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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06
요한복음 4장 24절, 출애굽기 3장 14절 [제4문]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입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고 할 때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바 핵심 된 두 가지를 배워야 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4문 이하 38문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39문 이하 107문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설명합니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4문에서 6문을 통해 설명됩니다. 4문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내용이고, 5문과 6문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으로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 하나님이 계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4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제4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답. 하나님은 영(요4:24)이시며, 그의 존재(출3:14), 지혜(시147:5), 권능(계4:8), 거룩(계15:4),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출34:6-7)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영원하시며(시90:2) 불변하십니다(약1:1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란 설명을 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일반계시에 대해 배운 바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과 밖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본성 혹은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계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전해주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계시로서 자신을 알리시되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셨는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고 난 뒤 더 이상의 특별계시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 알려주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도 특별한 어떤 계시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가장 먼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요한복은 4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할 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처럼 신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보면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말씀하실 때 너희가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형상이 있는데 형상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영으로 계시지만 그가 존재하신다는 것을 구약에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이상 가운데서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창세기 12장 7절과 같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라는 표현도 있는데, 영으로 계시지만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런 표현을 통해서도 알리십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더욱 부정할 수 없도록 자신을 충만히 보이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영으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상상하거나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형상화하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제2계명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할 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복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우리 육체만 보더라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세포가 있고, 조직이 있고, 기관이 있는 등 인체를 살펴보면 굉장히 복잡하고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복잡하지도, 복합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영이신 하나님은 순수함과 단순함으로 충만하십니다. 영어로 심플하신 분,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결코 부분이 없으시며, 어떤 변화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1장에서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분은 우리처럼 변덕스럽거나 혹은 변하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동일하시며, 언제나 한결같으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변화가 있는 듯 말씀하시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신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제로 후회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그렇게 표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당연히 눈과 귀, 손과 발과 같은 부분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귀를 듣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열굴을 구하라는 식의 말씀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실제로 하나님께 눈과 귀, 손과 발 등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영이신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이란 말은 때로는 사람의 영혼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진리가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육신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방식, 육체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령 안에서 드린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고(롬8:15),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그런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위에서 난 자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참된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진리 안에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해 놓으신 규범이 있는데, 그런 규범을 따라 예배하는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예배 방식,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 낸 그런 방식,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또한 복합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때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식들은 다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를 따라 예배해야지만 영이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그의 존재(출3:14), 지혜(시147:5), 권능(계4:8), 거룩(계15:4),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출34:6-7)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영원하시며(시90:2) 불변하시다(약1:17)고 가르치는데, 존재와 관련해서는 출애굽기 3장 14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스스로 계시다는 이 말의 원문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설명하자면 “나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 “나는 있는 대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동사가 일인칭 미완료 시제이기 때문에 “나는 과거에도 존재하는 대로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며, 미래에도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그런 자이다.” 이런 뜻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시느냐 하면 13절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것이 “나는 나다”라는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지만, 하나님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분,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분이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 “나는 있는 대로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도 과거에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하는 분으로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영원하신 분, 그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가 바로 하나님이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글 번역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할 때 매우 잘 번역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존자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분이 아니십니다.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안에는 시간과 공간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그런 분으로 알리고 계신 겁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편 148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148:3-5) 이사야 43장에서도 동일하고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물론 죄가 그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지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을 통해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 반면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통해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출3:14), 외에도 소요리문답은 지혜(시147:5), 권능(계4:8), 거룩(계15:4),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출34:6-7)이 그의 속성이라고 가르치면서 이런 속성들이 무한하시며(욥11:7-9) 영원하시며(시90:2) 불변하다(약1:17)고 가르치는데, 일단 무한하시다는 것, 영원하시다는 것, 불변하시다는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첫 번째로 무한하다는 말은 정도, 범위, 한계가 없으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동시에 충만히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은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임과 동시에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계와 구별되며 그것과 동일시 될 수 없지만, 그분은 여전히 그의 전 존재와 권능으로 그 창조물의 각 부분에 계십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편의 기록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떠나 갈 수 없으며, 주님 앞에서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의 속도라 하면 1초에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돈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속도로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눈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런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이요, 공간에 있어서 모든 곳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무한하시다고 할 때 우리의 삶의 모든 여정 가운데서 그분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행해야 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내용이 하나님께서 어떤 공간에 갇혀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계십니다. 그러나 공간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기도 하시지만, 멀리 계시기도 하십니다. 우주 공간 안에 있지만 우주 공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8장에서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주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27). 욥기 11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음부보다 깊다고 말합니다(8). 이사야 66장에서는 하늘은 주의 보좌요, 땅은 주의 발등상일 뿐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사66:1).
