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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1장 18-21절
대속,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이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는 비록 이 땅에서는 잠시 잠깐의 고난을 거치겠지만 그 마지막은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그 영광의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 영광의 은혜를 온전히 소망하는 것으로만 있어서는 안 되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주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되 마음과 생각,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우리도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모든 것은 버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한 분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아들 된 자들도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 영광의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처럼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자일지라도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부패로부터 죄가 나올 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조차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스스로는 거룩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을 레위기 20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20:7-8) 명하시지만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형식은 명령이지만 명령 안에 약속을 포함시켜 명하시는 형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나태해서는 안 된다는 차원에서 명령이 있기도 한 것이기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한 자가 될 것을 권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위해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들 된 우리 역시 거룩함에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따라 보시지 않으시며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언급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모든 일에 대하여 공의로 판단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말한 것처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와주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더욱 힘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룩을 위해 말씀이라는 방편으로 사용함으로 거룩에 힘써야 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 나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택자라도 구원에 있어서 취소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 성도의 견인에 대한 부분 3항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단이나 세상의 유혹, 그들 속에 남아 있는 강한 부패성, 자신의 보존을 위한 방편들을 게을리함 때문에 심각한 죄에 빠지거나(마26:70,72,74), 얼마동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음으로써(시51:표제,14),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사64:5,7,9, 삼하11:27), 성령을 탄식케 하고(엡4:30), 자기들의 은혜와 위로의 방편들 중에 얼마를 빼앗기고(시51:8,10,12, 계2:4, 아5:2-4,6), 마음이 굳어지고(사63:17, 막6:52, 16:14), 양심이 상처를 입고(시32:3,4, 51:8),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욕되게 하고(삼하12:14), 자기들에게 일시적인 심판을 초래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시89:31,32, 고전11:32).” 영원한 심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지 않고 거룩을 위해 주께서 주신 방편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게으르게 되면 일시적인 심판, 즉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더더욱 두려움으로 우리의 구원을 살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15절 말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 왜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인데, 지난 시간에 본 17절 말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은 두 번째 이유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기 때문에 거룩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리기 위해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비교적으로 설명합니다.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대해 매튜 풀 주석은 너희의 선조들 혹은 너희의 선생들과 지도자들로부터 전승을 받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각종 규례와 의식들로 해석을 합니다. 헛되다는 것은 그런 각종 규례와 의식들이 의와 구원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 조상의 전통’(갈1:14)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해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보낼 때 수신자는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너희 조상이 물려 준 것은 헛된 행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 방법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는 이상 조상으로부터 물어 받은 것은 구원과 상관없는 그런 헛된 행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위 이 세상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금과 은인데, 그것으로 대속함을 받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도 대속함을 받지 못했다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대속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아니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대속함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흠과 점이 없다는 것은 허물과 결함이 없는, 온전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고, 우리와 같은 영혼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와 모든 면에 있어서 같지만, 그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시험에 넘어가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히4:15). 그래서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어린 양과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의식한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는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구약 시대 율법 아래에서 매일 같이 희생제물로 드려졌던 어린 양, 좀 더 특별하게는 유월절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이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헛된 행실로 말미암아 죄만 쌓고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어린 양의 모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베드로는 이 두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구약 시대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불러 저들을 어떻게 대속하여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신약 시대로 와 구약에서 예표 된 분이 누구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대속되어 구원함을 받았는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즉 구약이든 신약이든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없이 대속함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구약의 경우도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그러나 구약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실 그리스도를 대다보도록 하기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짐승의 피 자체가 죄를 사하는 힘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증거 합니다(히10:4). 그럼 구약 백성들은 우리와 같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것인가? 어떤 이들은 그렇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죄 사함을 받았는데, 바로 희생제사를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믿음으로 우리와 동일한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약 백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 백성이 그림자로 보는 형식이라면 신약 백성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로 보는 형식입니다. 지지난주에 설명한 것처럼 구약 백성보다 더 판명하게, 보다 더 분명하게, 보다 더 부요하게, 보다 더 풍성하게 보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 백성에게는 이런 점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고,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은혜를 받고 있는 자로 있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금, 은, 보화가 많다 할지라도, 그래서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결코 가장 큰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우리가 대속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가장 큰 상급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대속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금과 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복을 버리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마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헛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이전 생활로 돌아가기에 바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헛된 행실, 다시 말해 죄로 물든 행실을 대속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헛된 행실이 익숙하기 때문에 익숙한 그 행실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리시고 죽으시기 위해 친히 인성을 취하시고 결국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피를 흘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피의 가치는 결코 인간이 흘리는 피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준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시지만 모든 택자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만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헛된 행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왜 우리의 헛된 행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는가? 결국 지난주에 살폈던 말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벧전1:14-15).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거룩에 힘써야 합니다. 결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의 대속을 위해 흘리신 그 피를 헛되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17절 후반부에 있는 말씀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빌2:12).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취소될 수 없지만, 취소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태하게, 게으르게 살아선 안 되고 너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목적을 아는 자로서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그네로 살 동안입니다.
