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음악 가을의 신사(紳士)‘
* 갈대와 억새
1. 여자의 마음 (La donna e mobile)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hiano Pavarotti) : 오페라 ‘리골레토’ 中에서
2. 갈대의 순정 박일남(85) : 가요무대
3. 소양강 처녀 : 박혜신
4. 숨어 우는 바람 소리 : 이정옥
5. 짝사랑 : 고복수
6. 억새꽃 사랑 : 최훈녀(소프라노)
1. 추석이 지나고 벼 베기를 앞둔 들판이 황금물결로 일렁입니다. 곳곳에서 가을걷이가 시작돼 이 황금물결도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을 내내 황금물결을 이루는 곳이 있습니다. 가을 햇살에 눈부신 황금물결은 강에도 산에도 있습니다. 바로 전국 곳곳에 자리한 갈대숲과 억새 숲입니다.
갈색과 은색의 이삭을 매단 갈대와 억새는 가을의 또 다른 상징입니다. 바람에 날렵한 몸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가을 정취를 안겨주는 가을 선물입니다. 닮은 듯 다른 이 둘은 집안이 같습니다. 지금 황금 들판을 이룬 벼와 마찬가지로 둘 다 볏과식물입니다. 그렇지만 사는 곳도 다르고 모양도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갈대밭으로 유명한 곳이 순천만 갈대 습지와 을숙도 철새 도래지, 서천 신성리 갈대밭, 금강 하구언 같은 곳입니다. 모두 물이 있는 곳입니다. 고인 물이나 흐름이 적은 물속에서 갈대는 자랍니다.
포천 명성산과 울산 영남알프스, 정선 민둥산, 상암 하늘공원은 억새 군락지로 이름난 곳입니다. 모두가 산이 아니면 언덕입니다. 그러니까 갈대는 물이나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고 억새는 산이나 뭍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갈대는 ’풀을 단 대나무‘입니다. ’갈‘은 풀이고 ’대‘는 대나무를 이야기합니다. 억새의 ‘억’은 ‘억세다’는 의미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새’는 풀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억새는 ‘억센 풀’이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둘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잎을 보면 압니다. 억새는 잎의 중앙을 하얀 잎맥이 선명하게 지나갑니다. 잎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의 날이 서 있습니다. 자칫 손이 베일 수 있습니다. 갈대는 잎맥이 초록색이고 잎가장자리가 억새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이삭 형태로 나타나는 꽃의 색깔과 모양도 차이가 있습니다. 억새는 가지런한 은발이지만 갈대는 갈색으로 덥수룩합니다. 키는 갈대가 억새보다 통상 1m 정도 더 큽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둘은 확실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변의 생명들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생(相生)의 식물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잎과 줄기, 이삭, 뿌리 등 온몸으로 주변에 많은 생명을 길러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려와 헌신으로 상생과 공생을 실천하는 ‘가을 신사’가 분명합니다.
갈대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갈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얘기를 흔히 합니다. 바람에 흔들려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판단하기도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말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에서 호색한인 만토바 공작이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부르는 아리아에서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지고 통용 돼왔습니다. 리골레토는 이 오페라의 주인공인 어릿광대 이름입니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만토바 공작으로 등장해 부르는 ‘여자의 마음’ (La donna e mobile)입니다.
https://youtu.be/OQlC-1FV6CE?si=BwiDcirUnMuticO_
2. 약해 보이지만 갈대는 아주 강한 식물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굽신거리는 갈대를 보고 떡갈나무가 비웃습니다. 그런데 강풍이 불어와 쓰러지면서 오히려 떡갈나무가 망신당합니다. 이리저리 흔들리기는 했어도 갈대는 강풍에도 부러지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와 있습니다.
파브르 ‘식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비어있는 갈대 줄기와 곳곳에 만든 마디 때문에 센 바람에도 끄떡없습니다. ‘비움의 미학’이 만들어 낸 강함과 유연함입니다. 그래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약한 이미지를 줍니다.
익숙한 대중가요 ‘갈대의 순정’은 사랑에 약한 남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6년 당시에 중저음의 박일남이라는 가수가 불러 30만 장의 앨범이 팔렸습니다. 67년 전의 30만 장이면 엄청난 대박입니다. 약해 보이는 갈대가 그렇게 대중문화에서 한차례 엄청난 위세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박일남은 폭행과 사기사건 등에 연루돼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여든네 살로 노년이 된 그는 보름 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타나 노년의 나이에 속죄의 떠돌이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거의 노래를 접었지만 여든세 살인 지난해 가을 가요무대에 등장해 아직도 매력 있는 묵직한 저음으로 추억의 ‘갈대의 순정’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gco6GyFzpNg?si=hE8GIXSVrsb8K8HF
3. 갈대 이삭에 달린 씨앗들은 새나 곤충 등 주변 생명들의 먹거리가 됩니다. 잎과 줄기도 마찬가지로 먹이가 됩니다. 갈대밭에는 많은 조류가 찾아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대규모 갈대숲은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입니다.
