? 호호호. 잘생긴 오빠.”
“우리 딸, 마리엘이 맥주를 많이 마셨네. 그만 일어서지!”
김 노인이 식대를 냈고, 네 사람은 식당을 나와 지하상가로 돌아와 각자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광철은 늦잠을 잤다. 전날 밤에 술을 먹으면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지하상가는 조용했다.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바로 옆 김 노인의 방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모두가 일하러 나간 지하상가는 낮에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간혹 쥐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날따라 지하상가를 홀로 지키던 강 노인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엘이 있는 11호 방의 문이 열렸다. 짧은 반바지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민 소매 티셔츠를 입은 마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외출하려는지 손가방을 든 마리엘이 광철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광철? 오빠!”
“어! 오빠? 어디 가려고요?”
“한국 동네는 어떤지 구경하려고요. 같이 갈래요? 오빠!”
“밖에는 꽤 더울 텐데,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한국, 많이 보고 싶어요.”
광철은 마리엘을 트럭에 태우고 성남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야탑역 근처에 주차하고 밥을 먹으러 분식점에 들어갔다. 김밥과 떡볶이, 라면도 달라고 했다. 마리엘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잘 먹는 것 같았다. 분식점에서 나와 야탑역 광장을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버스킹을 하는지, 몰려든 군중 속에서 경쾌한 리듬의 음악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리엘이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마리엘의 몸은 음악에 섞여 흔들거렸고 이따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광철은 그런 마리엘의 모습을 보면서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하며, 다음으로는 어디로 안내해야 할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놀이공원 갈래요?”
“네, 좋아요.”
“차는 여기에 놓고 전철 타고 가요. 거기에 가면 굉장히 높은 건물도 있는데, 나도 아직 안 가봤어요.”
두 사람은 전철을 타고 잠실역을 향했다. 그곳에 가서 놀이기구를 탔고,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건물에도 올라가 보았다. 그러고 나서 어둠이 깔린 시간에 석촌호수를 거닐었다. 마리엘은 계속 밝은 표정으로 서울의 경관을 보고 탄성을 질러댔다.
“한국,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마리엘, 이제 가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어르신이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두 사람이 지하상가에 도착하니, 김 노인이 출입구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화가 잔뜩 나 있는 얼굴로 광철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 너, 우리 마리엘을 꼬드겨서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뭐 하다가 온 거여!”
“파파, 아니에요! 오빠 잘못 없어요.”
“오빠는 무슨 오빠! 내 이놈을….”
김 노인이 광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광철은 김 노인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놈 봐라! 지난번에 나한테 대들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갔냐?”
“죄송합니다.”
광철은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그때 강 노인이 나타나서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말했다.
“광철이가 구경시켜 주느라고 그랬나 본데 뭘 그려! 동네 시끄럽게,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
“너 이놈 우리 딸한테 흑심을 품었다간 내 가만 안 둬.”
그 후로 광철은 매일 트럭을 몰고 새벽부터 나가서 밤이 늦도록 일을 하다가 들어왔다. 마리엘은 방 안에서 책을 보는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 덥지 않은 화창한 날이었다. 솜사탕같이 흰 구름 아래로 붉은 장미가 만개한 공원에서 광철이 마리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노랑나비와 흰 나비가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춤을 추듯 날아다녔다. 두 사람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한몸이 되어 입을 맞추었고, 그 주위로 나비 떼가 몰려들어 두 사람을 축복하는 듯했다. 감격에 겨운 광철이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무더운 여름 밤, 광철은 잠에서 깨어난 후로도 한동안 몸을 떨고 있었다. 무슨 결심이라도 했던 건지, 성남시 안에서만 일했던 광철이 광주, 이천, 여주 등 경기도의 남부지역을 트럭을 몰고 다니며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간밤에는 꿈을 꾸느라 잠까지 설쳐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었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마리엘이었다.
“아파요? 밖에 트럭이 있어서….”
“아뇨, 좀 피곤해서요.”
“파파 무서워요?”
“아뇨, 왜요?”
“친절한 아저씨, 요즘 아니에요.”
“아!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야 해요. 그래야 더 친절해질 수 있어요.”
“좋은 사람이에요. 오빠.”
