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241030 송언수
나는 엘자에게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말도, 안에게 함께 니스에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가슴 속 욕망에 쫓겨 실수를 저지르기를 바랐다. 안이 우리의 지난 삶을 경멸하는 것을, 아버지와 내게는 행복했던 그 삶을 그토록 간단하게 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모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안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의 개인적인 가치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시적인 육체적 욕망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가 어떻든 자신이 옳기를 바란다면, 우리를 잘못된 사람들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p165
세실은 아직 어린 프랑스 여자아이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유쾌한 삶을 추구하는 다분히 매력 넘치는 아버지와의 삶이 만족스러운 그녀였다. 문제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안의 등장으로 그녀의 삶이 이전과 달라지는 것을 참지 못하면서 벌어졌다.
그녀 역시 안의 품위있는 삶을 동경했다. 단지 여름휴가 기간임에도 시험공부하라 하고 시릴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구속이 싫었을 뿐이다. (안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인디아니 존스도 아들인지 몰랐던 해리(오토바이 수리공)에게는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면 된다 하지만, 아들인 것을 안 이후로는 학교에 가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던가) 그녀는 존중받고 싶었다. 안과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그의 아버지나 자신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이전처럼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싶었다.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싶었다. 엘자와 시릴을 꼬드려 아버지와 엘자의 만남을 부치긴 건 단지 그 때문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고고한 안의 눈물을 보며 세실은 절망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바로잡고 싶었으나, 안의 죽음으로 그럴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달뜨던 시릴과의 사랑도 사랑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레몽과 세실은 바라던 대로 다시 예전이 삶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늦은 밤 혼자가 된 그녀는 안의 이름을 부르며 슬픔에 잠긴다. 그녀는 그렇게‘슬픔’이라는 감정을 품게 되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경험을 통해 감정이든 사고든 배우며 성장한다. 시린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은 생명이 한층 더 견고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가 내린 뒤 땅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세실은 여전히 자유분방한 삶을 살지만 이제 어린 소녀가 아니라 조금은 성숙한 여인이 될 것이다. (불쌍한 안. 남편이 이런 류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늘 하는 말이 있다. “죽은 놈만 불쌍하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 ‘슬픔이여 안녕’은 떠나보내는 인사말이 아니라 만남의 인사였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만날 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00이여 안녕은 무언가를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쓰는 말이다. 책을 덮으며 그 생각에 미치자 다른 어떤 제목이 있을 수 있을까 누차 생각해 보았다. ‘슬픔, 안녕?’, ‘내게 온 슬픔’, ‘슬픔을 만나다’.
아니다. ‘슬픔이여 안녕’,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은 없을 듯하다.