흑두루미, 청둥오리, 저어새 같은 겨울 철새들이 갈대숲을 드나드는 것을 자주 봤을 겁니다. 갈대는 단순히 먹거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새들이 천적들을 피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숙소까지 제공합니다.
그래서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같은 가사의 ‘소양강 처녀’가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박혜신이 부릅니다.
https://youtu.be/AZcXfNUmHzc?si=ZeqMEIojB6uUHIUa
4. 갈대가 자라고 있는 물속을 들여다보면 목 질화된 뿌리줄기 지하경(地下莖)이 물 바닥 땅속에 층층이 뻗어 갑니다. 이 뿌리는 노란색 수염뿌리를 달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래무지와 물자라, 소금쟁이 같은 물속 생명이 기생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갈대 뿌리는 또 하나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물을 맑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물속 생명이 모여드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갈대숲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노래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숨어 우는 바람 소리’입니다.
50대 중반의 이정옥이 지난 6월에 부르는 노래를 불러옵니다.
https://youtu.be/T6ZcAY8FJb0?si=XqV7f8xJ_i40j6rZ
5.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나온 오래된 대중가요 ‘짝사랑’의 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가을을 상징하는 ‘으악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닙니다. ‘새’는 풀 나무를 지칭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그 가운데 ‘으악새’는 억새를 가리키는 경기도 방언입니다. 이 억새가 스치는 바람에 몸을 흔들어 대고 빗겨 내린 햇살에 은빛 광채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면 삶의 쓰고 단맛을 모두 겪은 뒤 은퇴한 은발의 초연한 신사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억새의 꽃말에는 ‘은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수 고복수의 은퇴 무렵의 삶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붙잡혔다가 탈출하기도 했고 사업 실패로 부인 황금심이 노래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안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으로 1972년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세 아들 모두 음악에 종사하면서 집안이 음악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숨 쉬는 듯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을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https://youtu.be/yGbfc7ksV4c?si=1m2bkw8Ye5Yp52_9
6. 서울에서 가장 쉽게 가볼 수 있는 억새밭이 바로 상암동 하늘공원입니다. 그곳에 가면 억새밭에서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억새밭은 여치와 메뚜기, 잠자리, 맹꽁이 같은 여러 생명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억새잎과 줄기에는 섬유질이 많습니다. 이 섬유질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에게 에너지 자원 역할을 합니다. 많은 곤충과 동물이 억새밭을 찾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억새의 뿌리도 갈대처럼 목 질화된 뿌리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갑니다. 이 뿌리줄기는 우선 메마르고 거친 땅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땅속에 비오톱이란 공간을 만들어 많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야고와 같은 식물은 뿌리에 붙어 함께 살도록 배려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억새는 사랑이 풍부한 식물입니다. 가곡 억새꽃 사랑을 들어봅니다. 물론 억새의 사랑이 아니고 인간의 사랑과 그리움을 억새에 빗대어 노래했습니다.
박수경의 시에 김애경이 곡을 붙인 노래를 소프라노 최훈녀가 부릅니다.
https://youtu.be/Zgv-ehIytEU?si=waMVjSAt2OHx8ita
겨울이 돼서 크리스마스가 오면 아이들은 행복이라는 선물을 나눠줄 산타를 기다립니다. 산타클로스가 고운 아이 미운 아이 가리지 않고 선물을 나눠주듯이 갈대와 억새는 찾아오는 생명, 누구를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나눠주며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갈대와 억새는 ‘가을의 산타클로스’ 같습니다. 사람들에겐 가을 정취를 선물해 행복감을 안겨 주고 주변 생명들에겐 살길을 마련해주니 그렇게 불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갈대와 억새의 머리에 달린 이삭은 산타클로스가 쓴 모자의 고깔같이 보입니다.
~ 배석규 ~
오늘은 여유를 갖고 일어나 글을 씁니다. 엇저녁에 쓰다가 피곤해서 미뤄두고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이것저것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글을 마감합니다. 이제 몇 가지를 덧붙여 카톡을 보내야지요. 오후엔 벌터산 맨발걷기를 하고 좀 걸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