다시 19절로 오시면 보배롭다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수식하고 있지만 그의 피,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계십니다. 은과 금의 경우 결국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어떤 표현까지 하느냐?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우리가 나그네로 살면서 가져야 할 자세가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분명 내게 유익하던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 지식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있는 것.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전에는 자랑꺼리일 수 있는 것들, 즉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는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귀한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란 겁니다.
이후 내용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빌3:10-11) 한다고 말하면서 달음박질 하는 자처럼 달려간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20절과 21절에 가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러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하늘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이런 몸처럼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낮은 몸이라고 부르는 몸을 입고 있지만 그때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낮은 몸에서 영광의 몸에 이르기까지 달려가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나태하게 있거나 그 자리에 안주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은 18절과 19절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인데,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구약 백성들에게 없지 않았습니다. 비록 실체로서 나타나신바 되지는 않았지만 모형을 통해서, 예표를 통해서 알리신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창세전이란 영원 전을 의미합니다. 미리 알린바 되었다는 것은 예지를 말하는데,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설명하면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예지라는 말은 작정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혹은 예지보다 작정이 앞선다는 측면에서 작정하신 바에 대해 아신다고도 말하며, 간혹 작정보다 예지가 앞서지만 예지가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을 미리 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바를 아신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미리 알린바 되었다고 할 때 창세전에 알리셨기 때문에 작정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영원한 작정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예비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경륜의 역사 속에서 타락이 있고, 타락이 있기 때문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영원 전에 작정하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타락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 가운데 있었고, 타락한 자들 가운데 일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것도 영원한 작정하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죄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은 명백히 인간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함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타락을 작정하셨지만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죄의 저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죄가 나타나도록 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죄를 수단으로 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목적이 있는데,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그런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원 전에 버리기로 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전자를 위해서, 다시 말해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죄의 작정과 함께 누구까지 작정하셨는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택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물로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작정하여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은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은 것, 나아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아래 진행되고 있는 일이란 것입니다. 그 사실이 어떻게 드러났는가? 영원 전에 알리신바 되었지만 ‘때가 차매’(갈4:4),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말세로 표현하는데,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타내신바 되었다는 것은 영원 전에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 때는 모형으로 알리신바 되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비로소 실체로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실제로 대속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너희를 위하여’라고 밝힙니다.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을 위하여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정해놓으셨던 겁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는 모형으로 나타났지만 신약 백성에게는 실체로 나타나셨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보다 더 풍성하게, 보다 더 부요하게, 보다 더 판명하게 알게 하셨다는 점에서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그 은혜에 반대하는 것처럼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은 20절에서 ‘너희’라고 말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를 알려줍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선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고 알려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저들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요14:6).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개입하지 아니하실 경우,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없게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성이 고려되어야만 하고, 그와 동시에 두 번째는 우리의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무디고 빈약해서 그처럼 높은 위치에 서서 감히 하나님을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너무나도 높으신 분인 반면 우리는 너무나도 낮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멀고도 멀지만 이런 차이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즉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좁히셨습니다. 좁히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와 연합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한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까지 해 주셨습니다. 하나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을 그리스도 말미암아 믿는다고 할 때 중간에 보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택자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위해 보내셨는데,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다고 할 때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를 죽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금 살리심으로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폈지만 11절에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 사실을 이미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내용까지 영원한 작정의 내용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 전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셨는데, 그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것도 너희를 위한 것이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도 너희를 위한 것이고, 살리신 후 그로 하여금 영광을 주신 것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너희 죄를 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다는 것이고, 너희 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고, 또한 너희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7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반드시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라고 말하는 이 부분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사도 베드로는 오히려 그것을 더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보장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 영광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우리를 위해 영원 전부터 계획해 놓으시고 때가 되어 실행의 역사로 펼치신 내용인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이시고 부활하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로 하여금 영광스럽게 하셨다면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의를 얻게 하셨다면 그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 영광스러움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어떤 자들인가 할 때 너희가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일뿐만 아니라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신 자들이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믿음만이 아니라 소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하나님께 있게 하신 것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영광에 대한 것으로 영원 전부터 미리 예비하신 것을 구약 시대에는 모형으로, 신약 시대에는 실체로 이루신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하셨다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만을 바라는 자로서 이 땅에서 남은 생을 혹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를 나그네로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영광이 우리를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고난 가운데서도 죽음 가운데서 우리를 부활시켜 결국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이 땅에서 비록 나그네로 살지만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구별되게,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