“밥 먹었어요?”
“아니요.”
“가요.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광철은 마리엘을 데리고 동네를 다니며 마리엘이 좋아할 만한 음식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광철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고광철 씨가 맞나요?”
“네.”
“여기는 병원인데요. 김흥수 씨 아시죠?”
“네.”
“김흥수 씨와는 어떤 관계이시죠?”
“김흥수 씨는 아는 분인데,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느냐고요?”
“김흥수 씨가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계시는데, 보호자를 찾다 보니 그분 휴대폰에 고광철 씨의 전화번호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보호자 맞아요. 병원 어딥니까?”
교통사고란 말에 깜짝 놀란 광철은 병원의 위치를 물어보고 나서 급히 서둘러 마리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로 달려갔더니 김 노인은 응급처치를 마치고 수술실로 옮겨졌다고 했고, 치료를 위해 아직은 면회할 수 없다고 했다. 광철과 마리엘은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고 마리엘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광철은 마리엘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별일 없을 거라고 위로했다.
“김흥수 씨 보호자분!”
“네! 어떠세요?”
“치료는 잘 됐어요. 마취상태라서 시간이 좀 지나면 깨어나실 거예요. 갈비뼈와 머리를 다쳤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병실로 들어가서 옆에 계셔도 돼요. 절대로 움직이게 하시면 안 되니 주의하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광철과 마리엘이 김 노인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김 노인은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의식이 없이 잠들어 있었다. 마리엘은 또다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광철은 마리엘을 안아주었다.
마리엘은 매일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김 노인 곁을 지켰고, 광철은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며 음식과 필요한 물품을 조달했다. 마리엘은 광철이 친오빠처럼 느껴졌다. 광철도 십여 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나서, 고향을 떠나온 후로 혼자 떠돌며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애를 느꼈다. 김 노인의 상태는 두 사람의 지극정성 때문인지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다.
“광철아!”
“네, 어르신.”
“이놈아, 어르신이 뭐여! 부모님도 안 계시다니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불러.”
“네, 아버님.”
“내가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광철이 네놈이 처음에 내 멱살을 잡았을 때, 난 네놈의 눈을 보고 알았지, 근본이 선한 놈이라고.”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놈아! 마리엘이 아니었다면 넌 나한테 계속 대들었을 거라는 걸? 허허허, 광철아!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딸 마리엘을 네가 좀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잘못되기는요!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마리엘 곁을 지켜 주셔야죠.”
“내 방에 가면 가방 안에 통장이 하나 있다. 그 돈 찾아서 마리엘에게 주고, 곧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그때까지 나 대신에 잘 좀 보살펴 줘. 그 돈은 우리 딸 시집갈 때 쓰려고 꼭꼭 숨겨놓았던 건데, 마리엘 엄마도 아파서 일을 못 하니 일단 그 돈으로 학비도 하고 생활비로 쓰라고 해. 내가 일어나면 또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벌어서 내 마지막 할 일은 하고 가야지.”
김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광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시 밖에 나갔던 마리엘이 들어오자 광철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오빠, 왜 울어? 또 파파가 그랬어?”
김 노인과 광철이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광철은 마리엘을 트럭에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리엘이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오빠, 가기 싫어!”
“싫겠지! 아픈 파파 때문에 그렇겠지만, 필리핀에 엄마도 계시니 그런 말 하지 마.”
“아니, 그거 아니고.”
“그럼, 뭐?”
“바보!”
“파파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학교 잘 다니면서 엄마 돌보고 있어. 파파는 내가 잘 모시면서 돈도 많이 벌 테니.”
“내년에 학교 졸업하면 꼭 한국 회사에 취직해서 한국에 와서 살 거야. 마마도 함께 파파랑 살 거야.”
“그래, 꼭 그렇게 될 거야.”
광철은 공항 주차장에서 마리엘이 탄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혼자 서서 계속 같은 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꼭 그렇게 될 거야. 마리엘!”
“그래, 꼭 그렇게 될 거야. 마리엘!”
“그래, 꼭 그렇게 될 거야. 마리엘!” [끝]
첫댓글 마음이 푸근해 지네요 장국장님은 소설도 잘 쓰십니다 타고난 글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