두 번째로 영원하다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계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경우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900세를 넘게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말하고, 100세를 살면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그들도 다 죽었다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그들의 년 수를 계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그 년 수를 계산할 수 없습니다(욥36:26).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계1:8). 알파와 오메가란 말은 헬라어에 첫 알파벳과 끝 알파벳인데, 영어로 하자면 A와 Z입니다. 시작과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의 시작과 그 끝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면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시작 전에 계시고, 끝 이후에도 계신 분, 그분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경우 썩고 죽음을 맛보게 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분으로서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만 있습니다(딤전1:17). 영원하시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영원한 지옥 형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도 영원을 보장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은 영벌로서의 영원인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 받게 되는 자들은 영생으로서의 영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내용 때문에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제한된 이 땅에서 영원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불변하시다는 것은 어떤 변화가 없이 항상 동일하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생성되지도, 발전하지도,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생각해 보면 분명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약하게 됩니다. 지혜도 자라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17).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8).
이 불변성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 그것도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시작과 끝 사이의 과정까지도 정하셨다고 할 때 그 정하신 뜻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이렇게 할 때는 이런 식으로, 저렇게 할 때는 저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고 그 여러 가지 길 가운데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사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길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길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고민을 합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결정했는데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까지도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는 어떤 실수, 실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연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처럼 보이는 그 일도 하나님 안에서는 필연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작정하셨다고 할 때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선택과 유기의 내용이 있는데,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선택하기로 하셨다가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열매로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분명하다는 확신도 가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불별성, 그리고 그의 선택에 있습니다.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우리에게 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을 때도 있지만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안 좋을 때가 더 많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날마다 죄와의 싸움을 싸우면서 죄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택하여 부르셨으면 그 구원을 취소하지 않는다는 불변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불변하시기 때문에 구원에 합당한 열매도 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무한성, 영원성, 불변성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실 뿐 아니라, 그의 지혜에 있어서도, 그의 권능에 있어서도, 그의 거룩에 있어서도, 그의 공의에 있어서도, 그의 선하심에 있어서도, 그의 진실하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이하 로버트 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참조).
우선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지혜란 만물에게 제각기 목적을 부여하고, 그 목적에 정확히 부응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에게 부여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작정하시되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택자와 유기자로 정하시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어떻게 택자와 유기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 로마서 9장 22절과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런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분의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속성과 만물의 본성에 모순됨이 없이 모든 일을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시편 115편 3절에서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어떤 모순이나 억지가 없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그가 원하시는 것에 한해 자신의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풀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은 한이 없으시지만,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창조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창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없이 창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그의 능력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도덕적 불순함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영예를 위해 행하시며 자신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일은 기뻐하시지만,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혐오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공평하고 의롭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상대하실 때도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자신과 관련해서는 자신의 권한과 권위에 따라 모든 일을 온전한 속성과 본성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하십니다. 때문에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불의함이란 결코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선하시는데, 이 하나님의 선하심은 보는 관점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비참한 자들을 돌아보시는 경우에는 ‘긍휼’이라고 불리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재앙 외에는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실 때는 ‘은혜’라고 불립니다. 또한 궁핍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때는 ‘관대하심’이라고 불리고, 진노를 부추기는 반역자들에 대한 형벌을 연기하실 때는 ‘인내, 또는 오래 참으심’이라고 불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여러 형태의 신적 호의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인데,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 거짓이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혹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있다면 그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반드시 이루십니다. 약속만이 아니라 경고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 경고하시는 바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으로 행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보충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을 보면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고백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살전1:9, 렘10:10) 오직 한 분(신6:4, 고전8:4,6) 외에 없다. 그는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26:14), 가장 순수한 영이시며(요4:24), 볼 수 없으며(딤전1:17),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신4:15-16, 요4:24, 눅24:39) 성정들이(행14:11,15) 없으시며, 불변하시며(약1:17, 말3:6), 광대하시며(왕상8:27, 렘23:23-24), 영원하시며(시90:2, 딤전1:17), 측량할 수 없으며(시145:3), 전능하시며(창17:1, 계4:8), 가장 지혜로우시며(롬16:27), 가장 거룩하시며(사6:3, 계4:8), 가장 자유로우시며(시115:3), 가장 절대적이시며(출3:14),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잠16:4, 롬11:36)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시며(엡1:11),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며(요일4:8,16), [가장] 은혜로우시며, [가장] 자비로우시며, [가장]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있어서 풍성하시며, 악행과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시며(출34:6-7), 그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며(히11:6), 동시에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가장 공정하시고 [가장] 두려우며(느9:32-33),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시5:5-6), 그는 결코 죄책을 사하지 않으실 분이시다(나1:2-3, 출34:7).”
이런 속성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하나님보다 완전하신 분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 안에 모든 기쁨의 충만과 만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곳에 두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모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어떤 답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여 부르셨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왕이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거룩하신데 거룩이 아닌 죄악된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을 더욱 드러낼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성한 성품, 다시 말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하는 겁니다(벧후1:4). 로마서 8장에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고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롬8:29).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을 닮아가는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